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는 지금 문화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문화위기가 바로 삶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문화위기는 여전하다. 위기의 내용과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문화위기의 끝없는 중병을 앓고 있다. 과거의 문화위기가 근대모던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적-정신적-도덕적 위기였다면, 지금의 문화위기는 포스트모던과 함께 찾아온 복잡하고 다양한 차원의 융복합적 위기이다. 이에 사이버문화의 위기까지 부가되면서 위기의 범위와 차원은 실로 상상을 초월할만한 수준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문화위기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가 삶의 위기를 감지하는 순간 누구나 문화위기를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위기cultural crisis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학문과 연구의 대상으로 된 것은 “문화연구culture studies”라는 개념이 세간에 등장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연구”의 학문적 성립은 1964년 호가트Richard Hoggart(1919- 2014)에 의해 설립되고 나중에 홀Stuart Hall(1932-2014)에 의해 운영된 [버밍험 현대문화센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문화위기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연구는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무엇보다도 문화의 본질, 정체성, 특성 등에 대하여 연구한 소위 “문화과학science of culture” 내지 “문화이론culture theory, culturology”의 아버지로 불리는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1831- 1917)를 위시해서 보아스Franz Boas(1858-1942),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Kasper Malinowsky(1884-1942), 레드크리프-브라운Alfred Reginald Radcliffe-Brown(1881- 1955) 등 소위 초기 구조주의 문화연구자들의 공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들이 시작한 문화이론은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훗날 문화비판, 문화연구의 초석이 될 수 있었다.
“문화이론은 스스로 제약을 받는다. 문화이론은 중층적 기술이 제공하는 직접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자체의 내부논리로서 이론화될 수 있는 자유는 다소 제한적이다. 문화이론이 이룩하려는 일반성은 미묘한 차별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추상화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클리퍼드 기어츠, 1973/ 문옥표 옮김, 2009: 40)
한편, 최근까지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문화연구culture studies”는 주로 ‘문화비판culture critics’에 편중되어 왔다. 한마디로 “비판이론으로서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as critical theory”(Ben Agger, 1992)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판연구의 대명사격인 마르크스주의가 득세하면서 문화비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비판”의 맥락에서 이루어져 왔다. 물론 문화위기에 대한 문화비판은 소위 ‘사회비판’과 맥을 달리할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문화비판은 한편으로는 문화에 대한 연구를 비판적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열어 주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은 문화위기에 대한 비판이 “문화 자체에 대한 명암”을 조명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 이후의 문화론들에 자리를 내주고 비판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기계적인 도식을 견지했다는 점이다.... 토대/상부 구조라는 도식으로 상부 구조에 해당하는 문화가 토대의 반영물로 나타난다는 단순화를 범한 것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둘째, 그 기계적인 도식을 따르다 보니 자연히 마르크스주의에서 알파요 오메가인 것처럼 여겨지던 경제적 구조만 각광을 받게 되었고, 문화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셋째, 문화를 단순히 (사회) 계급의 수단으로만 간주했다는 점이다. 지배 계급은 지배 수단으로 피지배 계급은 저항과 혁명의 수단으로 문화를 이용하거나 이용할 수 있다고 밝힌다.”(원용진, 1996: 105-106)
결국 사회비판과 문화비판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사회비판과 문화비판은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회(또는 사회구조)와 문화는 빛과 그림자와 같이 상호불가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있는 한 문화가 존재하며, 문화가 있는 한 사회가 발생한다. 물론 사회는 있지만 문화가 소멸된 경우도 있으며, 문화는 남아 있지만 사회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역사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규명해 내고 있다.
“문화와 사회 구조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와 사회 구조를 명확히 구별해야 하고, 그런 다음 종래의 이론들이 이 둘의 관계를 결합시켜 왔던 다양한 방법들을 기술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 개념에 포함된 그 어떤 것도 분명하게 재단할 수는 없다. 요컨대 문화/문명을 서로 바꿔 사용하는 여러 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사회/사회구조도 반드시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대체해서 사용되기도 한다.”(크리스 젠크스, 1993/ 김윤용 옮김, 1996: 44)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회’라는 개념과 ‘문화’라는 개념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마르크스 식의 사회비판의 논리를 가지고 일상적인 ‘문화비판’의 영역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지나친 무리다. 물론 마르크스가 사회와 문화를 구별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문화는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된다(크리스 젠크스, 1993/ 김윤용 옮김, 1996: 101). 따라서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적 토대에 근거하는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사회와 문화의 관계는 거의 동일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 자체는 그 사회의 특정한 이해관계의 집합과 연관된 복잡한 것이다.”(크리스 젠크스, 1993/ 김윤용 옮김, 1996: 48) 즉, 마르크스에게서 문화는 사회 구조의 연장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문화를 보는 관점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 “유물론적 문화론”(크리스 젠크스, 1993/ 김윤용 옮김, 1996: 94)으로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문화유물론의 전통 내부의 여러 기능들에 봉사해 왔다.”(크리스 젠크스, 1993/ 김윤용 옮김, 1996: 101).
이데올로기Ideology란 말 그대로 이데아Idea, 즉 이념理念과 논리logy의 합성어로서 ‘이념의 논리’를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데올로기란 개인에게나 사회에 있어서나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즉, 개인들도 자신만의 이념 논리를 가질 수 있으며, 국가 사회도 저마다의 이념 논리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이념 논리가 개인들 간에 다를 수 있으며 국가 사회 역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일상 속에서 부단한 실천과 사회와의 관계를 통하여 사고하고 행위하고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재구성되는 동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삶은 엄청난 혼란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삶은 갈등과 모순으로 인하여 개인적-심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긴장을 야기하게 되어 마침내 삶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결국 삶의 질서를 규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삶을 위한 요청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이는 다분히 사회정치적이고 사회심리적인 차원 또는 사회과학적 차원이다.
“한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문화적 정향定向도, 또는 가장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지향도 모두 정치과정에 타당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에 충분치 못할 때 이데올로기는 사회정치적 의미와 태도의 원천으로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기 시작한다.”(클리퍼드 기어츠, 1973/ 문옥표 옮김, 2009: 261)
사회과학자인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사회심리적 차원 그리고 이를 넘어서 문화적 차원의 긴장을 포함한다.
“이데올로기적 활동이 가장 직접적 계기가 되는 것은 일종의 방향감각의 상실, 즉 자신들이 그 안에 놓여 있는 공공적 권리와 의무의 세계가 이용 가능한 모델의 결여로 인해서 이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분화된 정체 (또는 그러한 정체 속에서 내부적 분화의 지속)의 발달은 심각한 사회적 분열과 심리적 긴장을 야기시킬 수도 있으며 흔히 그렇게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은 정치질서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가 부적절해져 버리거나 평판이 나빠질 때의 개념적 혼란이다. 프랑스 혁명이 ‘진보’ 건 ‘반동’이건 간에 적어도 그 당시까지의 인류사에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최고 양성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당시에 개인의 불안이나 사회적 불균형이 더 깊었으며 또한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 충분히 깊었고 만연되어 있기는 했지만 - 왕권신수설 같은 정치생활의 핵심적인 조직원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심리적 긴장과 이 긴장을 이해할만한 문화적 자원의 결여가 합류되어 서로를 약화시킬 때 체계적(정치적, 도덕적 또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의 등장무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분명히 이데올로기는 문제있는 사회현실이 보여지는 지도이며, 집합의식의 창출을 위한 모체이다.”(클리퍼드 기어츠, 1973/ 문옥표 옮김, 2009: 261-262)
결국 마르크스에게서 ‘문화비판’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문화를 정당화하고 변명해주는 차원이기 때문이다(클리퍼드 기어츠, 1973/ 문옥표 옮김, 2009: 274).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모순적 사회 내재 사회 구조(생산관계, 생산양식의 소유)에서 발생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각 단계가 특정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으로 규정된다고 보았다. 사회가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