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 조희룡 (19세기 묵장의 영수)

우봉 조희룡 (19세기 묵장의 영수)

$32.10
Description
『우봉 조희룡』은 뛰어난 문장가이자 전문 예술가의 삶을 살다간 우봉 조희룡(1789~1866)의 독특한 생애와 예술세계를 소개한다. 19세기라는 변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인 예술가의 모델을 창시한 선구적 개인으로서 조희룡을 재조명한다.
저자

이선옥

저자 이선옥은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로 석사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회화사에 관심을 갖고 사군자화를 비롯한 문인들의 그림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대우재단 연구원을 지냈으며, 아주대, 명지대 등 여러 대학 강사를 거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 호남 서화 연구에 매진하면서, 전남 국제수묵 프레비엔날레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사군자,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돌베개, 2011), ?선비의 벗 사군자?(보림출판사, 2005), 『한국의 미술가』(공저, 사회평론, 2006) 등이 있다.

목차

새 시대를 개척한 예술혼|저자의 말
The Artistic Soul Pioneers a New Generation|Preface

1부 조희룡의 삶

1 조희룡의 시대, 19세기
변화와 역동의 시대를 살다|동요하는 신분제, 떠오르는 중인계급|청나라 학문과 문물의 수용|서화계에 분 새로운 바람
2 여항문인이자 전문 예술가
명문가의 후손, 그러나 여항인|물가에 살며 뱃놀이를 즐기다|자호字號에 담긴 삶과 철학|당호堂號와 인장印章에 새긴 서화예술의 지향점|장수의 비결은 매화와 난|붉은 난이 뜰에 가득한 꿈|서화와 골동을 수집하는 취미|명산대천에서 문필의 기氣를 구하다|헌종 임금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다
3 유배, 일생의 가장 큰 시련
김정희의 복심腹心으로 임자도에 유배되다|고뇌와 적막함의 나날들|임자도의 삼절을 즐기다|제자들과 나눈 각별한 정|운하雲霞와 같이 찬란한 괴석에 빠지다|자화상으로 나를 대신하오
4 문文과 예藝로써 사귄 이들
청년 시절의 벗들|평생의 지기, 벽오사 동인들|소치 허련과 밤새 그림을 논하다|고람 전기, 나이를 뛰어넘은 망년지교忘年之交|당대 문인사대부들과의 사귐
5 먹을 다루는 세계의 우두머리
추사의 제자로 수련하다|우봉, 추사와 쌍벽으로 나아가다

2부 조희룡의 예술

1 화단畵壇을 물들인 매화
매화벽梅花癖, 매화를 향한 지극한 사랑|조희룡만의 매화가 탄생하기까지|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다|단 두 번의 붓질로 살아 움직이다|신선의 단약을 삼키고 피어난 꽃, 홍매|여러 폭 병풍에 펼쳐진 기굴한 홍매화
2 먹을 흩뿌려 풀처럼 자유로운 난
난을 칠 때는 글씨 쓰듯이 하라|천하의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자|기쁜 듯 난을 그리다|흙 기운이 깊어 아름다운 난
3 분방하고 기세당당한 대나무
성난 기운으로 묵죽을 그리다|빈 산의 만 그루 대나무가 모두 나의 스승이니|8구름 위로 치솟는 듯한 필치로 그리다|먹으로 그린 가을 색
4 은일隱逸의 이상을 추구한 산수
산수화를 읽는 것은 산수를 보는 것과 같은 경지다|나는 법이 아닌 가슴속의 뜻을 그린다|종횡으로 붓을 휘둘러 외로움을 쏟아내다|서옥의 주인처럼 살고 싶다|눈 같은 꽃향기의 바다에 빠지다
5 추하고 괴이하게 그린 돌
괴석의 기이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묵점을 흩뿌려 흉억胸臆을 그려내다|고목과 죽석으로 수壽를 기원하다|장수를 기원하는 나비
6 조희룡 회화미의 양면성
담淡의 미감|격동激動의 미감

3부 조희룡의 글과 생각

1 그림에 대한 생각과 기록
화가와 화적畵籍에 대한 인식|그림의 가치는 뜻을 기탁하는 데 있다|시·문·서·화는 이치가 하나이다|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수예론手藝論, 재능은 손끝에 있다|그림 재능은 천예天倪에 따른다|나는 누구에게도 속한 바 없다|명성에 매달리지 말고 조예造詣를 보라
2 조희룡이 남긴 시문詩文
살아온 길을 기록한 시詩와 문文|벽오사 동인들과의 모임을 기록하다|중인들의 전기, 『호산외기』|『일석산방소고』와 『화구암난묵』|『한와헌제화잡존』과 『우해악암고』|『수경재해외적독』과 회인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넘쳤던, 근대적 시각의 여항문인화가
- 조희룡 연구와 평가

부록

출판사 서평

매화 화가이자 ‘19세기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불린 조희룡
조선 회화의 근대를 연 자유와 격정激情의 예술세계

19세기 여항문화계의 리더,
조희룡의 삶과 작품 그리고 문학세계

이 책은 뛰어난 문장가이자 전문 예술가의 삶을 살다간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독특한 생애와 예술세계를 소개한다. 19세기라는 변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인 예술가의 모델을 창시한 선구적 개인으로서 조희룡을 재조명한다. 그는 19세기 중인들의 전기집(『호산외기壺山外記』)을 최초로 엮어냄으로써 여항인으로서의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드러냈으며, 다수의 시와 문장을 통해 내면세계를 가감 없이 표출하였고, ‘수예론手藝論’ 등 기존에 없던 독보적인 서화관을 선보였다. 서화가로서 그는 사군자와 괴석 그림에 특히 능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매화 화가’로 불릴 만큼 매화를 좋아하고 잘 그렸으며, 파격적인 매화 그림으로 당대를 풍미함은 물론 매화 그림의 역사를 새로 썼다.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김정희의 복심腹心으로 억울한 유배를 다녀오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김정희의 복고적이고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성향과 대비되는 매우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관으로 중인층의 문예계를 주도했다. 19세기 문예계에서 그의 영향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으로,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인명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쓴 오세창吳世昌은 그를 “묵장의 영수” 즉 “먹을 다루는 세계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19세기를 선도한 문인 예술가로서 우리가 조희룡을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그림의 독창성’과 ‘화가의 개성’을 중시하고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넘쳤던, 최초의 근대적 시각의 전문 예술가였다는 점이다.

조희룡이 매화 화가라면 이 책을 쓴 저자 이선옥은 매화 그림 전문가다. 「조선시대 매화도 연구」(2004)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돌베개 테마한국문화사 시리즈 중 하나로 매화를 포함한 사군자를 다룬 『사군자,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2011)을 펴낸 바 있다. 또한 오랫동안 호남 지역에 머물며 그 지역의 예술에 집중했던 그는 전남 신안 임자도에 유배되었던 조희룡에게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문인 예술가로서 조희룡에 대한 연구와 인식은 그간 김정희라는 한계, 조희룡이 가졌던 신분의 한계, 일제강점기라는 문화 단절이 가져온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이 책은 1980~1990년대 중인문학과 조희룡 회화에 대한 연구, 1999년 번역 출간된 조희룡 전집 등의 성과 위에 매화, 사군자 그림, 조희룡, 남도 예술에 천착했던 필자의 오랜 연구 성과가 집적되어 이루어졌다. 조희룡을 좀 더 깊이, 좀 더 종합적으로 들여다본 이 책을 통해, 19세기 서화계를 이끌었으며 자유와 파격의 새로운 회화세계를 이룩한 근대회화의 개조開祖 조희룡에 대한 진정한 다시 보기와 바로 보기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들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펄펄 나는 듯하다 - 우봉 조희룡

조선의 19세기는 문예 부흥기라 불리는 18세기와 서구 문물이 들어오고 일제에 의한 식민지를 경험한 20세기 초 사이에서 강한 변화의 회오리가 몰아친 시기였다. 조선 사회의 근간이었던 엄격한 신분제가 동요하고 청의 학문과 문물이 서학과 함께 유입됨과 동시에, 상업자본주의 발전, 상품화폐경제 확대, 소비문화 확산 등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근대적 시민사회로 옮겨가는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19세기를 살았던 조희룡은 사대부 가문 출신의 문인화가이면서 신분이 낮은 중인 계층의 여항인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함께 신분적 한계와 불평등에 따른 잠재된 내면의 울분, 60대 초반에 겪은 유배라는 사건은 그의 문학과 예술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희룡의 50대 이전 기록 즉 성장과정이나 화가로서의 입문 등 청, 장년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어려서부터 창백하고 말랐으며 키가 컸다고 한다. 그는 14세에 어떤 집안과 혼담이 오갔는데 허약하게 생겨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하여 퇴짜를 맞았다. 그때부터 그에겐 ‘장수’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이후 그는 건강을 특별히 챙겼으며 유배 간 임자도 섬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3년 간 닭을 몇 백 마리나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유배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63세 때였는데, 60대 이후의 기록에서 그는 매우 유쾌하고 활달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평생 뜻을 함께했던 지기들과의 모임인 벽오사碧梧社 모임 관련 기록에 “얼굴을 돌리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구 떠드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모임을 기록한 『오로회첩』에는 “선선하게 흥이 나서 한 폭을 펼쳐 난을 그리고 시를 쓰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연지빛 홍매화를 그리며 도교의 불사약不死藥을 뜻하는 단약丹藥과 연결시키고, 매화 한 송이 한 송이를 부처의 현신이라 했던 그의 작품에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말년에 그는 날마다 향을 피우고 『유마경』을 외우며 마치 불가에서 수행하는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와 절친했던 벗 나기羅岐는 노년의 그의 모습을 “늙을수록 더욱 건강한 조단로趙丹老는 마치 들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펄펄 나는 듯하다.”고도 하였다. 유배라는 굴곡을 겪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삶은 늘 새로움과 자유로움의 추구였으며 맑게 수양하고 서화를 즐기며 신선처럼 살았던 듯하다. 그는 78세로 장수하였는데, “모든 잡념을 끊고 득실을 한결같이 보고 영예와 모욕을 잊은 채, 여유 있고 한가롭게 애오라지 한 생애를 마쳤다.”고 하였다.

추사의 제자에서 당대의 쌍벽으로 - 조희룡과 김정희

조희룡은 헌종의 총애를 받아 임금으로부터 금강산 실경을 그려오라는 명을 받기도 했고, 궁궐 누각에 문향실이라는 편액을 썼으며, 매화 시를 지어 올린 적도 있다. 또한 회갑에 헌종으로부터 벼루와 책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런 왕의 총애는 헌종의 요절과 철종 즉위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의 예송 논쟁에서 김정희와 권돈인이 탄핵되자, 김정희의 복심腹心으로 지목된 조희룡도 덩달아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실록에 적힌 조희룡의 죄목에는 “장래의 화禍가 반드시 요원燎原을 이룰 것이니 어찌 미천한 기슬??(서캐와 이)의 유類라 하여 미세한 때에 방지하여 조짐을 막는 도리를 소홀히 하겠습니까?”라 한 부분이 있다. 신분제가 동요하고는 있었으나 당대 조정대신들은 조희룡과 같은 중인들을 천시했고,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날로 성장해가는 여향인의 세를 두려워하여 그 싹을 제거하려는 어떤 의도도 엿보인다.

조희룡은 당대 문예계를 주도했던 추사 김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의 예술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림을 배우던 청장년 시절에는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문인들의 미의식을 그림에 적용하였고, 중국과 빈번히 교류했던 김정희를 통해 중국의 앞선 문물과 지식, 새로운 화풍을 접할 수 있었다. 김정희의 복심으로 유배 갈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으나 이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두 사람 각각의 문집에도 의외로 상대방에 대한 언급은 미미하다. 다만 조희룡의 글을 통해 그가 젊은 날 김정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다녀 온 후에는 여항의 서화가들을 이끌고 김정희에게 나아가 서화평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몸담고 있는 신분 배경뿐 아니라 타고난 기질도 달라 예술에서 차이를 보였다. 조희룡은 김정희가 추구하는 전통적인 남종문인화의 정수를 디딤돌 삼아 자신만의 새로운 회화세계를 구축하여 추사와는 다른 길을 갔다. 조희룡은 1849년~1850년 일곱 차례에 걸쳐 화가 8인과 서예가 8인을 이끌고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서화 품평을 받았다. 1849년은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해이자, 조희룡으로서는 회갑을 맞는 해였다. 조희룡이 주도한 당시의 서화 품평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조희룡이 초기에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성장하였을지라도 김정희의 유배 기간 동안 나름대로 여항화가들의 좌장으로서 세력을 키웠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희룡이 그림을 그려 품평을 받지 않고 이들 서화가의 작품에 시를 써 격려했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 조희룡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조희룡에게 김정희는 선망과 극복이 대상이면서도 각자의 세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매화를 사랑하여 향설해香雪海에 빠지다 - 조희룡과 매화 그림

서화가로서 조희룡은 사군자와 괴석 그림을 특히 잘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매화 그림에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했던 매화 그림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스스로 매화 그림에 재력才力 즉 하늘이 내린 소질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는데, 묵죽에 재력이 있는 청대 화가 정섭鄭燮의 법을 배우기 쉽지 않듯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겠다고 하였다. 조희룡의 독보적인 매화도 형식 가운데 하나는 세로로 긴 화폭에 굵고 거친 줄기가 마치 용이 승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힘차고 강렬한 매화 그림이다. 그는 이런 형식의 매화도에 실제로 용 그리는 법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매화를 그리는데 얽히고 모인 가지와 만 가지 꽃의 향배 정할 곳에 이르면,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서 크게 기굴(奇?)한 변화가 있게 한다. 용 그리는 법을 매화 그림에 도입했으니, 그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은하수를 보는 듯 막연하여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희룡은 또한 홍매를 즐겨 그렸다. 단지 붉은 안료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가지마다 만발한 붉은 꽃을 그려 화려한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홍매는 조희룡 매화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에는 거의 없었던 19세기 매화 화풍의 가장 큰 변화이다. 그의 홍매에는 앞서 말했듯 도교, 불교적 사상과 함께 특히 소외되었던 일반 대중들을 위로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