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과 강진 용혈

$18.30
Description
·승려 아암 혜장과 만나 천주교에서 불교의 세계로 이끌리다
·다산이 직접 발굴하고 재조명한 고려 8국사는 어떤 인물들이었을까
·『만덕사지』와 『동문선』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강진 용혈
이 책은 두 개의 이야기가 200년의 시간 간극을 두고 각각 600년 전 고려, 800년 전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 나란히 펼쳐진다. 전자는 처음 발굴했다는 의미에서 탁월했다. 후자는 800년 전 인물과 200년 전 인물을 동시에 만나면서 둘의 이야기를 중첩시켜 전개하기에 의미 깊다. 전자는 다산 정약용이고 후자는 저자 정민이다. 정민 교수는 다산의 오랜 연구자로서 이 책을 통해 다산의 면모를 더 환히 밝히면서, 역시 다산과 마찬가지로 800년 전의 고려 불교 성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다산이 이정 등의 제자들과 600년 전 자료를 발굴했다면, 저자는 200년 전 다산의 자료를 발굴해 다산이 거슬러간 시간을 그대로 되밟고, 또 다산이 잘못 밝힌 것까지 바로잡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바로 그 인물에게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한 그 세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고려의 사라진 역사가 곧 드러난다.
저자

정민

한양대국문과교수.
천주교신자와유학자사이의중간지점에서정약용을바라본『파란』(전2권)을펴냈다.이로써방대한자료와더불어청년다산의발자취를따라간다.근년에새로운자료의발굴은『강진백운동별서정원』과『잊혀진실학자이덕리와동다기』로발표돼다산과관련한백운동의문화적가치와18세기잊혀진실학자의면모를새롭게조명했다.
박지원의산문을꼼꼼히읽어『비슷한것은가짜다』와『고전문장론과연암박지원』을썼고,18세기지식인에관한연구로『18세기조선지식인의발견』과『18세기한중지식인의문예공화국』,『다산선생지식경영법』등이있다.『미쳐야미친다』,『삶을바꾼만남』,『다산증언첩』등과청언소품에관한책을여러권펴냈다.수필집으로『책읽는소리』,『스승의옥편』,『체수유병집』등이있다.조선후기차문화사를정리한『새로쓰는조선의차문화』와한시의아름다움을탐구한『한시미학산책』등이더있다.우호인문학상,지훈국학상,월봉저작상을수상했고,백남석학교수에선정되었다.

목차

머리말

제1부강진용혈암지의관련기록검토

제2부다산의용혈관련기록
1.「용혈행」
2.「조석루기」
3.「천책의시권에제함」
4.「승려초의의순을위해써준증언」
5.삼성미술관리움소장「표피장막책가도」
6.「유용혈기」
7.「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

제3부고려8국사와용혈관련기록
1.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병서
2.「만덕산백련사주요세증시원묘국사교서」와「관고」
3.「만덕산백련사정명국사시집서」
4.천인이용혈의서誓스님에게보낸시외3수
5.천인이원환스님께보낸시2수
6.진정국사『호산록』발문외
7.고려관인의『연사제명시첩』에수록된한시
8.천책의『연사제명시첩』화답시편
9.5대이안과6대원혜관련글
10.7대무외정오와「암거일월기」
11.두편의백련사사적비

제4부용혈암지의공간구성과배치
1.용혈명칭의유래
2.강진용혈과용추
3.문헌기록을통해본용혈암지의공간배치
4.용혈암지현장공간

제5부유물로본용혈암의불교사적위상
1.고려국왕의하사품향로와「향로기」
2.국왕의하사품금발
3.용혈암지5층석탑
4.용혈암지수습청자불상파편

제6부제언과전망

출판사 서평

800년전천책스님이머문이후폐허로변했다
200년전다산이용혈을다시호명했지만,잡초에파묻혔다
200년이지나이책을통해용혈이다시금되살아난다

다산,유배지에서고려불교의자취에이끌리다

오랫동안다산관련자료를발굴하고연구해온정민교수는근년에강진을중심으로다산과교유관계를맺었던이들의자료들을새롭게발굴함으로써『강진백운동별서정원』『잊혀진실학자이덕리와동다기』를펴내조선후기실학사의감춰진면모들을밝혀냈다.『다산과강진용혈』은그연장선상에서강진의‘용혈’이라는장소가다산을불교의세계로끌어들였고,천주교신자임에도다산이고려불교의빛나는성취들을좇은자료들을새롭게발굴함으로써800년간묻힌역사의단면을환히밝힌다.
강진에유배되어있던1805년다산은만덕사승려아암혜장을처음만났는데,둘은자석처럼서로를끌어당겼다.아암은온힘을다해다산의정착을도왔고,밤깊도록둘은『주역』등을토론하며학문의세계로빠져들어갔다.그러던어느날아암이다산에게『호산록湖山錄』이라는낡은책을한권내밀었다.“고려때이곳만덕사에서백련결사白蓮結社의주맹으로계시던진정국사천책스님의시문집이올시다.”시를읽은다산의눈은놀란빛이되었다.“이런시인을몰랐다니!이럴수있는가.”다산은시의필자를신라의최치원과고려의이규보에견주면서천책이누구냐고다그쳤다.아암은그스님이만년에머물던용혈암터가근처에있으니한번같이가자고청했다.이로써1806~1807년경다산은천책에게로끌려들어갔고,후에고려시대백련결사의자취를좇아『만덕사지』를편찬하게된다.
용혈암은고려때의암자터이며당시스님을뵙고자조정의고관들이수레를잇대어기다리던불교의성지였다.용혈암은강진군만덕산의만덕사를창건한원묘국사요세때처음암자로조성돼백련결사에속한승려들의수행처가되었다.그들은여기들어와바깥세상을차단한채한글자쓰고세번씩절을올리며『법화경』을사경하는등수행을했다.특히천인,천책,정오3국사가거쳐가면서이곳은성지로우뚝섰다.용혈구역은절벽아래물이쏟아져내리는용천을곁에둔용혈굴이있었고,그동편의넓은평지에용혈암이있었다.그아래쪽에는축대를쌓은누대가있었다.또괘탑암구역은예전에천인이중창한괘탑암이동서3칸의규모로자리잡았고,남쪽봉우리에대를쌓아세운능허대가있으며,동쪽시냇가에초은정이란작은정자가있었다.특히용굴안에는감실이꾸며져부처님을모시는등용혈암에는꽤큰규모의사찰이자리했던듯하다.
하지만다산이이곳에갔을때는신우대덤불속에파묻혀고려때의성대한자취는없고온통폐허가되어있었다.건물터에우뚝솟았던층층의누대와경사로를타고둘러쳐진섬돌이나계단은모두무너진채였다.다산은『호산록』의저자천책스님을흠모하며간곳에서버려진땅을목격한뒤해마다봄철이면이곳용혈로소풍을갔고,이곳을둘러싼문헌들을하나둘발굴하면서그자신도용혈과관련한기록들을남기게된다.

다시200년간파묻힌성지를발굴하다

고려이후유일하게다산만이기록과시문으로역사의뚜렷한시간들을복원해냈건만용혈은다시폐허로파묻히는비극을면치못했다.그것은아마도다산이유배지에서자신을숨기고가탁하여기록을남겼을뿐아니라자신의문집에그것을올리지않음으로써후대에미처드러나지않은것이리라.
그러나다산이후200년간다시잡목과풀에둘러싸인이곳을이책의저자가발굴하게된다.이는다산의발자취를그대로닮아다산과저자의행보를동시에되밟아가는독자들을흥분케한다.저자는지난10여년간다산에이끌려강진땅을수없이밟았다.다산이봄마다용혈로소풍을갔듯이저자도강진에갈때마다용혈을서성였다.다산등의용혈관련기록을손에들고,길이온통막힌곳의수풀을헤치며암자터를찾았다.눈앞의시야가확보되지않자더높은반대편으로가용혈의공간과지형을가늠하려던중벼랑길에서구르기도했다.
기록과현장을비교하던저자는둘의아귀가잘맞지않자주요지점들을찾으려온갖방법을시도했다.사실용혈입구는1983년부터만덕광업이채석장으로운영해와늘먼지가부옇게쌓여있다.2013년민족문화유산연구원이용혈암지발굴조사를했지만이는지표조사에서그쳤을뿐이다.저자는분진가루속에서그너머상사곡上寺谷에있었다는괘탑암과능허대,초은정의위치를잡아보려고아슬아슬한등반을몇차례했다.하지만기록이모호하고,세월은800년이흘러지형도변한데다우거진수풀로인해이런시도는명확한결론을내지못한채끝났다.
그러던중삼성미술관리움의「표피장막책가도」속서첩에적힌글귀에서‘자하산인紫霞山人’과‘다창茶?’이란호를쓴이가천책의시에차운한시를발견했는데,지은이는놀랍게도다산정약용이었다.또만덕사고려팔국사각의상량문에철경응언이라는인물이고려백련결사8국사의사적을밝혀두었는데,이역시다산이응언의이름을빌려쓴글임을밝혀내게된다.저자는또한조선초기서거정이찬집한『동문선』이『호산록』에수록된시문을대거녹여담고있음을확인하는성과를거두었다.『동문선』에는이외에도만덕사와용혈을거점으로했던백련결사에대한글이놀랍도록많이수록되어있었다.터만남은용혈암에관한기록이이처럼풍부해다산이놀랐던것처럼,이자료들을발굴한저자또한놀랄수밖에없었다.
더욱이저자는19세기후반윤치영의문집에서용혈에보관되었던고려국왕이하사한금동향로에대한기록을찾아냈다.그외에국왕이하사한바리때와용혈굴에원래있었던용이깃들었다는깊은연못에대한증언도확인했다.모든기록이한자리에모이자,백련결사의4대주맹이었던진정국사천책뿐아니라,이곳을거쳐간고려의3국사와여러고승의고결한행적들이드러났다.새로만난용혈암은그저그런수백수천의암자터가아닌고려불교의성지였다.

「유용혈기」와「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을짓다

고려이후용혈에관해유일하게기록을남겼던다산의글을살펴보자.가장구체적인글은「유용혈기」로,수많은정보를담은중요한산문이다.여기서다산은자신이용혈을매년찾게된사연과용혈암주변의지형,곳곳에남은자취등을묘사하고있다.

“용혈로놀러가는것을해마다상례로삼았다.다만마치소라껍질처럼휑하니깊게패여괴상하게보이는것이용혈이다.쟁글대며쏟아지는물이절벽을따라흘러서내려가는것은용천龍泉이다.용천의동편에한구역의평탄한땅이있는데,이곳이용혈암의옛터다.(…)당시에공경과학사및수령들이다들속제자라일컬으며용혈대존숙龍穴大尊宿에게시를바쳤으나,두승려는바야흐로누워쉬면서가벼이움직이지않았다.떠올려보면골짝어귀밖에덮개를벗기고안장을푼인마가늘어서고,손을맞잡고서명을기다리던자가벌떼처럼빽빽했을터이니이얼마나성대한가…….”

다산의제자이정은서울에갔다가만덕사의천인과정오의실적實跡을얻어돌아왔다.다산은이자료와천책의『호산록』을더해만덕산백련사의옛역사를파악하게되었고,1814년봄만덕사의승려로아암의제자였던삼초정오와기어자굉을데리고만덕사의또다른역사현장인용혈암터로이들을안내했던것이다.
다산은또한「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을지었는데,여기서만덕사에고려팔국사각을세우게된과정과8국사의전기를정리하고있다.이것은그동안학술자료로활용되지못했는데,존재자체가널리알려지지않았을뿐더러함축적인표현과중층적의미를띠는고사때문에이해하기쉽지않았던것이다.이상량문은아암의제자이자다산에게서배웠던철경응언이지었다고적혀있지만실제작자는다산임을저자가밝혀내고있다.그논거는이렇다.달리예를찾기힘든다산특유의표현이문장에반복해서등장하는점,다산이특별히인용했던『호산록』의해당구절이글속에녹아든사실,상량문의형식이다산외에는전후로아무도쓰지않은방식이라는점,글의행간에자신을암시하는표현을군데군데끼워넣은것,젊은철경이무심결에늙었다고말하고있는점…….더욱이다산은만덕사8대사의비문4편과그외불교관련글여러편을다른승려의이름으로대신지은적도있었다.

눈부신성과,『만덕사지』

『만덕사지』는다산의제자이정과승려자굉이편집의주축이되어,한명은서울까지가서고가古家의비장?藏을뒤지고,한명은불승佛乘에남은사실을하나하나모아정리하는수고를아끼지않은결과물이다.
작업과정은이랬다.다산의명으로상경했던이정은『동문선』의나머지책에실린백련사창건주원묘국사의비문과정명국사의시집서문및관련글,진감국사의글을대거발굴해서돌아오는성과를거두었다.이에비로소백련결사의본거지였던백련사의실체가수면위로떠올랐다.
다산은1806년전후아암을통해진정국사천책의문집인『호산록』을보아그의문학에이미깊이매료되었었고,매년천책의자취를찾아용혈암으로소풍을다녀온터였다.다산은이정이찾아온자료를바탕으로1814~1815년백련결사관련내용을정리했고,단편들을재조합해서마침내1815년8국사의존재와주맹主盟의계보를정리했던것으로보인다.
이후다산은고려8국사에대응이될조선8대사를선정해짝을맞췄고,8대사의경우는8명중자신이5명의비명을한치응,홍기섭등다른사람의이름을빌려대신짓기까지하면서전체틀을짜나갔다.여기에불우佛宇에대한정보와수집자료및시문을정리해1816년4월에는승려들이아예다산초당에상주하면서편집작업을해그해후반기에작업을마무리지었던듯하다.
『만덕사지』가거둔가장눈부신성과는절에서조차그존재가완전히잊혔던8국사의빛나는전통을되살려놓은것이었다.이에8국사현창사업의필요성이적극대두되어이듬해인1817년봄팔국사각이건립되었다.이처럼『만덕사지』편찬과정에서다산의역할은굉장히적극적이고주도적인것이었다.다산은『만덕사지』의완성으로자부심을얻어팔국사각의건립과상량문제작을했고,내친김에철경응언의이름으로「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까지직접지어『만덕사지』와자매편이되도록해만덕사의위상을한껏드러내고자했다.
하지만이후어느시점에선가고려팔국사각은흔적없이사라지고,지금은상량문만목판에새겨져걸려있다.그리고1988년이후만덕광업이광산을운영하면서이주변은환경이훼손되고분진,소음의문제가지속적으로제기되어왔다.이책의저자가강진용혈을수없이찾아가면서팔국사각이복원되어법화도량백련결사의바탕이된백련사의전통이새롭게기려지길바라는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