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돼야할‘민족통일의화신김구신화’
‘테러리스트김구’를정조준한학자,이번엔‘반역자김구’로돌아오다
강렬한민족주의자와국가반역자,환상적부조화에대한비판적성찰
2026년은백범김구탄생150주년을맞는해다.유네스코(UNESCO)는겨레의큰스승이자독립운동가인그의업적을기리며’김구탄생150주년기념해(150thanniversaryofthebirthofKimKoo)’로공식지정했다.유네스코는“백범김구선생은해방이후군사력이나경제력이아닌‘높은문화의힘’을통해인류전체에행복을주는‘문화국가’를꿈꾸었다”며“‘평화의방벽을인간의마음속에세워야한다’는유네스코헌장정신은인류불행원인을‘인의(仁義)와자비,사랑부족’으로보고문화를통해이를극복하고자했던김구선생의철학과정확히맞닿아있다.이번기념해지정은그의선구적인평화사상과문화다양성존중의가치를국제사회가공인한결과”라고취지를밝혔다.
이처럼대한민국은김구라는상징을반복호출해온기억의공간이다.사후70여년이지난오늘날에도김구는여전히한국인을훈육하는‘민족의스승’으로군림하고있다.해마다그의혼백은민족의정령으로소환되며,정치적판단보다감정의언어로해석돼불가침의신성으로재현된다.
1948년4월남북협상참여와“삼팔선을베고쓰러질지언정단독정부는안된다”는선언은김구를대한민국건국대통령이승만보다더높은도덕적상징으로끌어올렸다.그결과김구는이성보다감정으로민족주의를실천한민족의거성,평화와통일의십자가를짊어진민족의메시아로신격화되었다.
그러나김구신화에는‘붉은균열’이존재한다.대·한·민·국·반·역·자.이는아이러니하게도김구암살자로두고두고비난받는안두희의입을통해드러난다.안두희는김구와그주변을공산당과협력하는세력으로인식했고,“나에대한반동은국가와민족에대한반역”이라는발언을통해김구를‘대한민국반동’으로확신했으며,“영감과나라를바꾸자”는심정으로그판단을행동으로옮겼다고밝혔다.
2024년『테러리스트김구』를통해시대의금기를건드리며센세이션을일으켰던저자정안기가2년만에『반역자김구』를통해‘국민영웅’으로비춰지고있는백범김구에대한또하나의탈신화화에도전한다.2년전‘테러리스트와국부라는환상적부조화에대한비판’을시도했던저자는,이번에는‘강렬한민족주의자와대한민국반역자라는환상적부조화에대한비판적성찰’에나선다.
저자는특히김구의귀국이후이루어진‘남북협상’을단일사건이아니라그전후의정치적맥락에서재구성하고,막스베버의‘소명의정치론’을적용해그의정치적자질과윤리를비판적으로검토했다.이책은남북협상자체뿐아니라전사(前史)와후사(後史)까지종합적으로검토한후결론을내린다.
그동안김구의행보는통일지향으로도,대한민국건국부정으로도해석되어왔지만두관점을통합적으로분석한연구는드물었고,감정에치우친접근은평가의양극화를심화시켰다.이책은바로이지점에서출발해그의정치적선택과역사적귀결을‘도덕과신화의언어’에서‘역사와정치의영역’으로되돌려놓고자한다.
남북협상에나선‘정치가로서의김구’에대한평가기준은막스베버(MaxWeber)가설파한‘소명으로서의정치’다.베버는역사의수레바퀴를움직이는소명으로서의정치가에대한자질로열정(Passion)과책임감(Responsibility),균형감각(Proportion)을제시한바있다.요컨대정치가는뜨거운가슴과차가운이성을동시에구현해야하는존재라는것이베버의통찰이다.그에게정치가는선의를좇는도덕가가아니라주어진현실에서최선의결과를빚어내는장인이었다.그가말한‘소명’은단순한직업이아니라‘내면의소리에따라현실의악마와맞서는정신적부름(Spiritualcalling)’이었고,정치는신념과현실사이의팽팽한긴장이었다.
이책은김구의남북협상을이념적찬양이나일방적비판에머물렀던기존의감성적·이념적서사대신,‘베버프레임’으로다층적·복합적·가치중립적관점에서실증분석한다.이는정치적선택의윤리성과현실성사이에서동태적균형을모색하는정치가의자기성찰을조명한다는점에서현대적시사점을지닌다.
혼돈으로가득했지만진공상태였던해방공간에서,미국은동유럽의사례를교훈삼아신탁통치를통해한국인들의근본적자유를보장하고통일독립과자유민주주의를이식하는동시에소련의영향력을차단하고주도권을확보하려했다.하지만김구의반공·반탁은소련에대한미국의협상공간을제약하고교섭력약화를초래했다.
김구의반공·반탁은미국의옆구리를파고드는‘가장뼈아픈비수’였고,미·소공위라는‘자주독립의사다리’를걷어찬‘기회주의적정치가’의표본이었다.김구의반공·반탁운동은해방직후임시정부가유일한정권수임기관이돼야한다는임정봉대노선과결합된권력정치의전형이었다.분단은미·소대립이라는국제정치산물을넘어김구의권력정치와상호작용한결과였다.
김구의남북협상성립과정에서드러난정치적탄력성역시이상과신념의일관성이라기보다정치적주도권을둘러싼권력투쟁결과였다.즉,‘소명으로서의정치’라기보다정략과생존이교차하는권력정치의전형에가까웠다.그의남북협상은민족주의적결단이라기보다북로당의대남전략과임정봉대의권력구상이복합적으로맞물린산물이었다.
김구의남북연석회의참석자체부터‘통일의이상’에따른주도적결단이라기보다는주도권을상실한종북적대응,곧‘정치적들러리의선택’에가까웠다.1947년후반이후정치적고립과권력기반이흔들리는국면에서남북협상을통해새로운정치적공간을확보하고자한것이다.
협상과정에서도구체적전략도복안도없이민족정서에의존해정치적책임과준비를결여했다는사실이드러났다.더구나당초계획과달리김구의요청으로회의규모를확대해협상이라는본래목적보다정치적시위성과이벤트성을강화한형태로변질되었다.남측대표단을‘준비된잔치의들러리’로만든구조적책임역시김구에게있었다.
이는최근공개된소련공산당기밀문서와레베제프일기등을종합하면더욱뚜렷해진다.당시남북연석회의는김구·김규식과김일성·북로당이주도한것이아니라소련군정이배후에서치밀하게기획·연출·감독한정치적이벤트에불과했다.
소련은김구의참석을유도하기위해회의형식과일정변경,돌발상황에대비한비상대책까지마련하는치밀함을보였다.이과정에서김일성·북로당은소련군정의기획·연출을집행하는정치적에이전트에머물렀다.연석회의는외세의통제아래연출된정치무대였다.이‘이벤트’에가장필요했던인물이김구였고,소련군정은김구를평양으로‘유인’하기위해치밀한공작을펼쳤다.
정치이벤트에서제대로된결과물이나올리만무했다.1948년4월의남북연석회의는통일협상이라기보다‘붉은공문서’를생산·공인한회의였다.이때채택된결정서·격문·요청서와남북지도자협의회공동성명은사전에설계된정치노선을문서화한결과물이었다.이과정에서김구는협상의주체라기보다‘붉은공문서’를보증하는공증인에가까웠다.남북연석회의에서발표한남한단선·단정반대,UN한위철거,미·소양군철수,민주주의통일정부수립등이른바‘4원칙’은형식적으로는민족자주와통일을표방했지만,실제로는소련의대남적화노선을정당화하는문서적장치였다.
소련과북한은김구를‘구워삶기’위해그가과거정혼했던도산안창호의여동생안신호에게시중을들게하고,김구가살며인연을맺었던곳들을미리정비해놓는치밀함을보였다.김일성은연석회의에앞서프락치를통해김구의식성까지상세히파악한뒤매끼녹두묵과김을식탁에올리게했다.
김구는일부러검박하게꾸며놓은김일성생가와비공산주의계열독립운동가들이좋은대우를받는것처럼연출한혁명자유가족학원등이있는‘혁명의성지’만경대를방문하고,자신의처지와비교하며감동을받는다.5월1일참관했던메이데이군사퍼레이드는호전적이고위협적인분위기로마무리하며무력시위를펼쳤다.그럼에도김구는돌아온뒤북한의남침가능성을부정하면서미군철수를줄기차게주장하기도했다.
이책은특히그간잘알려지지않았던메이데이다음날‘쑥섬야유회’의전모를공개함으로써남북연석회의라는거창한슬로건에가려진북한의속내를정확히짚는다.이모임은‘김구’라는정치적대어를‘연공합작’으로엮어내려는‘정치적어죽잔치’에가까웠고,친선이라는형식과달리정치적포섭을지향한정략적성격을띠었다.
5월3일오후김구는김일성과단독면담을갖고대남송전·통수,조만식석방·월남,한독당원석방,정치적피난처제공등을논의했다.김일성은한독당원석방요구에대해테러분자라며거부했는데,이는김구·한독당이1946년이래북한지도부를겨냥한테러공작과연계돼있음을시사한다.김구가정치적망명과함께안창호의고향인근과수원제공및집필지원을요구하는등단독면담은단순한의견교환을넘어정치적선택지를재구성하는과정이었고,김일성의치밀한포섭전략이뚜렷한성과를거두었음을보여준다.
후사에서는일제시대와그이후까지각종암살과공작을펼쳤던김구를향한북한의특별공작과정과근거,이유등을분석한다.김일성은대표성과정통성도없는임정봉대의제도화를위해암살과폭력을주저하지않았던김구를남한정계의취약한고리로인식했다.그런가운데추진된김구의남북협상은결국‘통일을향한마지막몸부림’이기보다는소련의구상과북로당의정략이결합된정치적이벤트에철저히이용당한꼴이되었다.김구의평양행은미국과이승만에게타격을주었고,김일성은이익을얻은반면김구는그렇지못했다.
북한에서돌아온김구는유엔결의에의한남한만의5·10단독선거를반대하면서,이승만과미군정이분단정권수립을위해실시한선거이자다수의정치세력이배제된불공정한엉터리선거로규정했다.오히려그와한독당은‘통일정부’를표방한북한의‘인공’수립에합력하며간접적으로참여했다.
김구는심지어당시주한중국총영사였던유어만(劉馭萬)과의대화에서“지금잠시남한에정부가수립되었다하더라도머지않아소련에의해‘인민공화국’을선포하게될것”이라는충격적발언을했다.부통령취임권유에는“어차피적화될나라의부통령”이라며거절하기도했다.이승만·이시영의정·부통령취임후에도김구는이를‘반조각정부’로규정해정통성을부정했다.이후김구와한독당은‘공산당제5열’이라는비난과함께심각한내분에휘말렸다.
오랜후인1986년,김일성의특명으로‘김구의남북협상’과‘김일성의남북연석회의’역사화작업이추진됐다.북한선전매체는김일성을탁월한영도력과포용력을지닌지도자로부각하는한편,김구는‘감화와전향’의객체로재구성했다.여기서조차김구의남북협상은북한체제의정통성과김일성우상화를위한정치적오브제로전락했다.
1980년대후반종북주사파는친일미청산을모든사회악의근원으로규정하는‘해방전후사’인식을바탕으로이승만을폄하하고김구를신화화하기시작했다.‘김구띄우기와이승만깎아내리기’는이들의역사공작가운데가장성공한사례였지만,‘통일의화신김구’프레임은김일성에의해창작된서사에가깝다.결국오늘날유통되는‘김구신화’는김일성의구상과종북주사파의연출이결합된‘역사공작’의산물이다.
김구는과연자신의시대와역사를책임지기에충분한공덕심을갖춘‘소명의정치가’였는가,아니면권력욕에사로잡힌‘권력정치의화신’이었는가?1949년6월비극적종말로막을내린김구권력정치의더상세한내막은이책을통해확인할수있다.저자는이러한작업을통해20세기‘소명의정치가(Politicsasavocation)’이승만초대대통령의독립정신과건국운동을재조명하고,그역사적의의를올바르게평가하는데작은디딤돌이되기를바란다고밝혔다.저자는특히1,364개나되는미주를통해철저히사료에바탕한주장으로‘김구신화’를해체하고있다.
김구는1946년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