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대한 소설 속에 살고 있다.’
병리학적인 현대 문명의 예언자
문체와 형식의 우아한 선지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1930~2009)
《타임스》 선정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그리고 카프카Kafkaesque나 보르헤스Borgesian처럼 성姓의 형용사형만으로 설명 가능한 몇 안 되는 문인 중 한 명인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대표 단편소설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다섯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사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적이고 예언적인 목소리로 여겨지는 그는 1960년대 SF 뉴웨이브 운동을 견인하며 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함으로써 현대문학을 재정의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고도의 상징성과 시각 이미지를 다용한, 디스토피아적인 예지로 가득 찬 전인미답의 전위적인 작품들은 ‘현대’에 대한 세계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는 『J. G. 밸러드 단편소설 전집THE COMPLETE SHORT STORIES of J. G. Ballard』(2014, 포스에스테이트)에서 옮긴이가 가려 뽑은 스물다섯 편을 실었으며, 평론가 애덤 서웰의 「해제」가 밸러드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밸러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 중화민국 상하이 조계租界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종전 후 영국으로 송환된다. 대학에서 의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그는 인생의 전반前半을 비/초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극한상황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치외법권에서 보낸 유복한 유년기, 전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했던 수용소에서의 사춘기, 활자로만 접했던 모국에의 첫 방문에서 받은 문화 충격과 ‘잿빛의 춥고 흐린’ 전후戰後 영국에서의 청년기, 비행 훈련, 고속도로로 둘러싸이고 히스로 공항의 끊임없는 확장으로 타격을 받은 런던 교외에서의 생활, 아내의 비극적인 요절 등은 그의 존재 깊숙이 시간과 공간의 교란된 감각, 강박과 불안이라는 상흔을 남겼다. 개인과 사회의 무수한 파국을 마주하며 밸러드는 ‘소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므로 작가의 임무란 리얼리티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어떤 작가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삶의 극단을 묘사했고 모순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의 인간 존재 방식을 표현하려 했다. 그의 트라우마는 이미지의 반복으로 나타났는데 저공비행 항공기, 박살 난 자동차, 물 빠진 수영장, 버려진 호텔, 황량한 해변, 악취가 진동하는 강과 석호, 감정을 잃은 반쯤 미친 주인공 등 동일한 모티브가 다른 외피를 입고 변주된다.
그는 현대 문명의 병리학적인 잔혹상―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으로 인한 생활의 통제, 음모론이 판치는 정부 간 이데올로기 담론, 과학기술의 비인간화 등을 동일한 폭력의 다른 형태로 간주하고,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같은 강렬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냉정하며 분석적인 시선으로 묘사했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세계는 마치 ‘오브제’처럼 독특한 비유를 사용한 문체로 그려지고 주인공은 그 세계를 흘러가며 주체적인 판단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유일하게 진정한 외계 행성은 지구’라고 이야기해 왔던 그는 외부 환경과 인간의 내면에 펼쳐지는 의식/무의식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SF의 우주 개념을 ‘내우주inner space’로 전환시킴으로써 문학성을 꾀했다. 이와 같은 밸러드만의 문학적 특수성은 형용사 ‘밸러드풍Ballardian’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사전에 등재되었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다. 『영국인명사전』 항목에는 밸러드의 작품에 대해 ‘에로스, 타나토스, 대중매체와 신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내게 단편소설은 항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순간을 포착해 내고, 단 한 가지의 주제를 맹렬히 파고들 수 있게 해 주는 특성도 마음에 들고, 이후에 장편으로 발전하게 될 아이디어를 시험해 보기에도 적합하다. 내가 쓴 모든 장편소설은 단편소설에서 시작되었다. […]
_「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후기」에서
백과사전 외판원, 코번트가든 짐꾼, 과학 잡지의 편집자와 필자로 일하다가 1956년 첫 단편소설을 선보인 이후로 50년간 발표한 모든 단편소설 중에서 스물다섯 편을 엄선한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는 상상으로 충만하고 환상으로 가득한 밸러드의 걸작 단편소설을 연대순으로 접할 수 있어 그의 궤적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장편소설로 진전되는 주제와 강박관념을 창안하고 발전시켰던 단편소설은 그의 전 작품 세계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대개 밸러드의 단편소설은 시선을 사로잡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초밀집 도시(「빌레니엄」), 에네웨타크의 버려진 벙커(「종막의 해안」), 꿈과 광기와 권태가 지배하는 휴양지 버멀리언샌즈(「스타스 가, 5번 스튜디오」「스텔라비스타의 천 가지 꿈」) 등과 같이 곧바로 독자를 어떤 환각적인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결국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현현顯現으로 막을 내린다.
밸러드의 초기 단편은 각각이 짧은 세 시기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우선 자연의 성질이 끔찍한 변화를 겪고 묘하게 과학기술과 유사한 형상을 가지는, SF 시기라고 부를 만한 연대가 존재한다. 두 번째 연대에 들어서면 밸러드는 시간과 공간에 손을 대며, 존재의 깊숙한 본질까지 파고들어 변조를 시작한다. 세 번째 연대에 이르면 그의 상상력은 더욱 종말론적 색채를 띠는데, 자연재해의 예언이 작품 속에 가득해진다. ‘밸러드풍’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예언적 디스토피아의 화풍이 완성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들어서이며, 이 단편들은 초현실적이고 대단히 함축적이다. 이들의 중심 주제는 어디까지나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며, 주인공 또는 화자는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해악을 시연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종막의 해안」(1964)에 이르러 비로소 작품은 기존의 틀을 벗어던지는데, 그의 디스토피아는 더 이상 미래라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오가고, 독백과 대화의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서술 방식이 그 뒤를 받쳐 준다. 예언적 현재가 미래를 대체하고, 문체와 형식이 개념을 따라잡으며, 이후 작품들에서 펼쳐질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밸러드의 후기 단편에서 디스토피아는 부차적인 주제가 된다. 이제 전산화된 경제, 테러, 독재정치, 시시한 외설물 등 현대적인 분위기의 무대에서 우주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다양한 장르와 서술 방식을 넘나들면서 현실의 모순을 직접 묘사하고 재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속에 보이는 일부 작품들에서 디스토피아는 개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세계는 담담하게 파국을 향해 나아갈 뿐, 그 원인은 피상적으로만 제공되거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고통은 현실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의 내면에만 존재하며,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조차 빈 수영장의 표의문자처럼 피상적인 존재로만 묘사되기에 이른다. 밸러드풍 디스토피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두 단편 「우주 시대의 기억」(1982)과 「근미래의 전설」(1982)에서, 디스토피아를 구성하는 요소는 전 지구적 규모의 신경증이나 다름없다. 밸러드의 단편에서 가장 긴 연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들, 모텔과 우주여행과 암살 시도로 가득한, 무너져 가는 세계의 휘황찬란한 풍경이었다.
[…] 그의 무대 창조 능력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생태 구역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가 총체적 의도, 총체적 인물을 다루는 이유는 20세기의 존재 방식이 개인을 보다 거대한 환경의 일부로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스며들어 오는 광고와 증권 거래와 전산화된 현실 역시 그렇다. 그는 우리 시대의 삶의 구획을, 거대한 교외 지역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공간을, 제방과 공터를 훌륭하게 묘사한다. 이런 관념적인 일상, 특정성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야말로 밸러드가 선호하는 지형이다. 이는 작은 야자수가 솟아 있는 콘크리트 해변일 수도, 다른 행성일 수도, 미래의 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실험실일 수도 있다.
_「해제」에서
기묘할 정도로 형식에 집착하는 산문을 통해, 밸러드는 모든 고전적 형식이 없어진 세계에서 인물이 어떤 모습을 취하게 될지를 묘사한다. 기존 소설의 근원은 고립된 인물과 그 인물이 보이는 여러 관례 및 자아의 모습에 있지만, 밸러드 작품의 경우에는 중심인물이 훨씬 큰 존재로, 불가해하며 그간 무시되어 온 사회와 환경의 강압 그 자체로 드러난다.
당시의 독자들에게 밸러드가 발표하는 모든 작품은 새로웠다. 그는 「잠재의식 인간」(광고)과 「감시탑」(감시하는 국가) 등에서처럼 단편소설에서 다가올 미래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자신은 ‘SF에서 선호하는 만들어진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진짜 미래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라고, 미래 발전을 예측한 게 아니라 그 주변의 세계에 대하여 썼다고 주장하면서 판단을 거부했지만, 현대의 삶은 놀랍고도 골치 아픈 방식으로 그의 상상과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 《가디언》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 남자는 떠났지만, 그의 이상한 세계는 남아 있다.’
‘나는 나의 작품을 경고로 본다.
나는 길옆에 서서 “속도를 줄여!”라고 외치는 바로 그 남자다.’
ㆍ어마어마한 창의력의 작가. 밸러드는 칼비노처럼 현대의 삶의 공허하고 박탈당한 공간을 상상의 보이지 않는 도시와 경이로운 세계로 채우는 놀라운 재능을 가졌다. _맬컴 브래드버리(작가ㆍ문예평론가)
ㆍ영국이 배출한 진정한 초현실주의 작가. 섬뜩하면서도 짜릿한 상상력의 소유자이자, 국보國寶다. _《가디언》
ㆍJ. G. 밸러드에 대해 우선 하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