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 (오탁번 시집)

비백 (오탁번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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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산수傘壽를 맞는 노시인의 해학과 성찰
낮은 목소리로 전해져오는 미적 전율
‘내 글을 이해하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이어령
자유로운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 인간과 자연을 실물적으로 포착하고 재현하는 오탁번 시인의 시는 이제 나이, 늙음, 죽음, 존재 등의 문제까지도 넘어서는 담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저자

오탁번

1943년충북제천.
백운초.원주중ㆍ고.고려대영문과,대학원국문과.
1966년동아일보(동화),1967년중앙일보(시),1969년대한일보(소설)신춘문예.
1971-2008년육사교수부,수도여사대,고려대국어교육과교수.
◦시집:『아침의예언』(조광.1973),『너무많은가운데하나』(청하,1985),『생각나지않는꿈』(미학사,1991),『겨울강』(세계사,1991),『1미터의사랑』(시와시학사,1999),『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2002),『오탁번시전집』(태학사,2003),『손님』(황금알,2006),『우리동네』(시안,2010),『시집보내다』(문학수첩,2014),『알요강』(현대시학,2019).
◦문학선ㆍ시선집:『순은의아침』(나남,1992),『사랑하고싶은날』(시월,2009),『밥냄새』(지만지,2012),『눈내리는마을』(시인생각,2013).
◦창작집:『처형의땅(일지사,1974)』,『내가만난여신(물결,1977)』,『새와십자가』(고려원,1978),『절망과기교』(예성,1981),『저녁연기』(정음사,1985),
『혼례』(고려원,1987),『겨울의꿈은날줄모른다』(문학사상사,1988).
『오탁번소설』전6권(태학사,2018)재출간.
◦산문집:『현대시의이해』(나남,1998),『오탁번시화』(나남,1998),『시인과개똥참외』(작가정신,1991),『헛똑똑이의시읽기』(고려대출판부,2008),『병아리시인』(다산북스,2015),『두루마리』(태학사,2020).
◦수상:한국문학작가상(1987),동서문학상(1994),정지용문학상(1997),한국시협상(2003),고산문학상(2010),김삿갓문학상(2010),목월문학상(2019),공초문학상,(2020),유심문학상특별상(2020),은관문화훈장(2010).
⦁한국시인협회평의원.고려대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목차

1.해동갑

소두마리의울음소리______12
삼대三代______15
이름______18
보릿고개______21
박달재______23
벌초______26
일기예보______28
해동갑______30
어리보기______31
술적심______32
냄비______33
풍경風磬______34
네이놈!______36
시집이운다______37
어영부영______38

2.해름

비백飛白______42
구구단______43
봉양역______44
종종이______45
옛말씀______46
버슨분홍______48
해름______49
옥수수수염______50
혼잣말______53
얼굴______54
동창회______55
독후감______57
벼랑______59
살맛______61
위리안치______62
제비______63
니,해라______64

3.시인의사랑

춤사위______66
저승길동무______68
별‘아!이어령’______70
추억______72
절명시______73
이수익______75
노향림______77
윤석산______79
나태주______81
용고뚜리______83
시인의사랑______85
바보양띠______88
오누이______92
개꿈,니콜로파가니니______94
과일바구니______96

4.휘뚜루

두루뭉술______100
똥딴지______101
무기징역______103
여류시인______105
몹쓸______107
용꿈______108
감별사______112
음식윤리______114
팬데믹______116
휘뚜루______118
나자르본주______120
팽이______122
일동기립!______124
아잔______126
세상일다이러루하니______128
쇼팽의심장______130
제천______132
늘푸른큰키나무______134
사람사는일다이러루하니______136

┃시인의산문┃언어를모시다______137
┃해설┃유성호ㆍ시간의필경사가전해주는
말과마음의고고학______153

출판사 서평

“시는언어를최고로받들어모시는문학의장르”

콩을심으며논길가는
노인의머리위로
백로두어마리
하늘자락시치며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날
일손놓은노인의발걸음
호젓하다

-「비백飛白」전문

시집표제작에서시인은자신의‘시쓰기’를정점의고백으로들려준다,‘비백’은한자서체의하나로서획마다흰자국이나도록쓰는방법을말한다고한다.다리를절룩이며느리게걷는노인머리위로“백로두어마리”가하늘자락시치며날아갈때,시인의시선에는“깐깐오월/모내는날”에그광경을호젓하고고즈넉하게바라만보는노인의발걸음이들어온다.그것이가장‘시적인것’이었기때문일것이다.“50년전으로돌아가/1970년대나에게팬레터쓰고싶다”(「독후감」)는시인은이처럼여전히젊고아름다운창신의미학을오늘도개척해간다.“몹쓸은유는죄악”(「몹쓸」)임을명심하면서“비백飛白의절명시絶命詩”(「절명시」)를써가는것이다.

이번시집에들어앉은사물들은화음(和音)으로서로어울리면서가볍게출렁인다.그출렁임은격렬한몸짓으로이어지지않고사물과사물사이를환하게채우는밝은파동으로만존재한다.그잔잔한풍경에서시인은자기영토를확보한사물들에게새로운이름을주고,그들끼리소통하게하며,나아가그들이시인의경험속에어떻게깃들이게되었는가를표현한다.이때사물들은외따로떨어져있는개체들이아니라서로긴밀하고촘촘한연관성을가지는유기적전체를이루게된다.그래서시인이상상적으로구성하는사물의관계는합리적인과율이아니라시인의경험적시선에의해결속되고있는것이다.그시선이지극한고요함으로사유하는‘시’와‘시인’의길을여기까지이끌어온것이다.
우리가잘아는것처럼시인으로서오탁번의존재는“시는언어를최고로받들어모시는문학의장르”(「시인의산문-언어를모시다」)라는선언에서발원한다.

문학평론가유성호(한양대학교국문과교수)는“오탁번시집『비백』은천진성의시학과비근대시법에의해발원된것으로서그야말로순은(純銀)이빛나는아침으로부터뉘엿하게기울어가는해거름까지지내온순수회귀의미학을미덥게펼쳐간사례로남을것이다.때로‘방울울타리’의고요함으로,때로‘창수레’의역동성으로,천천히낡아가거나사라져가는것들을온정성으로기록해가는‘시간의필경사’로서,오탁번시인은뒤를돌아보면서도앞을예시하는역설의시학을한없이지속해갈것이다.그리고우리에게말과마음의고고학을하염없이들려줄것이다.”라고이번시집이갖는미학적가치에대한의미를말한다.

중얼중얼혼잣말의시학

오탁번시인은섬세한물리적파상(波狀)에자신의궁극적귀속처가있음을노래함으로써작고아름다운서정적순간을포착하고착상하고형상화해왔다.그것은자신의감정을격정적으로토로하지않고사물스스로말하게하는세련되고깊이있는감각과사유에서가능한것이었다.그는이러한과정을통해사물의본성그대로를살리는데힘을기울이고있지만,결코사물과손쉽게동화하지않고사물과한결같이거리를유지하면서그들의속성을형상적으로추출하고배열해간다.다시말해자신의경험을직접노출하려는욕망을경계하면서사물이가진본래속성을자신의실존차원으로까지끌어올리는것이다.이번시집은자신이살아왔고살아가야할삶의심층을유추하고성찰하는방법을취하게끔함으로써이러한원리를적극적으로실현한결실이다.낮은목소리로전해져오는미적전율이참으로미덥고아름답다.이제는‘시인오탁번’의유사에,속살처럼,아늑한거소(居所)처럼,가닿아보자.

원주역에서기차를타고
1963년겨울
청량리역에내렸다

안암동까지
추운길을걸어갔다
그길이
내생애의비알이고벼랑이라는것을
까맣게모른채

내가걸어온길은
기승전결엉망인쓰다가만소설
낙서같은시

눈물이앞을가려
(상투적수사가이럴땐딱!)
더는얘기못하겠다
……
종종이나찍어야지

-「종종이」전문

스물한살‘청년오탁번’은1963년겨울원주역에서청량리행기차를탔다.청량리에서안암동까지걸었던그‘길’이“내생애의비알이고벼랑”이라는것을그때는몰랐다고한다.‘비알’은‘비탈’이니그아찔하고가파른비유를새삼일러무엇하겠는가.적수(赤手)의한청년이그후로걸어온길은“기승전결엉망인쓰다가만소설”이나“낙서같은시”로남았다지만,그안에는실존의고독과고통이눈물처럼떠오르면서끝내‘종종이’처럼일견적막으로일견침묵으로각인되었을것이다.그렇게이야기하지않음으로써큰것을이야기하는역리(逆理)의방식을두고,시인은“눈으로읽는시보다/귀로듣는나무의울음소리가/더시답다”(「시집이운다」)라고비유했을것이다.그리고그러한‘시’의비유적형상은다음에서더욱확장된다.

수수밭가에서팔휘저으며
새떼쫓는할아버지나
보행기밀고가다가
느티나무그늘에쉬는할머니는
중얼중얼혼잣말잘도하신다
그말을가만히귀동냥해서들으면
그게바로시다
그러나문장으로옮겨적으려는순간
는개처럼흩어져버린다

마른기침사이로쉬는한숨에는
전생애의함성이있고
캄캄한우주를무섭게가로지르는
살별의침묵도있다
중얼중얼혼잣말이여
아,알짜시여

-「혼잣말」전문

‘혼잣말’은누군가에게할말을스스로에게건네는자기확인의언어이다.수수밭가에서새떼를쫓는할아버지나보행기밀고가다가쉬는할머니가중얼중얼하시는‘혼잣말’은시인의비유를통해“그게바로시”로새삼등극한다.그‘시’는문장으로옮겨적으면곧사라져버리니그저혼잣말로우주를가득채울수밖에없었을것이다.마른기침사이로쉬는한숨에도생애를가득채운함성이들어있고우주를가로지르는침묵도잠겨있지않은가.그“알짜시”야말로그에게“새싹올라오는마늘밭”(「위리안치」)처럼신생하는순간을가져다준것이아니겠는가.오탁번시인의중얼중얼혼잣말이우리문학사에짙은밑줄을긋는순간이아닐수없다.

능청스러운언어로사물의본질을이야기하는‘모어母語의예술가’

그는풍경의구체나기억의심도(深度)도놓치지않지만,그에딱맞는토박이말을찾아내느라정성을들이는모어(母語)의연금술사로우리에게각인되어있다.비록표준어가규율과소통의편의를도모했다하더라도그는살아있는입말이야말로그자체로우리말의가능성을확장해가고있다는자각을의식의심층에간직하고있다.이때우리는말라르메가‘시인’을일러‘부족방언(모어)의예술사’라고정의했다는사실을환기하면서,모름지기시인이란모어를최대한세련화하여구성원들에게깊은인지적,정서적감염을선사하는존재라는함의에훤칠하게가닿게된다.더없이풍요롭고살가운모어의집성(集成)이말하자면그의근작들을수놓고있는셈이다.
시인이자소설가이자동화작가이자원서헌(遠西軒)문학관관장인오탁번시인(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한국시인협회회장)…참많은직함을갖고있으면서도어느것하나소홀한것이없는그를일러우리는‘천재’라는말을아끼지않는다.한국문단에서는그를‘3종3관왕’이라고도칭한다.대학재학중에동화(66년동아일보),시(67년중앙일보)가신춘문예에당선됐고졸업이듬해에소설(69년대한일보)이당선됐기때문이다.
고이어령선생은‘내글을이해하고함께호흡할수있는유일한사람’이라고했다.자유로운상상력과활달한언어,인간과자연을실물적으로포착하고재현하는오탁번시인의시는이제나이,늙음,죽음,존재등의문제까지도넘어서는담대한사유를보여준다.

오탁번시인은지난2003년백운국민학교애련분교의부지와건물을샀다.자신이다니던국민학교의분교다.교실세칸과숙직실,안채를손보아아담한문학관을만들었다.제천과원주일대를둘러보다결국'삶의밑변'이었던천등산박달재아래로자리잡았다.문학관의이름은원서헌(遠西軒),제천에서도먼서쪽이라는뜻의조선시대지명이다.해가지는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