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서문]
토도로프의《불완전한정원》은우선그구성과내용에있어상당히높은등급의소설친화성을띠고있다.16~19세기의프랑스지식인이대거등장하는가운데,직접화법위주의수많은인용문과더불어책의내용자체가다기한묘사효과를수반한일종의대형서사체로다가온다는점에서그렇다.특히책을읽어나가는독자의입장에서보면,여러등장인물의다채로운목소리와더불어학제적(學際的)성격의대형사극(史劇)을보고있는듯한느낌이들기도한다.토도로프가흔히언어학자?문예비평가?역사학자?철학자?사상가를아우르는세계적석학으로평가되고있거니와,저자의그런면모또한이책의독특한수용미학적효과에일조하고있는것으로여겨진다.
사실이책은그자체로서보수주의,과학주의,개인주의,인본주의라는네계보간의팽팽한싸움터이자아기자기한놀이터이다.달리말해,신과인간,자연과인간,사회와인간,그리고인간과인간,이렇게인간존재를구심점으로하는크게네갈래의주장이때로는상호배타적으로첨예하게대립하고때로는상호보완적으로원만하게대질하는현장인것이다.이와관련하여저자토도로프는《프롤로그》(11~12쪽)에서이책이철학이아니라‘사상’,좀더확실히하자면‘사상사’에속한다는점을분명하게밝혀두고있다.그에의하면우선철학에비해‘사상’은실천적성격이강하고그영역이훨씬더광범위하다.그리고항시적으로갖은불행에직면해있는인간조건에제대로대처하기위해서는,특정한사상이아니라‘사상사’에대한폭넓은고찰이더절실하게요청된다.
한편이책의핵심주제인‘인본주의’의시초적대립개념이‘신본주의’라는점을우선짚고넘어갈필요가있다.프랑스(어)에있어서는,일찍이몽테뉴가자신의작업을신학자들의작업과차별화하면서스스로‘인본주의자’(humaniste)라고자처한것이‘인본주의’라는용어의시원(始原)이기도하다.그런데정작이책은그같은2원적대립구도를건너뛰다시피하고있는바,이와관련해서는이른바‘신들의전쟁’이라는저자특유의우회적표현에주목할필요가있다.그에의하면“신들은아마다기하겠지만,인간들은하나다.”바꾸어말하자면,오직하나인것이차라리‘인간종’이고그안에서각양각색으로생겨난것이오히려‘신들’이다.종교가인류잔혹사에서역설적으로큰비중을차지했고지금도부단히크고작은갈등과대립의불씨로작용하고있는것또한바로그같은신들의복수성때문이다.이렇듯토도로프는-기독교를비롯한모든종교의순기능을부정하지는않되-지배체제로서의신정주의와특히인간학으로서의신본주의는이책의출발선상에서아예배제하고있는것이다.
위와같은기조아래이책은《프롤로그》와《에필로그》이외에총9개의장으로구성되어있다.우선1장에서는근대적인간의특징인‘자유’와관련하여프랑스대표적인본주의자들의저술들을고찰한다.그리고나서논의전개의전체적흐름이크게세갈래로나뉘는데그첫째는고독,사랑,우정등사회생활을위협하는요인들에대한고찰(3~5장)이고,둘째는개인의해체현상에대한심층분석(6장)이고,셋째는개별인간과사회를아우르는‘가치’의문제에대한인본주의적성찰(7~9장)이다.이것을역자나름으로요약하자면,문제의네가지사상계보를실천적인간학의관점에서엄밀하게비교분석한다음각계보의강점과취약점을기존의정치체제들과결부시켜재조명하는것이다.이리하여저자가다다르는결론은다음과같다.즉“권위주의체제가보수주의와친화적이고,전체주의가유토피아적과학주의와친화적이고,혹은무정부주의가개인주의와친화적이듯,민주주의체제는인본주의사상과친화성을갖는다”는것이다.
다시인본주의에초점을두고보자면,이책의내용상핵심은물론저자의집필의도까지잘파악할수있게해주는아래두대목이특히눈길을끈다.책속표지의관례적헌사(獻辭)와는별개로,저자가아래와같이본문안에서두차례에걸쳐이책의‘헌정’(獻呈)상대를특정하고있다는점에서그렇다.
《1》“이책이몽테뉴에서출발하여데카르트,몽테스키외,루소그리고콩스탕을거쳐토크빌에이르는프랑스인본주의의전통에헌정된것도바로이러한이유에서이다.”(《에필로그》,387쪽)
《2》“그런가운데내나름의각별한소신을미리피력하자면,우리가처해있는조건과거기에따르는난관들을극복하는데있어,근대정신의계보중에서도다른계보들보다인본주의자들의계보가더큰도움이될수있으리라는것이다.바로이런연유로나는이책자체를인본주의자들에게헌정하고있다.”(《프롤로그》,9~10쪽)
위《1》에명시된‘헌정’은몽테뉴에서출발하여토크빌에이르는프랑스인본주의를사상사의맥락에서학문적으로‘가장비중있게’다루었다는뜻으로받아들여진다.따라서여기서는인본주의‘계보’라는말이더자연스럽게다가온다.한편위《2》에명시된‘헌정’은인본주의를실천적사상의관점에서‘가장우호적으로’다루겠다는뜻으로받아들여지고,그연장선상에서인본주의라는공감대아래형성된모종의다사로운공동체를떠올리게된다.따라서여기서는인본주의‘가족’이라는말이더자연스럽게다가온다.그런가하면그같은‘헌정’의이면에서인본주의를외면하거나심지어적대시하는사람들을향한저자나름의온기어린초대-내지는절박한호소-가읽히기도한다.즉인류의불행을예방하고개개인의행복을늘려나가는데있어가장시급한과제가사유체계로서인본주의의저변확장이라는인식아래,저자토도로프가이책자체를미래지향적이고다분히전략적인메시지의일환으로삼고있다고여겨지는것이다.
나아가서이책의저변에는저자토도로프의삶자체가고스란히배어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1939년불가리아에서태어나유년기및청년시절에겪었던참혹한사태들,1963년프랑스파리에정착하고나서항시적으로목도하게되는이른바문명세계의또다른갈등과폭력,이같은암울한현실에대한경험론적성찰에비추어볼때정치체제로서의민주주의에사유체계로서의인본주의를조화롭게접목하는것이그나마인류상생의유일한해법이다.그리고그럼으로써공적영역과사적영역간에충돌이생기는계제에서는상대적으로사적영역을우선시할필요가있다.그가아주우호적으로다루고있는뱅자맹콩스탕의주장처럼,적어도우리개개인에게있어서는“한마디의말,한가닥의눈길,한번의악수,이런것들이모든이성,그리고지상의모든권좌보다더소중하기”때문이다.
이런관점에서보자면이책의말미를이루는아래글이한편으로는종교계를향한일종의경구(警句)로읽히고,다른한편으로는인간의‘불완전성’에대한극도의예찬으로받아들여진다.
“신은우리에게아무것도약속해주지않는다.하늘의뜻도마찬가지고자연도마찬가지다.인간의행복은늘유예상태에있다.하지만그런가운데에서도우리가인간의‘불완전한정원’을그어떤다른왕국보다더소중히여길수는있다.그것이차선책이어서가아니라,그것이야말로우리로하여금진정으로살아갈수있게해주기때문이다.”(《에필로그》,396쪽)
개별인간은태생적으로유동적이고시시각각가변적이며선악의양면성을지닌비결정성의불완전한존재이다.그들이구성하는다차원의다양한공동체또한불가항력적으로불완전할수밖에없다.이렇게볼때우리에게가장시급한것은이른바‘신성’과같은완전함의신기루에서벗어나는일이다.이를역설적으로달리말하자면,인간이떠안고있는다각도의불완전성그자체를신성시하는가운데,사유체계와정치체제에있어개별인간의존엄성에부응하는점진적인개선책을부단히모색하는일이가장시급하다.바로이것이종교가본연의순기능을발휘하고그외연을확장할수있는길이기도하다.
어찌보면오늘날의한국사회야말로이책속에서이루어지는치열한논쟁,그리고그에대한저자토도로프의치밀한분석에바짝귀를기울여야할것같다.봉건사회의유산,일제강점기의잔재,동족상잔의전쟁후유증을제대로해소하지못한채,한국사회가짧은시기에국제사회에편입되어무차별적으로세계화의거센물결에휩쓸리고있다는점에서특히그렇다.세계최후의유일한분단국가로서의위험천만한체제갈등,해묵은지역갈등과종교계안팎의미묘한갈등,근래에부쩍가시화되고있는계층갈등과세대갈등,국제결혼및외국노동자유입에따른인종갈등과문화갈등,최근에또다른난제로부상하고있는탈북자들의정체성갈등등,그모든갈등에있어인본주의를근간으로하는모종의점진적인해법이요청되고있는것이다.
저자스스로밝히고있듯이(14쪽)이책(1998년)은그에앞서발표된《우리와타인들》(1989년)의‘후속판’이자‘완결판’이다.그리고《우리와타인들》이통상적인편집기준으로1,000여페이지에달하는심층적전공도서에속한다면,이책은그형식과내용에있어두루고급교양도서의성격을띠고있다.바로이때문에역자또한이책의번역과정에서그에상응하는독자층을염두에두고번역본의가독성및원활한독서리듬을우선시하였다.예를들어각양각색의전문용어및저자특유의유려한문체가가독성을해치거나심지어독자를‘질리게’하는일이없도록나름으로세심한주의를기울였다.
그렇지만이책의번역에있어서도이른바‘불완전한정원’이라는말이한치의오차없이그대로적용될수있을것같다.사실한국어와정반대인프랑스어특유의어순,수많은다의어와유의어,그리고거기에수반되는맥락상의개념차이와미세한뉘앙스에직면하여,번역과정에서수시로한계를절감하며수정보완을거듭하지않을수없었다.따라서원서에담긴박학다식은물론번역을통한소통의한계때문에도,이번역본의독서에상당한인내심과집중력이요구될것으로예상된다.그리고역자가앞으로번역상의이같은‘불완전한정원’을개선해나가는데있어,뜻있는독자들의적극적인충고가매우요긴할것으로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