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꿈꾼 나라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

$25.00
Description
근대 절세미인 명성황후 얼굴 찾다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힘이 있다면!”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과의 대화 중 했던 말이다. 우리 근세사에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끊임없는 폄훼(貶毁) 대상이 되었지만 이런 평가를 뒤집는 평전(評傳)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가 도서출판 한글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듭해 온 명성황후 원본 사진과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 처음 공개되었다. 여러 사진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대비(對比)하여 분석하고,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까지 추론하여 명성황후 어모(御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저자

박광민

저자:박광민

목차

역사앞에옷깃을여미며3
화보9

Ⅰ.그리운고향에서린자취13
생가生家초당草堂에서만난그리움13
사찰입구에서마주친역사23
그리운아버지,무너진하늘37

Ⅱ.감고당에배인낭랑한그리움49
효도와우애의훈당訓堂49
감고당의기구한유전流轉64

Ⅲ.흥선군의기계웅략奇計雄略74
빈한貧寒한왕족흥선군興宣君의눈물과원지遠志74
고종의친정親政과경복궁중건重建84
왕비의길93

Ⅳ.척화斥和와개혁사이에서113
강화도를침략한서양인의오만과당당한조선의대응113
감내堪耐할수없는연이은참척慘慽127
죽동궁폭사爆死의진실153
고종과명성황후의개혁의지170

Ⅴ.삶과죽음을넘나들며209
왕세자의두창痘瘡(천연두)과회복209
완화군죽음의진실과입방아꾼들217
임오유월일기-삶과죽음을넘나들며224

Ⅵ.명성황후의얼굴을찾아서250
예지叡智로운언행에대한기록들250
명성황후의어모御貌와사진논쟁255
처음공개되는원본명성황후사진263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275
명성황후가꿈꾼나라286
Ⅶ.격변의시대비겁한군상群像들296
대일조사시찰단과태극기사용날짜296
김옥균의재지才智와기질氣質304
Ⅷ.냉혹한국제질서와시대의격랑312
지방관의탐욕이부른동학의불길312
조선독립을빌미로내세운일본의출병329
와각지쟁蝸角之爭속몰려오는먹구름337
Ⅸ.곤녕합坤寧閤에흩날린붉은꽃잎346
이토히로부미와미우라고로의음모346
죽음의순간에도의연毅然했던대조선大朝鮮의왕후364
성공회聖公會주교主敎서신과윤치호일기369
침전寢殿옆옥곤루명칭의유래381
죽음후에도신하에게짓밟히신왕후385
왕후王后에서황후로392
고영근高永根의복수와의거義擧395
전쟁없이양여讓與당한오백년왕조의종언終焉415
참고문헌432
부록435

출판사 서평

명성황후가언더우드부인과의대화중했던말이다.우리근세사에서명성황후는나라를망친여인으로끊임없는폄훼(貶毁)대상이되었지만이런평가를뒤집는평전(評傳)「명성황후가꿈꾼나라」가도서출판한글에서간행되었다.
이책에는그동안많은논란을거듭해온명성황후원본사진과‘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처음공개되었다.여러사진과기록들을하나하나치밀하게대비(對比)하여분석하고,사진을찍은시기와장소까지추론하여명성황후어모(御貌)에대한결론을도출하였다.

이책에따르면고종과명성황후는개혁에관심이많아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반대를물리치고일본에대일조사시찰단을파견하기도했으나갑신정변을겪으며일본과김옥균일파에치를떨게되었다고한다.명성황후는여성교육에도관심이많아1887년에‘이화학당(梨花學堂)’의교명(校名)을지어줄만큼진취적인분이었다.
저자인박광민(朴光敏)한국어문교육연구회연구위원은,“흔히명성황후가청나라를끌어들여국정을장악했다고하지만일본이물러간자리를메워들어오는청나라를막을힘이고종이나명성황후에게없었을뿐”이라고변론하였다.「윤치호일기」1884년3월4일자에고종내외와윤치호사이에오간문답은,주변국의전횡(專橫)을막을힘이없어신하에게강대국의동태(動態)를물으며등거리외교를해야했던약소국군주의서러운모습이라는것이다.「윤치호일기」에는다음과같이기록해있다.
“이날오후2시경에대궐에들어갔는데그자리에서두분전하께서내게물으셨다.만약청국(淸國)이무리하게우리나라권리를압제(壓制)하면미국과미국공사(公使)는반드시힘을다해우리를쟁변(爭辨)해줄수있을것같으냐?내가아뢰었다.무릇미국은우리나라가겪는수모를냉정히보고만있지는않을것입니다…….”

무당굿과사치로나라를망쳤다는것도1896년에기쿠치겐조가펴낸「조선왕국(朝鮮王國)」에서비롯된것으로조선인들이이내용들을퍼나르고돈벌이용통속소설을쓰며국모(國母)를악녀로만든결과라고한다.
1931년에간행된「명성황후실긔」에따르면,“기도를드려마침내태자를탄생하였으므로태자의축수(祝壽)를위하여금강산1만2천봉마다돈열냥과백미한섬씩을바쳤다”하고,「매천야록」에도봉우리마다돈만민(萬緡)씩을바쳤다고했지만,「일성록(日省錄)」에의하면1880부터1881년까지1년간조정각사(各司)에서쓴돈이67만9천72냥에불과한데,내탕금(內帑金)이있었다고해도왕비가굿을하는데12만냥이나쓸만큼큰금액도아니다.당시굿을하여안녕을비는것은왕실이나민간이다르지않았으며,왕실에서굿을했으니민간보다는비용을조금더주었을뿐이라는것이다.「매천야록」에는‘명성후(明成后)’라는표현을비롯해1898년8월10일에창간된‘제국신문’등이보이므로이책」은1898년8월이후에저술된것이며,여항(閭巷)의말도안되는소문을모아놓은야사류(野史類)기록이많다고한다.
명성황후는이모(姨母)의인사청탁마저물리칠만큼권한행사에조심스러워했는데인사(人事)를천단(擅斷)했다는소문은터무니없다.민영소(閔泳韶)에게보낸한글간찰에는,“마패(馬牌)와척문(尺文)은남에게주었다가폐단(弊端)을만들까싶어그만두겠다”는내용도있다.고종이지은태행황후지문어제행록에는“혹(명성황후에게)은혜를바라는사람이있으면경계하여말하기를,항상억제하라.그만해도오히려교만하고사치할까봐우려되는데더구나깃을빌려주겠는가”라고하여주변사람을단속하는모습도있다.

흔히시부(媤父)인흥선대원군과명성황후가원수지간이라고하지만고종이영보당(永保堂)이씨가낳은완화군(完和君)을원자(元子)로세우고자할때,“중궁이대군을낳으시면어찌하려하시느냐”며완화군책봉을막아준사람이흥선대원군인데,임오군란때피난지를떠돌던명성황후가청군(淸軍)을불러들여흥선대원군을납치했다는설도근거없는거짓말이라고한다.이책에는〈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전문을번역해수록하였는데저자는,“피란을떠날때부터인후염과종기,학질등에시달려삶과죽음을넘나들며하룻밤도편히묵지못하고이리저리쫓겨다닌명성황후가어느결에청군과연락해시아버지를납치했겠는가.이는청나라가외교적판단에근거해시행한일이며,김윤식(金允植)의일기인「음청사(陰晴史)」1882년음력7월10일자에그전말이상세히기록돼있다”며관련기록을번역해싣고원문까지제시하였다.

인현왕후와명성황후의숨결이배인‘감고당(感古堂)’명칭은인현왕후당시에는‘양정재(養正齋)’였으며,명성황후의친정조카인민영익(閔泳翊)이후여러사람소유가되었던감고당의유전(流轉)과정을상세히밝혔다.명성황후가시해(弑害)당한곳은곤녕합(坤寧閤)침전(寢殿)이며,시해장소로잘못알려진명성황후의서루(書樓)명칭도옥호루(玉壺樓)가아니라옥곤루라는사실을여러자료를근거로논증(論證)하였다.

「명성황후가꿈꾼나라」는명성황후가태어나서부터시해당할때까지의삶을편년체(編年體)형식으로사실(史實)과사실(事實)에충실하게밝힌자료집성격의평전(評傳)이다.저자가사실(史實)에근거해구성해넣은짧은픽션형식의글과한문투로저술되어일반인이읽기어려운「풍운한말비록」및「조선왕세보」등을현대문으로쉽게윤문(潤文)해수록했는데소설적재미와함께당시의시대상(時代相)도들여다볼수있다.명성황후에대해잘못알려진내용들을자료중심으로변론하여독자들이새로운역사를들여다볼수있게저술된좋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