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세기 : 정하룡 회고록

나의 20세기 : 정하룡 회고록

$34.00
Description
프랑스 국가 박사에서 동백림사건의 사형수가 되기까지
한 지식인의 인생 역정
이 책은 저자의 사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곧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관 속에서 저자가 느꼈던 것, 사색한 내용을 정리한 게 주 내용이고, 그 사이사이에 자신의 일상사와 신변잡기를 끼워 넣어 스토리텔링을 이어가는 ‘자기 성찰적’ 기록이다.
91세의 저자는, 숨 쉬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본인이 살았던 역사를 다시 관조해 보고 싶어 어렵사리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곧 저자에게 있어 이 회고록은, 미래사의 기본은 과거사에 기록되어 있고, 그래서 역사 속에는 의미와 상징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자식 세대, 손자세대, 곧 지금의 한국을 짊어지고 있는 청장년들에게 남기는 ‘기억의 전달’이다.

유년 시절을 식민종주국 일본에서 보낸 저자는 곧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 혼란은 따돌림(이지메)과 차별을 당하거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착근된 중층인격으로 구조화되었고, 구체적으로는 그의 내면에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함께 일본화된, 모순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말 미군의 도쿄 공습이 일상화되자 저자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내선일체’라는 허울 아래 창씨개명, 일본어 강제사용, 자원·식량 수탈, 징용·징병, 종군위안부 강제 송출, 각급 학교의 군국화 교육 등 가혹한 식민정책을 폈다. 소년 정하룡은, 총독부가 바라던 그러한 이중적 ‘황국 소년’ 교육에 힘없이 던져진 것이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국가가 탄생하는 냉전 구조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곧 이러한 상황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군인은 물론 수많은 남북 시민의 이유 없는 죽음을 낳았다. ‘휴전’이라는 엉거주춤한 형태로 전쟁이 끝났지만, 한반도의 모든 생명체는 육체와 정신의 궁핍과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대 지식인들의 허무적 ‘풍조’였던 카뮈의 니힐리즘에 대학생 정하룡이 발을 디딘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현상의 해결을 회피하거나 미룰 뿐이었고, 더하여 집권 이승만 정부는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로 온 사회를 옥죄었다. 도피일까, 무지개를 찾아서일까? 저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을 1년 앞두고 숨 막히는 이승만 독재와 니힐리즘에 기댄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당시 유럽은 2차 대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휴머니즘이 만개하여 있었다. 냉전을 뒷받침하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 모두에 앞서 강조되는 실존주의가 풍미하였다. 그 전선에 장 폴 사르트르가 우뚝 서 있었고, 저자도 실존주의를 자기 사고의 중심으로 삼았다.
저자는 프랑스 대학의 입학을 준비하던 시절, 프랑스 혁명의 요체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배웠고, 관용의 문화를 체득했다. 이렇게 쌓인 그의 인문학적 소양은, 사고는 유연하게, 그러나 행동은 과감하도록 인도했다. 그리고 사고에서 실천으로 이행해야 하는 이 ‘앙가주망’은 저자와 함께한 재불 유학생들의 공유 가치로 착근했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 만난 모리스 뒤베르제 교수는 저자의 학문적 방향과 주제를 잡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뒤베르제 교수의 권유와 지도로 김일성의 리더십을 분석한 석사 논문을, 이승만 정권의 정당 체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시앙스포 시절에 깊이 교유한 프랑스인 교수와 동창들은 후일 저자가 동백림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막강한 동맹군이 되었다. 이는 유럽의 68혁명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1950년대 후반의 프랑스 유학생은 대부분 유복한 가정의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들은 남북 분단 하에서 가난에 찌든 조국의 현실에 대해 애잔함을 넘어 어떻게든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데 한 역할이라도 하려고 했다. 선택받은 엘리트의 성찰적 사고였다. 자연 고민과 모색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중립주의, 사민주의의 개념을 포괄하는 ‘중도주의’에 의견을 모았다.
중도주의는, 남한의 후진성 탈피와 자유민주주의의 병존, 실질적 자유와 형식적 자유의 모순적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토론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의 극단적 이데올로기 대립과 이질화는 민족 공동체의 평화공존을 위한 합리적 사고체계조차 범죄시하는 상황이었다.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극단 사이에서 중립, 중간, 중도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를 돌파해보자고 한 첫걸음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 방문이었고, 평양여행이었다.

1967년 중앙정보부는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하고 귀국하였거나 현지에 남아 활동 중인 사람 2백여 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 재판에 넘겼다. 정하룡도 당시 경희대 교수로 재직 중 구속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관련자 다수를 프랑스와 독일에서 강제 납치해왔기 때문에 영토 주권을 유린당한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강력한 항의로 박 정권은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정하룡에 대해서도 프랑스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의 항의와 탄원, 석방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실존주의의 거성 장 폴 사르트르, 시몬느 보부아르, 노벨문학상 수상자 프랑소아 모리악, 영화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세계적인 사회학자 모리스 뒤베르제, 전 프랑스 총리 에드가르 포르와 레이몽 바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과 정치인들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프랑스 지성들의 항의운동으로 저자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무기수로, 15년 장기수로 3년 반의 감옥생활을 하고는 1970년 말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 후 그의 삶은 학자로서의 꿈을 박탈당한, 경세가로서의 포부와 구상이 좌절된 반쪽짜리 생활인의 삶이었으니, 이 여벌의 삶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몇 가지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었다.
젊은 날의 자아실현을 향한 고난의 행군이건, 그 패배와 좌절 이후 얻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건, 이 회고록은 한편의 장엄한 로드무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혈기방장했던 젊은 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91세 노년의 회상과 슬기로 찬찬히 풀어낸 저자는, 이 로드무비의 주인공이자 조연이고, 연출자이다. 이 로드무비는 이렇게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역사의 의미는 미래에서 결정되지만, 역사의 정신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바로, 절대적으로 ‘지금’입니다. 내일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할까? 그것이 ‘지금’이라는 시대의 의미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정하룡

저자:정하룡

1933년강원도강릉출생

경기중고등학교졸업(48회)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사회학과입학(4년중퇴)

파리정치대학(Institutd’EtudesPolitiqus,시앙스포)졸업

파리대학교정치학박사(Doctoratd’Etat)

‘동백림사건’에연루되어사형선고를받고

3년6개월간옥고를치른후대통령특별사면으로석방

주)대한항공회장비서실장,유럽·중동본부장역임

주)한국항공대표이사사장역임

프랑스정부로부터국가공훈훈장(OrdreNationalduMerite:Officier)수상

프랑스정부로부터레지옹드뇌르훈장(Legiond’Honneur:Officier)수상

은퇴후그림에몰두,3회개인전개최(서울1회,미국2회)

현재전라북도고창에서생활

목차

책머리에_
프롤로그_

제1장식민지에서온소년
종주국과식민지_
도쿄의조선소년_
나는조센징인가,쪽바리인가_
황국신민(皇國臣民)_
식민지백성의트라우마_
일본의패전_

제2장해방과분단
미·소냉전과민족분단_
한반도에흐르는냉전기류_
대한민국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_
중도주의에관하여_
중도주의구축의꿈과좌절_
중도주의의실제와논리_
프랑스의나치협력자처단_
실패한친일잔재청산_
친일파의변명_
역사를잊는민족에겐미래가없다_

제3장한국전쟁
한국전쟁의원인_
전쟁의경위_
서울의‘인민공화국’3개월_
피난생활_
대학생이되다_
전시하의대학생활_
휴전:불안한평화_

제4장동족상잔
동족상잔의전조_
마을참극의심리학_
해충구제론_
상이군인과전쟁고아들_
환도이후의대학생활_
나의명동시절_
사라지는가치,새로운가치_

제5장프랑스유학
이기양이등떠민프랑스유학_
마르크시즘과실존주의_
이데올로기의미로_
신세계:파리_
가톨릭을만나다_
사회주의접신_
폐결핵발병_
라트롱슈요양원_

제6장시앙스포(SciencesPo)
시앙스포의학생들_
시앙스포에서사귄친구들_
시앙스포에서배운교수들_
뒤베르제를지도교수로프랑스국가박사가되다_

제7장1950~60년대의한반도
중·소대립과김일성_
4월혁명의의의_
군사정변의빛과그림자(1)_
군사정변의빛과그림자(2)_
남·북한의체제경쟁_

제8장철의장막을넘다
조국통일에대한자각_
분단체제를깨기위하여_
동백림의북한대사관을방문하다_
이중적인북한의통일전략_
이기양과임석진_

제9장현장에서본북한,1962~65
평양의아지트생활_
내가마주한북한의현실:공업이일어서고있었다_
내가만난북한의요인들_
개인숭배:스탈린_
개인숭배:김일성_
개인숭배의논리_

제10장내가보는오늘의북한,2023
주체사상_
유물사관에서의일탈_
북한의문화예술:사회주의리얼리즘_
북한의복고풍예술형식_

제11장동백림사건
10년만의귀국_
체포와심문_
고문과자백_
정치재판_
6.8부정선거탈출을위한단막극_
대법원의파기환송_
한국과서독의외교마찰_
프랑크특사의방한_
죽음을넘어세상으로_

제12장박정희를굴복시킨유럽의지성
서독과프랑스언론의대응_
프랑스의유력언론<르몽드>의연속,심층보도_
전후14년의남북한:평양의통치자들_
전후14년의남북한:서울의통치자들_
서독과프랑스시민사회의대응_
장폴사르트르등세계적지성의탄원_
나의스승모리스뒤베르제교수의분투_
68혁명과동백림사건_

제13장나의옥중생활
열악했던감옥생활_
황성모와김두한을만나다_
대전교도소이감과전향문제_
분단의비운아정규명과정연택_
박성준의순애보_
한옥신과이용택의‘위로’_
파리에서들은‘김형욱의최후’_

제14장남은이야기
우리가족잔혹사_
유신헌법의기초자한태연과갈봉근_
사상범의자식들_
외아들의운동권활동과요절_
나의아내이순자(李洵子)_
반듯하게커준두딸_

에필로그_
자찬(自讚)연보_
찾아보기_

출판사 서평

유년시절을식민종주국일본에서보낸저자는곧정체성의혼란을겪는다.이혼란은따돌림(이지메)과차별을당하거나극복하는과정에서의식적또는무의식적으로착근된중층인격으로구조화되었고,구체적으로는그의내면에조선인이라는자각과함께일본화된,모순된모습으로자리잡았다.
일제말미군의도쿄공습이일상화되자저자는가족과함께서울로귀환했다.그러나총독부는‘내선일체’라는허울아래창씨개명,일본어강제사용,자원·식량수탈,징용·징병,종군위안부강제송출,각급학교의군국화교육등가혹한식민정책을폈다.소년정하룡은,총독부가바라던그러한이중적‘황국소년’교육에힘없이던져진것이다.

해방과함께한반도는상충하는이데올로기의두국가가탄생하는냉전구조의전진기지가되었고,곧이러한상황을전복하려는시도로한국전쟁이일어났다.전쟁은군인은물론수많은남북시민의이유없는죽음을낳았다.‘휴전’이라는엉거주춤한형태로전쟁이끝났지만,한반도의모든생명체는육체와정신의궁핍과허기에서벗어날수없었다.당대지식인들의허무적‘풍조’였던카뮈의니힐리즘에대학생정하룡이발을디딘것은자연스러웠다.

그러나니힐리즘은현상의해결을회피하거나미룰뿐이었고,더하여집권이승만정부는극단적반공이데올로기로온사회를옥죄었다.도피일까,무지개를찾아서일까?저자는서울대학교사회학과졸업을1년앞두고숨막히는이승만독재와니힐리즘에기댄일상에서벗어나기위해프랑스유학을떠났다.
당시유럽은2차대전의상처를치유하고다시인간을중심에세우는휴머니즘이만개하여있었다.냉전을뒷받침하던이데올로기의시대는종언을고하고있었고,민주주의와휴머니즘이모두에앞서강조되는실존주의가풍미하였다.그전선에장폴사르트르가우뚝서있었고,저자도실존주의를자기사고의중심으로삼았다.
저자는프랑스대학의입학을준비하던시절,프랑스혁명의요체인자유,평등,박애정신을배웠고,관용의문화를체득했다.이렇게쌓인그의인문학적소양은,사고는유연하게,그러나행동은과감하도록인도했다.그리고사고에서실천으로이행해야하는이‘앙가주망’은저자와함께한재불유학생들의공유가치로착근했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만난모리스뒤베르제교수는저자의학문적방향과주제를잡는데많은영향을끼쳤다.뒤베르제교수의권유와지도로김일성의리더십을분석한석사논문을,이승만정권의정당체제를주제로박사논문을썼다.시앙스포시절에깊이교유한프랑스인교수와동창들은후일저자가동백림사건으로구속되었을때막강한동맹군이되었다.이는유럽의68혁명의영향이라고보았다.

회고록에등장하는,1950년대후반의프랑스유학생은대부분유복한가정의서울대출신이었다.그들은남북분단하에서가난에찌든조국의현실에대해애잔함을넘어어떻게든이를구조적으로해결하는데한역할이라도하려고했다.선택받은엘리트의성찰적사고였다.자연고민과모색을교환하고토론하는모임이만들어지고,중립주의,사민주의의개념을포괄하는‘중도주의’에의견을모았다.
중도주의는,남한의후진성탈피와자유민주주의의병존,실질적자유와형식적자유의모순적현실을타파하기위한토론의결과물이었다.그러나당시남북의극단적이데올로기대립과이질화는민족공동체의평화공존을위한합리적사고체계조차범죄시하는상황이었다.공산주의와반공산주의의극단사이에서중립,중간,중도는설자리가없었다,그래서어떻게든이를돌파해보자고한첫걸음이동베를린의북한대사관방문이었고,평양여행이었다.

1967년중앙정보부는프랑스와독일에유학하고귀국하였거나현지에남아활동중인사람2백여명을간첩혐의로구속,재판에넘겼다.정하룡도당시경희대교수로재직중구속되어사형판결을받았다.그러나중앙정보부가관련자다수를프랑스와독일에서강제납치해왔기때문에영토주권을유린당한양국정부와시민사회의강력한항의로박정권은코너에몰리게되었다.
정하룡에대해서도프랑스정부와언론,시민사회의항의와탄원,석방운동이활발하게전개되었다.실존주의의거성장폴사르트르,시몬느보부아르,노벨문학상수상자프랑소아모리악,영화인마르그리트뒤라스,세계적인사회학자모리스뒤베르제,전프랑스총리에드가르포르와레이몽바르등프랑스를대표하는지성과정치인들이이대열에참여했다.

프랑스지성들의항의운동으로저자는사형에서감형되어무기수로,15년장기수로3년반의감옥생활을하고는1970년말대통령특사로석방되었다.그러나석방후그의삶은학자로서의꿈을박탈당한,경세가로서의포부와구상이좌절된반쪽짜리생활인의삶이었으니,이여벌의삶은그의파란만장한일생에서몇가지에피소드에불과할뿐이었다.
젊은날의자아실현을향한고난의행군이건,그패배와좌절이후얻은소소한일상의행복이건,이회고록은한편의장엄한로드무비를보는듯한느낌을준다.혈기방장했던젊은날의모든사고와행동을91세노년의회상과슬기로찬찬히풀어낸저자는,이로드무비의주인공이자조연이고,연출자이다.이로드무비는이렇게엔딩크레딧을올린다.

“역사의의미는미래에서결정되지만,역사의정신은‘과거’도아니고‘미래’도아니고,바로,절대적으로‘지금’입니다.내일을위해지금무엇을할까?그것이‘지금’이라는시대의의미이고사명이라고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