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 | 양장본 Hardcover)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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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의 한 귀족부인이 체험한 프랑스혁명, 특히 방데 전쟁에 대한 기억을 회고한 회고록이다. 방데 전쟁으로 지역 주민의 3분의 1인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혁명정부가 수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에 주목해 방데 전쟁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인종학살)가 자행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폭력성’이라는 관점에서 혁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에서는 혁명의 허상이 깨어진다. 방데의 귀족들은 농민들을 착취하는 ‘특권지배계급’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의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은 지휘를 맡아달라는 농민들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지켰지만 목숨은 지키지 않았다.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에서는 이들 귀족들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볼 수 있다. 농민들은 비록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회고록: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에서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방데인 도망자들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저자

마리 루이즈 드 라로슈자클랭

1955년 대전 출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랑쉬콩테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과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날학파』(민음사),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푸른역사),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살림), 『서양사개념어 사전』(살림), 『관용의 역사』(푸른역사), 『오늘의 역사학』(공저. 한겨레신문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프랑스혁명사』(일월서각),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민음사), 『고대도시』(아카넷), 『랑그도크의 농민들』(공역. 한길사),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푸른역사) 등이 있다. 현재 『다시 생각하는 프랑스혁명-혁명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

목차

역자 해제

나의 아이들에게
서문

1. 나의 출생에서 삼신분회까지
2. 삼신분회에서 10월 6일까지
3. 가스코뉴로의 출발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
4. 8월 10일-파리 탈출
5. 보카주에 대한 묘사-주민들의 심성-혁명의 첫 번째 효과-1792년 8월의 봉기-방데 전쟁 이전 시기
6. 전쟁 발발-므? 라로슈자클랭의 출발-우리의 체포
7. 앙주 부대의 철수-므? 라로슈자클랭이 레조비에에서 승리를 거두다-앙주 부대가 손실을 만회하다-브레쉬르 학살-공화파가 도시를 포기하다-므? 라로슈자클랭이 클리송에 도착하다
8. 방데인들이 브레쉬르를 점령하다-왕당파 부대의 구성
9. 투아르, 파르트네, 샤테느레 점령-퐁트네 패배-퐁트네 점령
10. 최고위원회 구성-비이에, 두에, 몽트뢰유의 승리-소뮈르 점령
11. 앙제 점령-낭트 공격-파르트네 철수-물랭 오 셰브르 숲의 전투
12. 샤티옹 재점령-마르티녜와 비이에 전투-므? 델베의 선출-뤼송 공격
13. 므? 탱테니아크의 도착-제2차 뤼송 전투-샹토네 승리
14. 라로슈 데리녜, 마르티녜, 두에, 투아르, 코롱, 볼리외, 토르푸, 몽태귀, 생퓔장 전투-클리송 수송대 공격
15. 물랭 오 셰브르 전투-샤티옹 탈환과 재탈환-라트랑블레 전투와 숄레 전투
16. 루아르강 도하-앵그랑드, 캉데, 샤토 공티에, 라발 통과
17. 라발과 샤토 공티에 사이에서의 전투-마옌, 에르네, 푸제르 길-므? 레스퀴르의 죽음
18. 영국에서 파견된 두 망명자의 도착-퐁토르송과 아브랑슈 경유-그랑빌 공략-아브랑슈, 퐁토르송, 돌을 지나서 돌아감
19. 돌 전투-앙트랭, 푸제르, 라플레슈 경유-앙제 공략
20. 라플레슈로 귀환-르망 패주
21. 루아르강 재도하 시도-사브네 패주-군대의 소멸
22. 브르타뉴인들의 용감한 환대-1793년과 1794년의 겨울
23. 드레뇌프 성 체류
24. 사면-방데인 도망자들에 대한 세부 사실들
25. 전쟁을 계속한 방데인들에 대한 기술-보르도로 돌아감
26. 결혼 이후
27. 1808년에서 1814년까지
28. 3월 12일

보유: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기술

인명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I. 책의 구성

이 책은 프랑스의 한 귀족부인이 직접 체험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회고록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문 역사가가 쓴 프랑스혁명사도 아니며 전문 작가가 쓴 프랑스혁명사 이야기도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체계적인 학술적 분석이나 문학적 기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 특히 저자가 겪은 반혁명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다면, 이 책을 역사적으로 가치 있게 만든 방데 전쟁에 대한 기술이 무의미하고 지루한 전쟁 이야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의 시각에서, 승자가 아니라 패자의 입장에서 혁명을 바라본다면 전에 보이지 않았던 슬프고도 위대한 측면들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의 ‘기억’은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모두 28장과 ‘보유’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저자의 출생에서부터 1789년 5월 5일 삼신분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저자와 저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장은 삼신분회 소집부터 같은 해 10월 6일 파리 민중이 베르사유를 공격하여 왕실과 의회를 파리로 옮겨가는 이야기이다. 당시 저자는 베르사유에 살았으므로 베르사유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제3부는 왕실이 파리로 옮겨간 후 저자의 가족이 프랑스 중서부의 가스코뉴 영지로 내려가서 살던 이야기이다. 저자와 남편 레스퀴르 후작은 망명을 떠나는 길에 파리의 왕궁에 들렀다가 왕비의 권유로 파리에 남아 1792년 6월 20일 파리 민중의 왕궁 공격 사건을 목격한다. 제4장은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왕궁을 공격하여 사실상 왕정을 붕괴시킨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8월 10일 사건은 “제2의 프랑스혁명”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인데, 이 사건에 대한 저자의 기록은 상세하고 생생하여 높은 사료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제5장부터 제21장까지는 이 책의 핵심인 방데 전쟁 체험기이다.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그해 12월 말에 끝난다. 당시 프랑스는 주변국과의 전쟁, 서부의 방데 전쟁, 남부의 대도시들에서 일어난 소위 연방주의 반란으로 그야말로 존망지추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치’라는 방법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방데 전쟁과 연방주의 반란에 대한 진압과 사후처벌은 대단히 잔혹했다. 방데 전쟁으로 전체 주민의 3분의 1인 20만 명의 방데인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혁명정부가 양민 수만 명을 학살한 것에 주목하여 방데 전쟁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인종 학살)가 자행되었다는 주장을 했고 이후 프랑스혁명사에서는 제노사이드 논쟁이 벌어졌다. 학살의 성격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 여부를 떠나 혁명정부가 비무장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혁명 이념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혁명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니만큼 방데 전쟁에서 혁명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자의 기술은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전투 이야기가 산만하고 지루하게 계속되지만 ‘폭력’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면 의미 있는 혁명사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제22장부터 제25장까지는 1793년 12월 말 사브네 전투 패배로 방데 전쟁이 소멸된 후 브르타뉴 지방의 벽촌 농가에 숨어 살다가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끝나 그해 말 사면될 때까지 저자와 저자의 동료들이 겪은 이야기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방데인 도망자들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광신적인 농민들은 광신적인 가톨릭 사제들과 여자들의 사주를 받아 반혁명에 동원되었다는 역사가들의 설명이 농민들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방데 전쟁 도망자들을 보호해준 브르타뉴의 농민들은 비록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였다.

제26장부터 마지막 제28장까지는 저자가 방데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 후작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 후작과 결혼한 이후 남편이 보르도 지방의 왕정복고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한 이야기이다. 『회고록』은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이 국왕 루이 18세를 알현하는 것으로 끝난다. ‘보유’는 저자가 브르타뉴 지방에 숨어 지낼 때 보호해준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이 방데 전쟁 이후 전개되는 슈앙 반혁명운동에 가담하여 싸운 이야기이다.

제1장부터 제3장까지와 제26장부터 제28장까지는 다소 산만하고 지엽적인 이야기이니 독자들은 제4장부터 제25장까지의 방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읽는 것이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혁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II. 저자의 생애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Marie Louise Victoire de Donnissan)은 1772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나 1857년 사망했다. 그녀는 고위 궁정귀족인 기 조제프 드 도니상 후작과 마리 프랑수아즈 드 뒤르포르 드 시브라크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며, 화려한 궁정생활을 누리며 자랐다. 루이 16세의 고모인 마담 빅투아르와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왕정복고 후의 루이 18세)이 그녀의 대모와 대부를 섰다. 마담 빅투아르는 왕궁에서 저녁을 마치면 저자의 외할머니 집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왕실과 밀착되어 있었다. 1791년 그녀는 이종사촌인 루이 마리 드 레스퀴르 후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삶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래 레스퀴르 후작도 다른 대부분의 귀족처럼 망명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과 왕비의 권유로 파리에 남았고,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이 왕궁을 공격하여 왕권을 정지시키는 엄청난 사건을 체험했다. 그들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파리 민중에게 붙잡혀 학살당할 위험을 간신히 넘기고 고향인 푸아티에로 낙향하여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93년 3월 방데 지방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레스퀴르 후작이 농민군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그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근왕군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하여 혁명 파리를 위협할 정도였으나 그해 10월의 숄레 전투에서 패한 후 루아르강을 건너 브르타뉴 지방을 유랑하다가 1793년 12월 말 사브네 전투에서 패한 후 사실상 소멸된다.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브르타뉴 지방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숨어 지냈다. 농민들은 목숨 걸고 방데 전쟁 도망자들을 보호해주었다. 1년간의 도피 생활은 혹독한 빈곤과 고통과 불안의 시간이었으나, 동시에 브르타뉴 농민들의 소박한 삶과 용기와 인간미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아홉 달간의 전쟁에서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어린 딸을 잃었으며, 도피 중에 태어난 두 딸 역시 도피 중에 세상을 떠났다.

1794년 말 단행된 사면으로 레스퀴르 후작부인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1802년에 레스퀴르 후작의 사촌이며 방데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과 재혼하여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이 되었다. 루이는 방데 전쟁 중에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정복고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814년 왕정복고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15년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에 맞서 방데 봉기를 주도하다가 사망했다. 저자의 둘째 아들인 루이 앙리는 1830년 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샤를 10세의 며느리인 베리 공작부인이 주도한 방데 봉기에 가담했으며 1833년에 리스본 전투에서 사망했다.

1832년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방데 지방 지역인 푸아투를 떠나 두 딸이 사는 오를레앙으로 올라왔다. 마침 오를레앙에서는 방데 봉기에 가담했던 왕당파 피의자들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집필을 도와준 유력 정치가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1782~1866) 같은 인사들에게 청원하여 그들이 무죄 방면되도록 돕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데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농민들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1857년 2월 15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귀족은 두셋에 불과했고 나머지 200~300명은 빈민이었다. 당국은 장례식이 정치집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장례식은 후작부인의 관대하고 고결한 덕성을 기리는 종교적인 집회가 되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한 푸아티에의 주교는 그녀가 자선사업에 헌신했음을 찬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방데 전쟁의 지도자들은 신(神)이었다”는 정치적인 발언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첫 남편인 레스퀴르 후작은 ‘푸아투의 성인’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방데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방데 전쟁의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도 놀라운 종교적인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회고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방데 전쟁은 가톨릭을 파괴한 프랑스혁명이라는 대체종교에 맞선 ‘성전’의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다.

III. 『회고록』 출판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1794년 말에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혁명력 5년 수확월 18일(1797년 9월 4일)의 위기가 발생하면서 후작부인의 삶에 파란이 일어났다. 후작부인은 혁명기에 망명을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망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안에 있다가 발각되면 망명자로 취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후작부인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8개월 후에 망명을 떠나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