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박순
1523년(중종18년)10월박우(朴祐)와당악김씨의맏아들로나주에서태어났다.
1553년31세문과에응시하여≪중용≫을강론하고장원급제하였다.성균관전적(정6품)에임명되었다가,곧공조좌랑(정6품)으로옮겼다.
1561년39세봄에홍문관응교(정4품)에임명되었지만,5월에특명으로파직되어나주로돌아왔다.그때옥당에서임백령의시호를의논하였는데,사암이그를낮게평가하여‘소공(昭恭)’이라고올렸다가탄핵당했던것이다.12월에한산군수(종4품)에임명되었다.
1564년42세정월에홍문관직제학(정3품)으로옮겼다가,윤2월에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정3품)로승진하였으며,통례대로좌승지(정3품)까지승진하였다.10월에이조참의(정3품)에임명되었다.
1565년43세정월에성균관대사성(정3품)ㆍ사간원대사간(정3품)에임명되었다.4월에문정왕후가세상을떠나자,요승보우의죄를논하여외딴섬으로유배보냈다.8월에는외척윤원형의죄를논하여시골로돌아가게하였다.겨울에사헌부대사헌(종2품)에임명되고,가선대부(종2품)에올랐으며,다시한성부우윤(종2품)에임명되었다.
1566년44세봄에동지중추부사(종2품)에임명되었다가,6월에다시부제학(정3품)과대사헌에임명되었다.이듬해에도이자리에두어번다시임명되었다.
1567년45세6월에예조참판(종2품)에임명되었다.
1568년46세명나라에서태감장조와행인구희직을명종의시제때문에사신으로보내자,접반사가되었다.
1572년50세봄부터겸직인대제학을사퇴하게해달라고청하였지만,임금이끝내허락하지않았다.7월에영의정이준경이세상을떠나자,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정1품)에올랐으며,겸직은계속하였다.8월에등극사로연경에갔다.
1579년57세2월에영의정(정1품)에올랐다.
1583년61세2월에경원의오랑캐니탕개가반란을일으키자,3월에많은인재들을추천하였으며,7월에병조판서를겸하였다.
1585년63세여름에스스로사퇴하고영중추부사가되었다가,홍문관수찬정여립의탄핵을받고영중추부사에서도해직되어용산으로돌아가쉬었다.
1586년64세가을에휴가를청해영평현초정으로목욕하러갔는데,임금이내관을보내술과호피를하사하였다.백운산시냇가에집을짓고살았으며,겨울에상소하여관직을사퇴하였다.
1587년65세임금이의원을보내치료하게하였으며,세차례나교지를내려불렀지만끝내올라오지않았다.
1589년67세7월백운산시냇가에서세상을떠났다.10월에종현산동쪽언덕에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