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10월 항쟁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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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0월 항쟁, 그 잊지 못할 항거와 희생
1946년 10월 1일 정오경 대구역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튿날 10월 2일에 죽은 한 사람의 시신을 싣고 학생과 시민들이 대구 도심 전역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해방된 새 나라를 건설하자”, “친일 경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또 다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총을 맞고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10ㆍ1폭동’, ‘대구 10월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10월 항쟁』의 저자 김상숙은 ‘10월 사건(폭동, 소요)’이 아닌 민중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10월 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제주도의 4ㆍ3항쟁이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공식 인정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데 비해, 대구ㆍ경북 지역의 10월 항쟁은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중에 살아 있다.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2016년 10월 1일은 항쟁 70주년이다.
저자

김상숙

저자김상숙은1980년대대구의사회운동단체에서일했다.노동운동관련연구를하다가2007년에‘1980년대대구지역여성노동운동사’를주제로논문을써서경북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2007년부터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사건을조사하고희생자들의명예회복을위한일을했다.고려대학교연구교수로근무했으며,지금은고려대학교와단국대학교에서사회학과목을강의하고한국현대사와사회운동관련연구를하고있다.국사편찬위원회,5·18기념재단,김근태기념치유센터등여러기관의구술조사사업에참여하면서현장에서지역민들을만나과거사의기억을되살리고,국가폭력피해자의목소리를들으며한국현대사속에서사라지고숨겨진이야기를복원하여사회적치유의영역으로확장하는일에주력하고있다.주요논문으로「농민항쟁의측면에서본1946년10월사건」,「1948~1949년지역내전과마을청년들의경험」,「가톨릭노동운동의재평가를통한현노동운동의대안모색」등이있다.

목차

목차
책을펴내며.낮은목소리의이야기를따라
서장.10월항쟁은무엇이었는가
1부.10월항쟁
1장.건국의푸른꿈
1.건국운동의열기
해방직후건국운동의조직|노동자의조직과정|학생운동과청년운동의활기|빈민조직의부재|정당과통일전선조직|경북정치학교,건국의푸른꿈과지역운동의도전|농촌조직의영향력과폐쇄성
2.되풀이되는식민지의악몽
점령군의등장,친일파의귀환|지방보수세력의형성|식량난과사회·경제적불안정성|대중투쟁의폭발|좌우합작과대구공동위원회|미군정의탄압과9월총파업
3.혼돈속의건국운동과항쟁전야
2장.대구,10월항쟁의서막
1.대구역광장시위와경찰의발포
10월1일:노동자·시민이연대한시위그리고경찰의발포|10월2일:시위의전개와경찰의발포시점|10월1일경찰발포피살자는누구인가|10월2일경찰발포피살자의신원추정
2.청년·학생연합시위와시민항쟁
시신시위의조직과청년·학생연합시위의지도부|시위의실질적지도부는누구였는가|10월2일오전:청년·학생연합시위,시민항쟁으로의전환|10월2일오후:지도부없는기층민중의봉기,사회적트라우마의폭발|10월2일조선공산당중앙조직의반응
3.시민항쟁으로서의대구항쟁의의의와한계
3장.농촌으로간10월항쟁
1.경북전역으로번지는항쟁
제2의3·1운동|항쟁의지역별양상과전개과정
2.농민항쟁으로서의영천항쟁
항쟁의배경과원인|영천읍,항쟁의폭발|면단위로확산되는항쟁|항쟁의전파경로|항쟁을주도한사람들은누구인가
3.항쟁의조직기반과농민항쟁의역사적계승
하층민조직:계급적동질성에의한결합|친족관계:일가주의적동질성에의한결합|마을자치조직의전통:마을공동체의동질성에의한결합|19세기농민항쟁의역사적계승
4.10월항쟁,도시에서농촌으로

2부.작은전쟁과학살
4장.삐라를뿌리는소년들
1.항쟁의진압과민간인학살
2.항쟁이후의사회운동
남로당의결성과민전의활동|노동운동의탄압과학생운동의성장|이름도무덤도없는청년·학생운동가들|대중화하는농민운동과학생운동
3.대중운동의탄압과무장투쟁의발전
당국의탄압과통제|지방보수세력의강화|남한단독선거와단독정부반대운동|무장투쟁의발전,야산대에서유격대로
4.대중운동의재편과좌우의분열
5장.산으로간청년들과작은전쟁
1.대중운동에서무장투쟁으로
대구제6연대사건과유격대의형성|군경의빨치산토벌|1949년대구지역의투쟁활동|1949년무장투쟁기의남로당
2.빨치산과군경사이에서
산사람과들군|빨치산의생활과활동|낮에는군경이밤에는빨치산이
3.빨치산에대한기억과집단적트라우마
‘빨갱이고수’와‘지방빨갱이’|똑똑하고말잘하고잘생긴|우익이좋은동,좌익이좋은동,알아야뭘하지요
4.반공의사회심리와냉전통치성
6장.학살과통제
1.민간인학살과체제통제
정부수립기대구지역의민간인학살|정부수립기경북지역의민간인학살:영천의사례|국민보도연맹과한국전쟁시기의민간인학살
2.기록으로본학살사건
경주·월성|경산·청도·영일|칠곡·고령·성주·군위·김천·금릉|영덕|영양·안동·영주·예천·의성·봉화·문경|학살의유형
3.피학살자들은누구인가
얼마나많은민간인이학살되었나|언제,어떤지역에서학살되었나|피학살자의사회인구학적구성
4.학살,진보의절멸과국가권력의토대강화
에필로그:10월항쟁의유산그리고남겨진이야기
1.10월항쟁,미완의시민혁명
노동자·시민이연대한대중운동이자사회운동|항쟁지도부와조직역량의부족|전통적농민항쟁의전승이자현대민중항쟁의원형
2.남겨진이야기:전쟁후의또다른전쟁
아홉살‘이쁜이’는왜‘10·1폭동처형자’로기록되었나|학살후홀로된여성들|70년간의기다림
미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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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출판사서평
현대민중항쟁의원형을찾아서
한국현대사의잃어버린페이지
그러나잊지못할항거와희생,그이름없는임들의이야기
김상숙의『10월항쟁』은1946년10월항쟁에서한국전쟁에이르는기간의대구·경북일대의사회운동과학살의역사를가장종합적이고체계적으로다룬책이다.해방직후일회적사건으로알려진10월항쟁이실제로는경북지역,아니미군정하의남한전역에서진보세력주도로일어난건국운동이자시민항쟁이었다는것이다.그리고이것이경찰과군인이자행한학살사건으로전개되는과정까지살핀다...
현대민중항쟁의원형을찾아서
한국현대사의잃어버린페이지
그러나잊지못할항거와희생,그이름없는임들의이야기
김상숙의『10월항쟁』은1946년10월항쟁에서한국전쟁에이르는기간의대구·경북일대의사회운동과학살의역사를가장종합적이고체계적으로다룬책이다.해방직후일회적사건으로알려진10월항쟁이실제로는경북지역,아니미군정하의남한전역에서진보세력주도로일어난건국운동이자시민항쟁이었다는것이다.그리고이것이경찰과군인이자행한학살사건으로전개되는과정까지살핀다는점에서이책은한국현대사의공백을채워주는중요한연구다.―김동춘(성공회대엔지오대학원장,다른백년연구원장)
1946년10월1일정오경대구역광장에서총소리가울려퍼졌다.노동자와학생,시민들이뿔뿔이흩어지는가운데노동자두사람이총에맞아쓰러졌다.이튿날10월2일에죽은한사람(김용태,27세,역수)의시신을싣고(시신시위)학생과시민들이대구도심전역에서“배고파못살겠다,쌀을달라”,“해방된새나라를건설하자”,“친일경찰은물러가라”고구호를외쳤다.경찰은또다시시민들에게총을겨누었고,어린학생들과시민들이총을맞고여기저기서쓰러졌다.‘10ㆍ1폭동’,‘대구10월사건’으로알려진‘10월항쟁’의서막이었다.
폭동인가,항쟁인가―사건을둘러싼역사의왜곡과진실
저자김상숙은‘10월사건(폭동,소요)’이아닌민중항쟁으로서의의의를부여하고자‘10월항쟁’으로부르자고제안한다.심지어‘10ㆍ1폭동’이라는명칭에는소수의‘좌익분자’들이일으킨소요로서‘사건’을폄하하고자하는의도가개입되어있다는것이다.당시미군정과경찰이‘폭동’또는‘소요’라고규정하고반공이국가의공식이데올로기가되면서항쟁은오랜시간그렇게인식되었다.
제주도의4ㆍ3항쟁이국가가저지른민간인학살사건으로공식인정되고희생자들의명예회복이이루어진데비해,대구ㆍ경북지역의10월항쟁은학계에서도본격적인조명을받지못했다.한국전쟁전후사를연구한미국의저명한역사학자브루스커밍스는『한국전쟁의기원』TheOriginsoftheKoreanWar에서‘추수봉기’라고하여미군정경제정책의실패로일어난농민봉기로서의미를부여했으며,국내학계에서는80년대후반민주화의조류속에서사회과학자정해구가전민적규모의‘인민항쟁’으로서적극적의미부여를시도한바있다.
10월항쟁이민중항쟁또는시민항쟁으로서평가받지못한가장큰이유는,시위를주도했다고알려진조선공산당(조공)과이후무장투쟁을이끈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반공국가가되는한국사회에서금기시되며항쟁자체가‘좌익’의권력투쟁이나반란으로오인되었다는데있다.미군정이공산당활동을금지하면서좌익을포함한범진보세력은지하에서암약할수밖에없었고,항쟁이후상당수청년들은산으로들어가무장투쟁의일원인‘빨치산’이되었다.조정래의『태백산맥』을통해널리알려지게된빨치산은군경의전면적토벌로인해진압되었고,이진압은빨치산뿐아니라민간인에대한대대적학살로귀결되었다.대구ㆍ경북지역에서한국전쟁직후에학살된민간인의수가1만5천명에이른다고저자김상숙은기록을바탕으로추정한다.이는당시경북인구의0.5퍼센트에이르는수치다.그리고좌파를포함하여건준(건국준비위원회),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등좌우합작을시도했던인사들과항일운동가출신의사회운동가들은10월항쟁이후타의에의해국민보도연맹에가입했다가한국전쟁발발직후에학살되었다.대구ㆍ경북지역의민간인학살은대부분직간접적으로10월항쟁에뿌리를두고있다고한다.해방정국에서대중운동및사회운동을주도한한세대가사실상이때절멸을면치못했는데,이는한때한국진보운동의성지로불렸던대구지역이강경보수화되는역사적기원이되었다고저자는해석한다.“골로간다”(골짜기로끌려가죽임을당한다)는말이이역사를간신히증거하고있다.
좌익전위엘리트가선도한‘소요’가아닌,노동자ㆍ학생ㆍ기층민중이참여한시민항쟁
1946년10월1일대구철도노조를비롯한노동조합의시위는통설대로조선공산당중앙조직(가령박헌영의지시)이기획한것이었을까.
미군정이공산당활동을금지하자조선공산당은미군정과의협상노선에서투쟁노선으로선회한다.그런데대구지역의노동조합은지역에서자주적으로만들어졌으며정당조직도중앙과위계적관계에있지않았다는것이저자김상숙의판단이다.이미식민지시대부터항일운동과대중운동의경험이있었던인사들이조선공산당이나조선인민당,민전등의단체에두루참여하고있었으며,좌우익인사들은항일운동을함께했기때문에이념적차이에도불구하고서로충돌하지않았다.오히려대구공동위원회를통해좌우합작을모색했으며,새로운나라를건설하는데힘을모았다.즉그들이이당시한일은건국운동의일환이었지,미군정과경찰의공식발표처럼‘반란’이나‘소요’를일으키는데있지않았다.
저자는대구항쟁이좌절하게된한원인으로지도부와조직역량의부족을든다.가령시위대대표단으로경찰서장과면담을한조선공산당과민전간부들은경찰의발포중지요구와사태수습을위해노력했지시위를주도하지는않았다는것이저자의분석이다.대구항쟁의주요한축으로서대구사범대학과대구의대학생들,그리고시내중학생들(오늘날의중고등학생)을이끌었던대구의대학생최무학(학생자치회회장)이학생시위를기획하고주도했을뿐,항쟁의공식지도부는뚜렷하게보이지않는다는것이다.당시경찰이‘좌익’계열의지도부가시위를선동하여폭동이일어났다고발표한것은미군정이공산당을탄압하고있었던정황과궤를같이하는것이다.
10월1일과2일있었던시민의시위에는1946년내내지속되었던기아빈민시위가항쟁의또다른축을형성하고있었다.말그대로아사직전에있던기아빈민들이미군정을상대로“쌀을달라”는구호를외치며생존투쟁을벌였다.이책은10월항쟁이좌익전위엘리트가선도한‘소요’와‘반란’이아니라노동자,학생들과더불어기층민중이전면에나선시민항쟁이었음을90년대이후공개된미군문서와항쟁참여자및목격자의증언구술을통해새롭게입증하고있다.
항쟁의배경―항쟁은왜일어났는가
해방이후새나라를만들고자하는건국운동이각계각층에서활발하게벌어지고있었다.항일운동을했던좌우파사회운동가들의주도하에다양한건국운동및정당조직이만들어졌다.해방공간에서는좌파와우파,좌우합작노선세력이공존하며경합하고있었다.처음에는미군정과도협상노선을견지하면서인민위원회가전국에서스스로조직되는등온나라가건국의열망으로가득했다.혼돈의시기였지만그만큼가능성으로충만한공간이었다.그러나미군정은남한을통치하는데식민지시대일본에부역했던경찰과관료들을다시금불러들여중용한다.미군정하의친일경찰은해방공간의질서를유지한다는명목으로식민지시대의통치방식을답습하여사회를통제했다.당시미군의한보고서는10월항쟁의원인을경찰의횡포로보기도했다.해방된나라를꿈꾸었던사람들에게친일경찰의재등장은일제식민지의사회적트라우마를환기하는악몽이었다.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