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알기 쉽고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알기 쉽고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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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는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우리 외교에 대하여 강의하고 있는 양봉렬 초빙교수가 준비된 외교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 비전과 업적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외교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외교역량을 키울 수 있는지 등 우리가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를 외교 사례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 외교 교양서적이다.
저자

양봉렬

저자 양봉렬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만학으로 2016년 2월 광주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지역 경제통합에 관한 연구」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8년 제12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외교부에 입부하여 33년 동안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2000년 6월에 개최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선발대의 일원으로 약 2주 동안 평양에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2005년 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되어 비서관으로 일했다. 2007년 9월부터 3년간 주 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하였다. 2010년 10월부터 외교부 본부에서 아세안 대사로 활동한 후 2011년 6월에 퇴임하고, 같은 해 7월부터 3년간 광주과학기술원 대외부총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 9월부터 현재까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한국 외교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공저로 『중국의 부상과 동남아의 대응』(2011년, 동북아역사재단), 『대사들, 아시아 전략을 말하다』(2013년, (주) 늘품플러스)가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 4
Part 01 분단된 한반도와 외교적 사고력 / 13
Part 02 우리에게 외교가 왜 중요한가? / 53
Part 03 한반도와 주변 4대 강대국 / 121
Part 04 동아시아 공동체는 우리의 미래 / 191
Part 05 지피지기하는 국민, 백전백승하는 외교 / 221
부록 외교관련 기고문, 강연 원고 모음 / 235
참고문헌 / 364

출판사 서평

21세기는 국민외교의 시대이다. 사드배치문제, 위안부 문제 등 민감한 외교 문제에 대하여 국민들이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있는 최근의 사례에서 보듯이 외교가 국민들의 요구에 좌우되고 있다. 국민외교의 시대에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개개인의 외교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본서는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우리 외교에 대하여 강의하고 있는 양봉렬 초빙교수가 준비된 외교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 비전과 업적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외교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외교역량을 키울 수 있는지 등 우리가 알고 싶은 외교 이야기를 외교 사례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 외교 교양서적이다. 본서가 우리의 외교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

Part 01 분단된 한반도와 외교적 사고력

1. 평양에서 목격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며
2000년 5월 31일 오전 10시, 나는 역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사전 선발대 30명의 일원으로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 2주 전이었다. 난생 처음 북한을 방문하는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사명감이 교차되어 긴장되었다. 선발대 모두가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외교부에서 청와대 의전비서실로 파견되어 대통령의 국빈 행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국빈 행사란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거나 또는 외국의 정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경우 정상회담 등 제반 일정을 계획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을 말한다.
나의 업무 중 하나는 대통령의 해외 방문 일정이 확정되면 대상 국가에 미리 가서 대통령 방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의전 관련 사항을 사전에 조율하고 협의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선발대로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행은 긴장된 가운데 판문점 지역 내 북한 측 통일각에서 30분 정도 머무른 다음, 북한 측이 제공한 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북한은 우리 일행을 위해 구형 벤츠 4대와 15인승 마이크로버스 2대를 준비해 주었다. 주홍색, 연두색 등 특이한 색깔의 벤츠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168km에 이르는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약 3시간 후인 오후 1시 30분경에 숙소인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30분 정도 쉬었으니 2시간 30분쯤 차를 탄 셈이었다. 평양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 있었다.
우리가 달린 고속도로 상태는 말끔하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손질을 해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본 차량은 겨우 두세 대에 불과했다.
가는 길에 산악지대가 많아 자주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세어 본 바로는 일행이 통과한 터널이 18개였다. 군데군데 남쪽을 향해 위장된 군 포병기지가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출발 후 꽤 지나서야 모내기가 한창인 논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중간 지점인 서흥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서흥 휴게소는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에 세워진 유일한 휴게소이다. 이 휴게소는 도로 양 방향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 위를 가로질러 건축되어 있었다. 서흥 휴게소 안에는 실내 기념품 판매점도 보였지만 이날은 간이 판매대가 야외에 설치되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 여성들이 술, 인삼, 차, 건조식품 등을 팔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지나갈 것을 알고 임시 판매대를 준비한 듯했다. 북한 여성 판매원들은 우리를 친절히 맞아 주었으나 입담이 과한편이였다. 기회만 있으면 “위대한 장군님이…”로 시작하여 청산유수로 말하는 통에 나중에는 아예 피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업무 협의차 서울로 나왔다가 6월 8일 판문점을 통해 다시 평양으로 들어갔다. 오후 늦은 시간 어느 지역을 지나는데 멀리 한 마을이 보였다. 일렬로 사람들이 늘어서 있어서 호기심에 자세히 보니 마을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담아 옆 사람에게 차례차례 건네주고 있었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논과 밭에 그런 식으로 물을 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문득 내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마을 풍경이 떠올랐다. 가뭄이 들어 논과 밭에 물이 부족할 때면 동네 어른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마을 우물에서 물을 채운 물동이를 차례로 옆 사람에게 옮겨 물을 대곤 했었다. 북한은 우리의 바로 그 60년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로 주변에 보이는 개성의 주택들은 몹시 낡아 보이는 아파트였다. 시골에는 소위 ‘하모니카집’이라 불리는 2~3층의 다세대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주택은 페인트칠도 안 돼 있어 몹시 초라해 보였다. 산에도 잡초만 무성할 뿐 나무를 보긴 어려웠다. 그나마 있는 나무들도 어린 묘목들뿐이어서 그간 땔감으로 베고 새로 심은 것임을 짐작케 했다.
평양에 들어가는 입구는 ‘통일대로’라 불렸다. 대로 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마치 서울의 아파트 숲을 연상시켰다. 후에 들으니 전기가 부족하여 그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 다니고 물도 아래에서 길러다 먹는다고 했다. 그야말로 이름만 아파트일 뿐 주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싶었다.
우리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낡은 군함 앞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1968년 1월 동해에서 납치된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라고 소개했다. 동해에서 납치된 군함이 평양의 대동강에 있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2년 전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원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북한이 상투적으로 주장하는 ‘미 제국주의’에 승리한 상징물로 학생, 주민 등의 교육을 위해 평양 한복판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평양 시내의 도로는 넓었으나 차량은 드문드문 지나갔다. 대동강 지류에 자리한 공원에는 한낮에도 딱히 할 일이 없어 뵈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업자가 없다는 북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 시내 곳곳에는 수신호로 교통을 정리하는 여성 교통안내원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신기했다. 동서남북으로 연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마치 기계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저녁이 되자 평양 시내는 출퇴근하는 시민과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전동차 등 차량 통행도 낮 시간대에 비해 많아졌다.

파격적인 정상회담
백화원 초대소는 평양 시내 북동쪽 교외에 있었다. 2개 동에 90여 개 객실을 갖춘 대형 영빈관이었다. 백화원으로 가는 길에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 주석궁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화원 초대소는 북경의 영빈관인 조어대를 모델로 지었다고 한다. 숲속 큰 연못에는 잉어 등 큰 물고기가 많았고 주변 산책로는 조용하고 녹음이 짙었다. 우리들은 행사를 준비하면서 도청을 걱정하여 중요한 대화를 할 때면 연못 주위를 걷곤 했다. 도청도 방지하고 산책도 하고 일석이조였다.
평양에 체류한 2주 동안 행사가 개최되는 지역을 답사하는 일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백화원에서 보내야 했다. 북한 측은 매일 하루 세 번 메뉴를 바꾸어 가며 우리를 정성껏 대접했다. 식사 때마다 음식 메뉴판이 함께 나왔는데 대부분 낯선 북한말로 적혀 있어 무슨 종류의 음식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명 음식으로는 ‘케피르’가 유일했는데 일종의 요구르트였다.
음식들은 대체로 담백했다. 요즘 유행하는 웰빙식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2~3가지 전채에 밥, 국, 된장찌개 등 주요리가 넉넉히 나왔다. 점심과 저녁에는 식사와 함께 술이 빠지지 않았다. 맥주, 들쭉술에다가 30도 이상의 독한 전통주인 감로주, 황구렁이술, 소주 등을 식탁 위에 준비해 놓아 북한의 다양한 술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외식도 여러 차례 하였다. 하루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물냉면을 먹었다. 졸깃한 면발과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보통 크기보다 작은 그릇에 나와 양은 적은 편이었다. 우리 일행 대부분이 한 번에 두세 그릇씩 비웠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다섯 그릇을 먹기도 했다. 그만큼 맛이 좋았다.
북측은 우리를 정성껏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정상회담 준비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하는 행사는 경호 문제라며 세부 일정 일체를 비밀에 붙였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지, 언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을 갖는지, 김대중 대통령이 주최하는 답례 만찬에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하는지 등 모든 일정은 행사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지만 북측의 의전은 일반적인 국제관례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북측은 처음부터 “국제관례에 따르지 말고 우리 식으로 하자. 자주적인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자.”라고 말해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한 컷의 사진으로 유명한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 주최 오찬. 이 행사는 하루 전날, 그것도 저녁 늦게 결정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6.15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직후 김정일 위원장이 즉석에서 우리 대통령을 오찬에 초대한 것이다. 일반 정상회담에서는 볼 수 없는 파격이었다.
오찬 준비를 위해 북측 인사들과 밤을 새웠다. 평소 우리가 연락하기 전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던 북측 인사들이 부리나케 우리를 찾기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찬에는 양측 인사 70여 명이 참석했다. 남북한 핵심 수뇌부가 모두 모인 그 자리는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특히 북측의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군 최고 인사들과 대남 관계를 총괄하던 김용순 비서, 김정일 위원장의 매부 장성택, 1994년 북핵 문제 대미 협상 수석대표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 등이 눈에 띄었다.
이날 오찬은 그야말로 산해진미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