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문학과 표절사태 ((신경숙)표절사태에서 본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 문학과 표절사태 ((신경숙)표절사태에서 본 미시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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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三島由紀夫 문학과 표절사태』는 일본어나 일본역사, 일본과 대한민국사이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 일본의 대표적 우익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면면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작가로서의 미시마의 작품은 다종다양(多種多量)하고, 어느 작품이나 미적이고 우아하고 지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미시마의 많은 작품 중 특히 중요한 소설, 『潮騷』, 『金閣寺』, 『憂國』의 세 작품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그의 작품세계의 진수 및 특질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저자

고영자

저자 고영자는
(전 전남대학교 교수, 전남대역사문화연구센터겸임연구원, 평론가)
서울특별시 출생
경기여자 중ㆍ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학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과 졸업(석사)
實踐대학 대학원 문학부 박사과정 수료
경희대학교 대학원 일본학과 졸업(박사)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정교수)
千葉대학(객원교수)

논문
총 60여 편.

저서
『일본의 중세 무가(武家)시대』, 『일본의 근세 봉건시대』, 『오에 겐자부로』, 『문장강좌』, 『일본사회ㆍ일본역사』, 『일본의 지성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또 하나의 일본』, 『20세기 일본문학태동기』, 『일본문학』, 『일본의 두 얼굴』, 『일본의 근세 장군시대』, 『바로잡는 국문학』,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일본의 미카도이즘 대두와 일제강점기』, 『이육사론』, 『비평, 테마인가 테크닉인가』, 『현진건론』, 『일본의 파시즘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기』, 『일본의 항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6ㆍ25전쟁 뒤에 일본 있다』, 『6ㆍ25전쟁과 일본의 한반도 전략』, 『복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소설 『레 미제라블』이 답이다』, 『남북한통일은 독일통일과 다르다』Ⅰ과 Ⅱ, 『자유민주주의 논란과 일본의 국가주의』 등등

목차

저자의 말 / 5
일러두기 / 7

1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문학의 특색 / 15
Ⅰ. 명문가ㆍ관료계 가문 출신의 미시마 / 17
Ⅱ. 질서 정연한 작풍 / 40
Ⅲ. 미시마의 고대그리스 체험 / 45
Ⅳ. 『葉隱入門』 / 54
Ⅴ. 미시마와 2ㆍ26사건 / 60

2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세계 / 81
1장. 『潮騷』 / 83
2장. 『金閣寺』 / 94
3장. 『憂國』 / 113
4장. 미시마의 「문화방위론」 / 219
5장. 표절사태 / 263
6장. 끝맺음 / 289

출판사 서평

본서는 일본어나 일본역사, 일본과 대한민국사이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 일본의 대표적 우익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면면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작가로서의 미시마의 작품은 다종다양(多種多量)하고, 어느 작품이나 미적이고 우아하고 지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미시마의 많은 작품 중 특히 중요한 소설, 『潮騷』, 『金閣寺』, 『憂國』의 세 작품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그의 작품세계의 진수 및 특질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일련의 작품들은 (일본) 문학작품과 (일본) 예술이 (일본) 정치와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엿보게 해주고, 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애착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015년 ‘베껴도 하필이면 그 작가(미시마 유키오)인가’ 라는 논란을 일으킨 우리나라 작가 신경숙으로 인해 미시마 유키오는 오늘의 시점에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게 한다.

머리말

‘작품에 문자로 쓰여진 내용(텍스트)’과 그 저자인 작가의 인생사나 시대적 사건 등 ‘작품 외적 요소들’ 사이의 상관관계 여부는 비평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지만, 결코 의견의 일치에 도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작품에 쓰여진 내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작가의 의사가 표현되므로, 작품을 이해하는데 작품외적인 요소를 고려할 필요 없고, 작품과 작품외적인 요소들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도 없어 양자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작품의 모태로서의 작가와 그 작가를 탄생시킨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항상 평행선을 달려왔다.
완전한 또는 완벽한 텍스트는 존재하는가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텍스트의 의미가 완전하게 또는 완벽하게 독자에게 전달되는가는 문자로 된 언어의 표현성 및 전달상의 완벽성 논의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된 텍스트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완벽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 전달도 완벽하다고 하기 어렵다. 더구나,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 표현, 함축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 비유 등 각종 수사적, 문학적 기교가 텍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 텍스트의 완벽한 의미전달은 불안정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불완전성을 최대한 극복하기 위하여 텍스트 외적인 요소, 즉, 작가의 인생관이나 시대적 배경 등 작품외적인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역사주의적 비평의 관점일 것이다. 각종 수사적, 문학적 기교를 즐겨 사용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최대한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외적인 요소들을 더욱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본서는 일본어나 일본역사, 일본과 대한민국사이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 일본의 대표적 우익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면면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로서의 미시마의 작품은 다종다양(多種多量)하고, 어느 작품이나 미적이고 우아하고 지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미시마의 많은 작품 중 특히 중요한 소설, 『潮騷』, 『金閣寺』, 『憂國』의 세 작품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그의 작품세계의 진수 및 특질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일련의 작품들은 (일본) 문학작품과 (일본) 예술이 (일본) 정치와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엿보게 해주고, 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애착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015년 ‘베껴도 하필이면 그 작가(미시마 유키오)인가’ 라는 논란을 일으킨 우리나라 작가 신경숙으로 인해 미시마 유키오는 오늘의 시점에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게 한다.

2016년 겨울
저자, 경당 고영자

[책속으로 추가]
미시마는 13세 때 최초의 소설 『산모(酸模)』를 발표하고 그 시절부터 몇 개인가의 소품을 썼다. 미시마는 만으로 겨우 16살 때 『꽃 만발한 숲(花ざかりの森)』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때부터, 三島由起夫라는 필명을 썼다. 川端康成(카와바타 야스나리, 1899-1972)의 영향을 받으면서 소설가로서 시작하였다.
그의 필명 「三島」는 「일본」이라는 의미가 있고 「由紀夫」는 「간다(行く)」라는 동사와 「由紀(유키)」는 「雪(유키)」명사를 연상시킨다.
21살(1946년) 때 『중세(中世)』를 발표하였다. 그후 창간된 잡지 <인간(人間)>에 川端康成의 추천으로 『煙草』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川端康成은 노벨문학상을 수상(1968년)한 작가다. 1949년 『가면의 고백(假面の告白)』을 발표하여 결정적으로 문학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 소설은 사소설적인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예리한 지성(知性)으로 허구(虛構)로서의 청춘의 내면을 투명하게 투시한 소설이다.
미시마는 자신의 이전의 작품들, 즉 『금색(禁色)』 1951년), 『침몰하는 폭포(沈める?)』(1955년), 『미덕의 흔들림(美德のよろめき』(1957년)같은 작품의 주인공들은 정신성(精神性)이 전무한 조각적인 미(美)청년으로 그려져 있다고 자평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에 대하여 미시마는 『憂國』(1961년)의 ‘타케야마 중위, 『검(劍)』(1963년)의 코쿠부 지로 같은 인물 등 - 그가 즐겨 표현한 영웅들에 대하여 그들 인물 등은 아름다운 육체에 일본의 혼(魂)을 담고 있다’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미시마가 즐겨 표현하는 작품 속의 인물들은 지성적인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미시마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일본적인 정신성, 신념을 소유하였지만 결코 지성적이지 않은 청춘의 모습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속 심화시켜 나갔다.

미시마의 1960년대

1960년대는 일본역사상 안보투쟁의 해로 기억되고 있는데 미시마는 이 시기에 특히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표한 『憂國』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61년에는 『10일의 국화(十日の菊花)』를 발표하여 일본문화에 대한 자신의 위기감을 표하기도 하였다. 1967년 『엽은입문(葉隱入門)』을 발표하고 자위대에 들어가 체험입대도 하였다. 다시금 1968년 『문화방위론(文化防衛論)』을 발간하였는데 이때는 그의 생애의 비극적인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 때다. 『문화방위론』은 결국 「일본문화란 무엇인가」를 근본문제로 다루고 있다. 즉, 미시마의 「문화방위론」은 일본문화의 「전체성(全體性)」을 명확하게 논증하고자 했다.
「楯의 회(楯の會)」가 조성된 것은 『문화방위론』이 출현한 해의 일이다. 미시마는 1969년 동대전공투(東大全共鬪)와 대화를 나누고 『봄의 눈(春の雪)』을 간행하였다. 『봄의 눈』은 『풍요로운 바다(豊饒の海)』의 4부작의 하나인데 이 4부작은 미시마의 최후의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다. 4부작은 『봄의 눈(春の雪)』 『분마(奔馬)』 『여명의 절(?の寺)』 『천인五쇠(天人五衰)』으로 구성되어 있다. 4부작은 일종의 대하소설(大河小說)인데 4부작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에서뿐만 아니라 미시마 소설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강렬한 도전이 들어나는 작품이다. 일종의 일본의 현대사를 소설화한 것으로까지 보인다. 확실히 『풍요로운 바다(豊饒の海)』는 러일전쟁 후의 일본의 근대기말이라고 하는, 일본의 현대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점부터 그려내기 시작하여 1932년부터 태평양전쟁의 시기, 다시금 자신의 집필기까지의 현재를 그려내고자 하였다. 소설 속에서 부(副)주인공이면서 관찰자 역할을 하는 관찰자, 기록자역인 本多繁邦은 작품에서 18세의 청년으로 등장하여 마침내는 80세의 노령의 인물로서 마지막 장면에도 나타난다.

미시마의 문학과 인생은 「사람은 예술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가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의 신념으로 일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앞날은 「태어나면서부터 묘지로 갈 때까지 그 자신이 스스로 사전(事前)에 만드는 것이다」라는 신념하에 있었다. 그는 되는 대로의 「된다」라는 말보다는 의지적으로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였다. 그는 「완벽한 예술가」로서 자신을 완성시키려 하였다.
일본의 근대예술가들은 거의 파란만장한 인생들을 살았다. 마치 「사실(事實)은 소설보다도 별나다」와 같았다. 그들의 인생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었다. 본인들이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도 아닌데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어처구니 없는 의외의 반전이 생긴다.
문학가들에게는 개성적인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인생사는 그 어느 것이나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도 미시마의 인생은 대단히 이색적인 것으로 보인다.

히로히토 일왕기(日王期)의 중대사건
- 미시마의 할복자살사건

히로히토일왕기는 일본의 격동기였다.
히로히토 일왕기는 일본이 침략전쟁의 길로 폭주하다가 결국 전쟁에서 연합국에게 패전하고, 그러나 의외에도 패전에서의 폐허에서 일본건국이래의 고도성장기를 맞이하여 세계 제2의 대국으로 일어선 기간이다. 그 60여년에 이르는 역사 속에는 크나큰 사건들이 있었다. 일본의 정당정치의 종언을 고한 5ㆍ15사건, 고도성장기에 일어난 永山則夫ㆍ연쇄사살사건 - 집단취직으로 상경한 소년들이 연속적으로 일으킨 피스톨사살사건, 일본정치의 암부(暗部)를 드러낸 록히드사건, 2ㆍ26사건, 주목되는 미시마의 할복자살사건 등이다.
미시마의 할복사건은 히로히토 일왕기의 중대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우익이 어떠한 것인가, 특히 히로히토 일왕기의 우익의 실체를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예에 속한다고 필자는 본다.
미시마의 연보를 보면 1925년에 태어나서 1945년 20세 때 일본의 태평양전쟁에서의 항복을 경험하고 1970년 45세 때 스스로 할복자살하였다. 미시마는 히로히토(裕仁)가 일왕으로 즉위하는 해에 태어나서 일본이 패전하는 해에 그의 나이는 만 20살이었다. 히로히토의 왕위 45년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