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목길 부처다 (이언진 평전)

나는 골목길 부처다 (이언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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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조선 시대의 가장 문제적이고 이단적인 시인, 이언진
이언진 평전『나는 골목길 부처다』. 이 책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26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 시대에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이언진에 대한 평전이다. 신분차별과 사상통제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과거의 시공간을 산 이언진을 21세기의 시각으로 다시 본 이 책은 이언진을 평가한 당대 문인들의 글을 살펴보고, 또 당대 동아시아 삼국의 이단아들과 이언진을 비교함으로써 중세 동양의 사상사 속에서의 이언진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있다. 한국 고전 인물전의 구성 형식을 많이 활용했으며, 이언진과 교류한 일본인의 기록을 검토하고, 관련 도판을 수록하였다. 이언진이 참여했던 1764년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이언진의 일기, 필담 기록, 그리고 조엄의 <해사일기>, 남옥의 <일관기>를 참조해서 재구성했다.
이언진은 저항시인이다. 이언진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그의 시에 담아냈다. <호동거실>은 바로 이 저항이 빚어낸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들어 결국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언진의 요절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 하나의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의 값진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이언진의 저항은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저자

박희병

저자 박희병朴熙秉은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전임강사와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부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한국 고전 인물전 연구』,『한국 전기소설(傳奇小說)의 미학』『한국의 생태사상』, 『운화(運化)와 근대』, 『연암을 읽는다』 등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등의 역서가 있다. 한국 고전산문과 비평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사상사와 예술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분과학문의 틀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한국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고자 고민하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Ⅰ. 이언진은 누구인가
Ⅱ. 새로운 진리구성
Ⅲ. 골목길 부처―새로운 주체의 탄생
Ⅳ. 동아시아의 이단자들
Ⅴ. 이언진의 현재성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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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 책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26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 시대에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이언진(1740∼1766)에 대한 평전이다.
이언진에 대해 아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의 저자 박희병은 전작(前作) 『저항과 아만』, 『골목길 나의 집―이언진 시집』을 통해 문제적 인물 이언진을 독자에게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되는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을 통해 이언진의 삶과 사상을 정리함으로써, 이언진에 대한 연구와 집필을 3부작으로 마무리한다.
‘이언진 전기’는 300년 전 조선의 대문호 연암 박지원(1737∼1805)에 의해 먼저 씌어졌다. 연암은 이언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전기를 썼는데, 『연암집』에 수록된 『우상전』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전(傳)은 이언진의 본래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이유를 이 책의 저자 박희병은 연암과 이언진의 ‘진리인식의 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연암은 조선왕조의 틀 안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이언진은 조선왕조의 틀을 부정하고 그 바깥으로 나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8세기 조선의 이단아 이언진에 대한 평전이다. 신분차별과 사상통제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과거의 시공간을 산 이언진을 21세기의 시각으로 다시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언진을 평가한 당대 문인들의 글을 살펴보고, 또 당대 동아시아 삼국의 이단아들과 이언진을 비교함으로써 중세 동양의 사상사 속에서의 이언진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있다.

조선 시대의 가장 문제적이고 이단적인 시인, 이언진

이언진은 저항시인이다. 이언진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그의 시에 담아냈다. 그러므로 ‘저항’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호동거실』은 바로 이 저항이 빚어낸 아름다운 보석이다. 이언진은 저항함으로써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언진은 이 당당함 때문에 결국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작(詩作)은 거대한 벽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병은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고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든 듯하다.
이언진의 요절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 하나의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시작(詩作)을 통한 이언진의 저항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사는 그 심부에서 심각한 균열과 파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껏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주자학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이탁오를 대놓고 찬양한 이는 없었다. 오로지 유교만이 최선은 아니며, 유불도 삼교 회통을 주장한 이도 없었다. 마치 사대부의 철학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인과 평민들의 삶에서 도(道)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인 셈이며, 균열과 파열의 시작인 셈이다. 이 균열과 파열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의 값진 출발점이다. 이 점에서 이언진의 저항은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 「호동거실」 제104수

이언진은 종래 ‘천재문인’으로 불려왔다. 이언진이 천재인 것은 맞지만, ‘천재’라는 단어는 자칫 이언진의 인간적, 사회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당대 사회에서 이언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문제적 ‘현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에게는 ‘천재’라는 수식어보다는 ‘괴물’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이언진이 이단아인 것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되는 이념과 위계적 질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언진과 같은 이단아는 조선 시대 역사에서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천재문인 이언진과 연암 박지원 ― 당대 문인의 평가

이언진은 18세기 중엽 조선 한양에 살았던 중인(中人) 신분의 중국어 통역관이었다(이언진의 조부, 외조부, 장인이 모두 역관이었다).
특정인을 제외하고는 외국 출입이 어려웠던 당시, 이언진은 중국 북경에 두 번, 그리고 일본에 한 번 역관의 신분으로 드나들었다. 이언진은 18세기 조선의 문인·지식인 중 중국과 일본을 모두 들여다본 유일한 사람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 특별한 외국 체험으로 이언진은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문명을 횡(橫)으로 견주어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언진이 조선의 ‘내부’에 있으면서 조선의 ‘외부’(즉 조선이라는 체제, 조선이라는 패러다임의 ‘바깥’)를 사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체험이 일정하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언진은 천재 문인이었다. 그의 천재적인 면모는 일본으로 갔을 때 확인되었다. 이언진의 대표작인 「바다를 구경하다」(원제 ‘해람편’海覽篇)와 일본인들이 기록한 이언진의 모습을 보면 그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의 그의 활약은 내내 조선과 일본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고, 당시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인들은 필담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펴내거나 자신의 문집에 필담 기록을 남겼다. 현재 전하는 오쿠다 쇼오사이의 『양호여화』, 미야세 류우몬의 『동사여담』, 이마이 쇼오안의 『송암필어』, 다이텐 겐죠오의 『평우록』 등이 모두 그 책들이다. 특히 미야세 류우몬은 그의 책 『동사여담』에 이언진, 성대중 등 조선통신사의 용모를 그림으로 그려놓아 당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본서에는 이들 일본 문인들의 문집을 모두 도판으로 수록했다). 조선에서 이언진은 태생적인 신분차별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타국에서는 천재적인 능력만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언진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박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지원은 이언진보다 세 살 위인데, 평생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이언진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765년 경 인편으로 몇 차례나 박지원에게 자신이 쓴 글들을 보냈다. 당시 박지원은 새로운 감각의 참신한 문장을 구사하여, 1760년대 조선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떠올랐다. 이언진은 자부심 강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쉽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박지원에게 자신의 글을 일독해 달라고 몇 차례나 글을 보냈다. 말하자면 이언진은 당대 최고의 작가인 박지원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이언진의 글에 대해 “잗다랗기 때문에 진기할 게 없다”라고 혹평했다. 이언진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촌놈이 사람을 골나게 하네!”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곧 탄식하기를, “내가 세상에 머문 지 오래됐어”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이언진은 세상을 떠난다.
박지원은 이언진이 죽은 후 그의 전기 「우상전」을 썼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 아홉 편의 전(傳)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정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쓴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박지원은 이 작품에서 자신이 이언진의 글을 혹평한 것은 농담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언진을 평가하고 있다.

“아! 나는 일찍이 속으로 우상(이언진의 호)의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 그럼에도 그의 기(氣)를 억누른 것은 우상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 머리를 숙이고 도(道)에 나아간다면 글을 써서 세상에 남길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상은 필시 나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박지원이 이언진에 대한 자신의 혹평을 농담으로 치부한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박지원의 혹평은 그가 지녔던 문학적 소신의 당연한 결과로 판단된다. 그 무렵 박지원은 ‘법고창신론’(法古創新論)이라는 문학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박지원의 법고창신의 시각으로 이언진의 글을 본다면 이언진의 글은 전면창신(全面創新)인 셈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따라서 과도하게 혁신적인 점이 문제로 비쳤을 것이다.
이때 박지원이 견지한 ‘진리인식의 틀’은 미학적으로는 법고창신이요, 사상적으로는 유교적 경세론(經世論)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언진의 글을 본다면 그야말로 신기함이나 쫓는 쇄말적인 것, 즉 도(道)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언진은 유교의 배타적 진리성을 부정했다. 유·불·도 3교의 공존을 주장했고, 이언진의 이러한 면모는 대문장가 박지원을 뛰어넘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이언진의 진리인식에 관해서는 이 책의 2장 참조).

관(冠)은 유자(儒者)요 얼굴은 승려
성씨는 상청(上淸)의 노자(老子)와 같네.
그러니 한 가지로 이름할 수 없고
삼교(三敎)의 대제자(大弟子)라 해야 하겠지.
― 「호동거실」 제120수

박지원이 조선의 사회 체제, 조선의 패러다임 안에 있었기에 그 경계선 밖으로 나간 이언진 문학의 근원적인 힘과 문제성을 정당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박지원은 법고창신론이라는 그의 강한 미학적 의식과 벌열(閥閱) 집안 사대부라는 계급적 존재구속성 때문에, 이언진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지원은 이언진의 죽음에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의 전기를 창작했지만, 정작 이언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언진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는 지극히 피상적이었다 할 것이다.

이탁오, 안도오 쇼오에키 그리고 이언진― 동아시아의 이단자들

혹자는 이언진이라는 인물이 천재문인이긴 하지만 26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고, 남긴 저서도 고작 시집 『호동거실』과 그밖에 짧은 글들 몇 편(『우상잉복』 포함)뿐이라, 사상을 논하거나 동아시아의 대사상가와 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언진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서 이언진의 글을 본다면 그의 비범함은 이미 조선을 뛰어넘었다. 또한 남긴 저작이 시집 한 권이라서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산문이 없기는 하지만, 짧은 시만으로도 사상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사상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정제된, 그리고 비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