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최남선의 신화 문화론

근대 최남선의 신화 문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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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시대에 신화는 문화 산업의 가장 큰 도구가 된 듯하지만, 불과 100년 전 신화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다르게 인식되고 있었다. 일제는 근대화의 명목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매도하였고, 우리는 과학의 이름 아래 신화를 배척하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의 쾌유를 위한 엄마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동반되었을 때 의학은 아이를 더 빨리 낫게 한다. 우리에게 신화는 그런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의 핏속에 끓는 무형의 무한한 힘이었다. 그러한 신화의 힘을 망각하도록 조장한 일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참으로 많이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근대 지식인들은 여러 방편으로 일제의 문화전략에 맞섰다. 그 중에서 육당 최남선은 근대 문화 속에서 여러 소재 중 신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요성을 피력했던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후기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 나면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학문적 업적은 눈부실 정도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최남선 초기 활동과 중기 활동에 집중해서 논의할 것이다.
저자

표정옥

저자 표정옥은
- 서강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 일반대학원 국문과 졸업.
-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강대학교 학술연구교수와 서강대 국문과 대우교수 역임
- 현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2008년, 2010년 학술원 우수도서상, 2013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수상, 2014년 한국연구재단 사후 우수저서 선정, 선리 학술상, 김구아카데미 학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다른 곳에서도 여러 논문 및 저서 연구가 선정되었다.

목차

제1부 현대 동아시아 신화적 상상력의 문화적 갈등과 교류
제1장 신화, 역사와 문화 갈등의 현장에 서다
1. 한국 신화에 기술된 동아시아 신화의 갈등
2. 중국의 동북공정과 신화적 갈등들
3.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신화적 갈등

제2장 신화, 역사와 문화지식 교류의 중매자가 되다
1. 한국 신화에 펼쳐진 자주정신
2. 중국 신화 속 불함의 군자국
3. 일본의 천일창 신화와 이즈모 신화 속 한국


제2부 근대 지식인 최남선의 역사적 상상력과 신화 상상력
제3장 ?삼국유사해제?: 신화로 문화적 욕망을 펼치다
1. 400년 만에 다시 되찾아 온 ?삼국유사?
2. 대립적 민족의 의미규정과 문화의식 형성
3. 단군에 대한 기억과 신화화를 통한 문화민족 구축
4. 신화의 정치적 전략과 근대성 추구

제4장 ?심춘순례?: 불교 사찰 기행으로 조선 신화의 흔적을 찾다
1. 기행과 체험을 통한 신화 찾기
2. 불함문화의 체험공간으로서 ?심춘순례? 기행
3. 조선의 신화와 교호하는 ???사상과 사찰기행
4. 조선 불교와 조선 신화의 신화적 상상력의 교감

제5장 바다의 인식: 신화적 미래 기획으로 문화 정체성을 찾다
1. 대륙의 내부 시선에서 해양의 외부 시선으로
2. 지리적 역사관을 통한 문화적 역사관 구축
3. ‘바다’에 대한 기억 재구성으로써 신화성 구축
4. 망각을 깨우는 의지와 도전의 문화사로써 미래기획

제3부 근대 지식인 최남선의 종교 문화와 융합적 신화 상상력
제6장 국토의 융합적 인식: 신화로 근대 심상 공간을 기획하다
1. 지리인식과 역사 인식의 상관성
2. 시간의 경계를 넘는 문화적 국토의 환상성
3. 민족의 신화관과 융합된 국토의식
4. 의지적 신화의 국토인식과 독도에 대한 주장

제7장 근대 인문적 의학담론: 신화 상상력으로
융합적 사고를 기술하다
1. 신화로 바라보는 진화된 문화담론
2. 신념의 신화에 비춘 의학 독창성의 통시적 역사 고찰
3. 창의적 의학 전파 성공담을 통한 자주적 민족의식 고취
4. 조선의 근대 의학에 나타난 융합적 인문정신 고찰

제8장 불교인식: 근대 역동적 문화 지식으로 불교문화를 바라보다
1. 근대불교의 문화적 역동성
2. 민족의식의 대결적 코드로서 불교문화
3. 국토 인식의 상징적 표지로서 불교문화
4. 문화 민족의 견인차로서 불교문화

출판사 서평

[책속으로 추가]
가야사 연구는 정한론, 청ㆍ일전쟁, 강제병합의 과정 속에서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 타율성이라는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이 만들어졌고,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야사가 연구되었다. 이러한 가야사 연구는 한일 양국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의 가야사 연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위한 근거 제시에 불과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이 가야사의 불행이었다. 가야사 연구는 더 이상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사학자들이 내세웠던 ‘일선동조론’이나 북한 사학자가 주장하는 ‘분국론’ 같이 민족적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내셔널리즘이 되어서는 곤란하며 현대적 국가의식의 과잉으로 투영된 고대 한일관계사의 복원도 경계되어야 한다. 호혜평등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구시대의 식민사관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토대로 한 새로운 한국 사상을 수립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한국의 학계에서도 주지해야 하는 것이다.
칠지도에 대한 논쟁 역시 한일 고대사에서 역사적 혹은 신화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어 왔다. 백제는 일본에 많은 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은 백제에서 건너간 칠지도에 대해서 백제가 일본에게 바친 조공물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2012년 전라남도 순천 고분 발굴에서 대가야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일본의 고대 문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칠지도 역시 조공물이 아니라 단순한 선물이라는 게 우리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칠지도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후왕과 성음이 생겨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조공설은 억지스러운 논리로 보이는데도 일본은 백제가 일본에 조공물을 바친 주변국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식민사관을 형성하기 위해 일본이 아전인수로 잘못 끌어들여 해석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킨 일본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부분을 들어 백제가 조공으로 바친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일본서기』의 기록은 정확한 정사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와 유물로 허구임이 밝혀지고 있다.
현재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서 보관 중인데,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앞면에 35자, 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1977년과 1978년에 찍은 확대 근접 사진과 1981년 NHK에서 촬영한 X-레이 사진을 통해 보면 年자와 月자 사이에 十자가 검출되어 그동안 五月(5월)로 보았던 명문을 十一月(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앞과 뒤의 글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百鍊鐵七支刀 [出]百兵 宜 供供侯王□□□□作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칠지도 자료는 1945년 이전의 연구에서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재함으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 신공기 52년 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이나 칠지도보다 가장 큰 현실적인 논란 거리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두 나라의 논쟁이다. 『세종실록』(1454)에 “우산, 무릉 두 섬은 현 정동진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 두 섬은 부속 관계이고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이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을 통해,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무릉)에서 독도가 보이므로, 독도가 우산도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우산국은 512년에 신라에 복속되었으니, 독도는 한국 영토인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울릉도와 독도>와 <독도문제와 나>에서 일본은 독도에 대한 일현의 역사적 기록들을 고증해내면서 프랑스가 리앙쿠르 섬이라고 부를 때까지 독도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그 곳을 어떻게 부르는지조차 몰랐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논의는 뒤의 최남선 국토와 신화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일본서기』에는 신라에 대한 비하 발언이 자주 등장해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논쟁에서 늘 문제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라는 작고 추한 나라라는 논지를 자주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에 신라를 작고 추한 나라라고 일부러 강하게 비난하는 것은 그만큼 신라를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의 반감으로 보여 진다. 신화가 보여주는 일련의 갈등과 대결의 양상을 역으로 보여주는 논리인 셈이다. 신화는 있는 그대로를 적기 보다는 때로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반대로 기입하기도 하고 다소 과장되어 기록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신화는 사실에 기반할 수도 있지만 사실에 대한 반대급부로 대리 욕망을 투사시키기도 한다. 보다 객관적인 국제적 관점으로 과거사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현재의 동아시아의 우호적 질서는 가능할 것이다.

[책 소개]

우리시대에 신화는 문화 산업의 가장 큰 도구가 된 듯하지만, 불과 100년 전 신화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다르게 인식되고 있었다. 일제는 근대화의 명목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매도하였고, 우리는 과학의 이름 아래 신화를 배척하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의 쾌유를 위한 엄마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동반되었을 때 의학은 아이를 더 빨리 낫게 한다. 우리에게 신화는 그런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의 핏속에 끓는 무형의 무한한 힘이었다. 그러한 신화의 힘을 망각하도록 조장한 일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참으로 많이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근대 지식인들은 여러 방편으로 일제의 문화전략에 맞섰다. 그 중에서 육당 최남선은 근대 문화 속에서 여러 소재 중 신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요성을 피력했던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후기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 나면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학문적 업적은 눈부실 정도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최남선 초기 활동과 중기 활동에 집중해서 논의할 것이다. 후기 만주 건국대 시절 이후부터는 이 연구에서는 거론되지 못함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내가 최남선을 만난 것은 오로지 삼국유사 때문이었다. 현대 문학을 전공했던 처지인지라, 신화와 맺은 인연이 다소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시작된 궁금증으로 찾아 간 인간의 문화와 연원에 대한 호기심이 신화를 연구하게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값지게 만난 책이 바로 삼국유사와 관련 문화 유적들이었다. 대학에서 내가 만난 학생들과 열심히 삼국유사를 읽고 현실 문제와 연결해서 난상토론을 펼치고, 외부 일반 시민들과도 다양한 방법으로 삼국유사의 흔적을 찾았고 재구성해 다시 새롭게 읽어 보려고 했다. 이쯤 되면 나는 보각국사 일연 스님에게 칭찬 한마디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연구를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만나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평소에 친일 인사라는 멍에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근대 지식인 육당 최남선이 그 주인공이었다.
근대 최남선의 신화문화론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최남선의 신화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근대에 어떤 신화 갈등과 신화 교류가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필요가 있다. 한, 중, 일 세 나라는 과거 오래전부터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우리의 신화서와 일본의 신화서와 중국의 신화서에서 그려지는 갈등과 교류의 단면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이 신화 연구를 시작한 동기 역시 일본이 주장하는 단군부정론에 기인한다. 단군을 살리기 위해서 최남선은 삼국유사를 소중히 여기고 알리고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부의 내용은 최남선의 본격적인 신화 논의의 서막과 같은 논의들이다. 동아시아 신화의 갈등과 교류를 제대로 들여다보아야만 2부의 신화 논의와 3부의 논의들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1부의 논의는 2015년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동아시아 공존의 신화 전략 연구>에서 기초적인 작업을 이어온 것이다.
2부의 내용은 근대 지식인 최남선이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았던 삼국유사 연구를 시작으로 신화담론을 연구한다. 3부의 내용은 최남선이라는 근대 지식인이 보여주는 융합적인 상상력에 대한 고찰이다. 3부의 내용이 융합적 상상력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다양한 학문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머리말] : 저자서평

신화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근대
우리시대에 신화는 문화 산업의 가장 큰 도구가 된 듯하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 신화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다르게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매도하기에 급급했고, 우리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