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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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이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
1979년에 장준하 선생의 책에서 출판사명을 따와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선생의 서거 40주기에 즈음하여『돌베개』를 출간했다. 이 책은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장준하 선생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준엄한 항일수기로 숱한 오류의 교정과 주요 인물 소개 등 부속 자료를 풍부하게 보강하며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천 리 대장정의 기록을 생생히 담아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담아낸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시작해 쉬저우, 린촨, 난양, 라오허커우, 판촉령, 충칭, 시안, 상하이, 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술, 담배조차 전혀 입에 대지 않던 독실한 기독교인 장준하 선생이 배곯는 동지들을 위해 내보인 인간적 면모,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보낸 3개월 등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 책은 그곳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고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책 제목에 사용된 ‘돌배게’의 유래는 과연 무엇일까. 돌베개는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준하가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군을 탈출할 경우 아내에게 남기기로 한 암호였다. 장준하는 편지 말미에 ‘앞으로 베어야 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줄 것이다’라는 다짐을 써서 보낸 후 일군에서 탈출한다.
저자

장준하

저자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선천 신성중학교, 일본신학교, 한국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되어 중국 쉬저우에 배치되었다가 그해 7월에 탈출, 중국 대륙 6천 리 장정을 거쳐 1945년 1월 충칭 소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OSS(미국 전략첩보대) 특수훈련을 받았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 임시정부 제1진으로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환국했다.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가난한 분단국가의 미래 개척에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산을 응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펜의 힘으로 독재와 부패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연행, 투옥되었다. 1967년에는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된 상태에서 7대 국회의원에 옥중 당선되었으며, 이후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75년 1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유신헌법 개정을 위해 헌신하던 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정부는 실족추락사로 발표했으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2년 묘지 이장 중에 두개골에서 가격 흔적이 발견되어 죽음에 대한 의문점이 다시 제기되었고, 법의학 정밀감정을 통해 사인이 실족추락사가 아닌 가격에 의한 타살임이 증명되었다. 2013년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야 국회의원 104명의 공동명의로 일명 「장준하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1962년에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독립운동의 공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93년에 제1회 한신상, 1999년에 문화계 최고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근래 들어 뮤지컬, 학술 연구, 다큐멘터리 방송, 장정 답사 등 저자에 대한 다양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목차

발문?『돌베개』에 부치는 말

탈출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들
광복군훈련반에서 3개월
라오허커우의 공연
파촉령 넘어 태극기
눈물의 바다
자링 청수는 양쯔 탁류로
8·15 전후 I
8·15 전후 II
임시정부의 환국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연보

출판사 서평

광복 70주년,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 기념 전면 개정판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천 리 대장정의 기록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웅변하는 이 책을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며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자.

▶ 광복군 3대 회고록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돌베개』,
첫 출간 이후 44년 만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 출간된 최고의 문학서”라고 상찬한 장준하 선생의 항일수기 『돌베개』는 이범석 장군의 『우등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장정』과 더불어 광복군이 직접 쓴 회고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오랫동안 널리 읽혀왔다. 1971년 4월 30일에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펴내던 사상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여러 번 간행되었다. 1976년 일본에서 『석침?한민족에의 유서』石枕?韓民族への遺書라는 제목으로 사이마루출판회サイマル出版會에서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안우식安宇植 번역), 1978년에는 화다출판사에서, 1985년에는 ‘장준하선생10주기추모문집간행위원회’에서 ‘장준하문집’으로 1권 『민족주의자의 길』, 2권 『돌베개』, 3권 『사상계지수난사』가 간행되었다. 1987년에는 청한문화사에서 『돌베개: 청년시대의 항일투쟁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2년부터는 세계사에서 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요약본 『쉽게 읽는 돌베개』가, 2007년에는 양장본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79년에 장준하 선생의 책에서 출판사명을 따와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드디어 선생의 서거 40주기에 즈음하여 『돌베개』를 출간하게 됨에 따라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육필원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1973년에 세로쓰기 형태로 나온 제3판을 저본으로 삼고 가장 최근에 나온 세계사 간행 개정판 9쇄(2014년 3월)를 참조하여 원문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수많은 오류와 누락 부분을 바로잡은 전면 개정판을 펴내게 되었다.

▶ 숱한 오류의 교정과 장정 지도 ? 컬러도판 ? 주요 인물소개 등 풍부한 부속자료 보강

전면 개정판 『돌베개』는 이전 판본들과 몇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우선 초판과 세계사판을 막론하고 저자의 착오나 당시 식자植字의 오류 등으로 짐작되는 다수의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그중 상당 부분이 한자의 오류인데 대표적으로 ‘중앙저비은행권’을 들 수 있다.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은 일본이 국민당의 화폐에 대응한 새로운 화폐가 필요해서 만든 은행인데 원문에는 ‘중국주비은행권’中國壽備銀行券[중국수비은행권]으로, 세계사 판본에는 ‘중국수비은행권’中國籌備銀行券[중국주비은행권]으로 각각 한글과 한자가 다르게 나와 있으나 ‘儲’[저]의 중국어 발음이 [ch?]인 데서 생긴 착오임을 중국 측 전문가를 통해 확인, 수정했다.
또한 원문에는 김준엽의 일군 탈출 시기가 장준하 일행보다 ‘5개월’ 앞섰다고 되어 있으나 김준엽은 3월 29일, 장준하는 7월 7일에 탈출했으므로 김준엽의 『장정』을 비롯한 대개의 관련 자료에 따라 ‘3개월’로 수정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한자 오류로 ‘감협령변구’甘陜寧邊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자 ‘섬’陝과 ‘협’陜이 매우 비슷하게 생겨서 흔히 일어나는 착오다(보통 ‘섬감령변구’로 불리는 ‘감섬령변구’는 산시성 북부와 간쑤성, 닝샤성 동부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 중 각각 ‘광유’廣有와 ‘철교’撤橋로 잘못 기재된 한자를 ‘응유’應有(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뜻)와 ‘적교’敵僑(국내 잔존 일본인)로 바로잡았으며, 그 밖에도 용해선龍海線→롱해선?海線, 청감靑鑑→청람淸覽, 롱윈籠雲→龍雲, 나일환→나월환, 조경환→조경한, 한성수韓性洙→韓聖洙, 고이소小機→小磯 등의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나아가 원문에는 실려 있으나 세계사 판본에는 누락되었거나 맥락과 다른 단어가 쓰인 순우리말을 원문대로 살리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에는 편집자 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대표적으로 ‘스스럼히’(320쪽, 325쪽 참조)와 ‘거무푸레하다’(346쪽 참조) 같은 단어를 들 수 있다(그 외의 수정사항은 8쪽에 실린 상세한 일러두기를 참조).
그 밖에 장준하기념사업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6천 리 장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세 지도와 이전 판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던 다양한 컬러도판들, 주요 등장인물 소개 등을 보강한 새 개정판 『돌베개』는 향후 명실상부한 정본으로 자리 잡으리라 기대한다.

▶ ‘돌베개’와 함께한 6천 리 대장정 그리고 임시정부

- ‘돌베개’의 유래
‘돌베개’는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준하가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군을 탈출할 경우 아내에게 남기기로 한 암호였다. 장준하는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 시작하는 편지 말미에 “앞으로 베어야 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줄 것이다”라는 다짐을 써서 보낸 후 일군에서 탈출한다. 탈출병을 거의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 일군 탈출
마침 ‘지나사변’(일본인들이 ‘중일전쟁’을 부르는 표현) 7주년 기념 회식이 떠들썩하게 치러져 온 부대원이 만취된 상태에서 점호조차도 간단히 끝난 상황. 이를 놓치지 않고 목욕을 가는 것처럼 행장을 꾸며 부대 철조망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 일행은 이후 나침반과 성냥, 약간의 쌀에 의지해 무조건 동북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앞을 가로막는 운하, 죽을 것 같은 갈증과 배고픔 등을 이겨내며 150~160여 리는 벗어났으려니 했을 때 만난 중국 농민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기력은 회복할 수 있었지만 부대에서 고작 15리밖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일군에서 벌써 중국 농민들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다시 죽을힘을 다해 달리지만 또다시 나타난 강물 앞에서 진퇴유곡에 빠진다. 천우신조로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하여 가까스로 강을 건넜으나 김영록 동지는 낙오되고 만다. 모든 걸 체념한 상태에서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에 발견되면서 이들의 탈출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그 유격대 사령부에서 쓰카다 부대 제1호 탈출병인 김준엽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김영록 동지 또한 뒤늦게 중국군에 구출되어 일행은 모두 다섯으로 늘어난다.
이러는 와중에 자못 감탄스러운 일화도 있었다. 바로 중국 중앙군 23종대縱帶 사령관 한즈룽韓治隆과 관련된 실화다.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대에 구출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일군 사령관과 한즈룽 사령관 사이에 2인 담판이 벌어졌는데, 이때 일군 사령관이 한국인 탈출병 5인과 중국인 30명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당시 통역은 김준엽이 맡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령관이 이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 그러고는 일군의 허를 찌르듯 야음을 틈타 부대 이동을 단행한 것이다. 이후 장준하는 한 사령관을 이국의 은인으로 여기며 사표師表로 삼기도 했다.

-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의 3개월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이들 다섯 명은 이후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6천 리의 대장정에 오른다. 변변한 신발이나 복장도 갖추지 못한 채 오로지 걸어야 산다는 것과 기필코 임시정부에 도착해서 우리의 지도자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열의 하나만으로 이겨낸 대장정.
장제스 휘하 중앙군의 도움을 받아 린촨에 있는 한국광복군훈련반에 합류하게 된 일행은 이미 집결해 있던 한국 청년 80여 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3개월간 광복군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중국 중앙군관학교 부설인 만큼 중국 군인들의 제대로 된 훈련과는 달리 목총 한 자루도 없는 형편이어서 일행은 큰 자괴감에 시달린다.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는 지루함과 괴로움을 떨쳐버리려 하루 두 가지씩의 강좌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여러 강좌가 대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자 그 소중한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기로 하고 그 제호를 ‘등불’로 정한다. 이때부터 장준하와 잡지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취사 책임까지 떠맡게 된 장준하는 ‘크리스천’으로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중국 농민들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캐오는 ‘야간 침투작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술, 담배조차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어린 시절에는 길에 떨어진 돈조차도 줍지 못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고뇌를 안고 배곯는 동지들 앞에서 ‘책임 완수’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은 장준하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

- 충칭 임시정부를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