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생각한다
타인의상처,타자의트라우마
나의상처,나의트라우마
“진정한애도는결코완성될수없다”,문학속에나타난죽음과애도,그리고그에대한예찬이었던『애도예찬』으로독자들의큰사랑을받았던왕은철의후속에세이『트라우마와문학,그침묵의소리들』이현대문학에서출간되었다.2015년3월호부터2016년8월호까지1년6개월에걸쳐월간『현대문학』에절찬연재됐던글들을묶은이책은인간의내면에숨겨져있던상처의흔적들이어떤형태로표출되면서삶을변화시키는지의해답을문학을통해서얻고자기획된책이다.
전작『애도예찬』을통해애도는토로하게되는순간부터―즉,언어의영역으로전환됨으로써비로소시작되는것인지도모른다고고백한필자는이번책에서도상처를돌아보고얘기를시작했다는것은더디긴하지만상처가드디어회복되기시작했다는암시일수있다며,문학의역할을다시강조하고있다.섬세한터치로써내려간두저작은죽음,상실로인한슬픔과그로인한트라우마를어떻게우리가이해하고극복할수있는가를다룬,그연장선상에서써진것으로어려움이많은이시대,우리를향한위로의책이라고할수있다.
필자는아버지의죽음과세월호의안타까운일을겪으며일종의자기치유의방식으로정신분석이나심리학이문학의많은부분을의존하고있다는점을생각하면서상처에관한글을쓰기시작했고,고전부터현대에이르기까지문학작품속드러난트라우마의양상을예리하게분석,성찰했다.
그결과,상처이전으로돌아가는것은불가능하다는결론속에상처를치유의대상으로삼지말고상처자체에의미를두고그앞에겸손해지는태도가필요하다말한다.상처는그것을겪은사람의것이지,우리가그를동정하거나그와공감한다고해서그상처가우리의것이될수는없기때문이다.그의결론은간단하다.
“학문도,예술도,문학도상처앞에서는겸손해야한다,상처는주인이다.”
고전부터현대에이르기까지문학작품으로살펴보는트라우마
『오이디푸스왕』『트로이의여인들』『데카메론』등의고전부터『헨젤과그레텔』『아낌없이주는나무』『나의라임오렌지나무』등의전세대를아우르는소설,알베르카뮈,귄터그라스,이창래,쿳시,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에이르기까지현대작가들의최근작까지망라해소개된이책을관통하는것은곧트라우마이다.
‘오이푸스의이야기’는어머니에대한사랑과아버지에대한질투의이야기가아니라자신도어쩔수없이기구한운명의회오리에휘말린어떤이가겪은트라우마와절망에관한이야기다.
「헨젤과그레텔」은계모에게버림받은남매의이야기가아니라친모에게버림받은남매의이야기였으나,가족간의행복이데올로기를무너뜨릴수있다는사회의걱정과독자들의구미에영합,개작된작품으로서원전의뜻을재해석한다.
『아낌없이주는나무』는모든것을주는희생에관한이야기이기도하지만조금만시각을달리해서보면우리가‘희생’이라는선의의이름을부여하며등한시하게되는희생하는자의고통,그런타인의트라우마에관한이야기이다.
체벌과그로인한트라우마에관한이야기로지금도많이회자되는『나의라임오렌지나무』는한아이의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가정폭력과그로인해일그러진한아이의자화상으로폭력을가시화시킨또하나의폭력을드러낸전세계적으로우리나라에만기이한열풍을일으킨소설이다.
메르스등일련의상황을통해집단공포를경험한우리의눈으로보면카뮈의『페스트』는보편적,초월적성찰로읽으면집단적위기상황에서인간이트라우마를어떻게극복하는지를보여주는일종의지침서같은소설이나,역사적,문화적,정치적배경속에보면유럽중심적인사고속에탄생한아쉬움이남는소설이다.
이언매큐언의『속죄』는트라우마가피해자들에게국한된것이아닌,가해자에게도발생할수있는것이라는사실을새삼증언하고있으며,바오닌의『전쟁의슬픔』은전쟁의트라우마를완전극복하는것은불가능하며,그극복을향해가는길에는대단한극복의지보다그저상황을아파하는슬픔,그것보다좋은것이없다는것을새롭게보여주고있다.
전범이라는이유로자신들의아픔을내보이기보다는세계에화해와용서를구하는것에매진했던독일에게도구스틀로프호참사라는아픔이있었다는사실을귄터그라스의『게걸음으로』를통해살필수있으며,실제자식을앞서보낸쿳시가쓴,자식잃은아버지의트라우마『페테르부르크의대가』를통해선지극히개인적인슬픔과상처와죄의식마저도예술의소재로써야하는작가자신의고뇌를살펴보게한다.
타자의상처를다룰때어떻게윤리성과비윤리성이동시에개입되는지를보여주는이창래의『제스처라이프』와목소리들을있는그대로제시하는증언의형태가,인간의상상력을초월하는충격적인트라우마적사건들이일어나는근대에는더적합한형태의양식이아닐까라는문제의식에서출발한알렉시예비치이‘목소리소설’은트라우마를증언하는문학의역할에대해새롭게고민하게한다.
침몰하는배에서보여준인간의이기에대해이야기하는조지프콘래드의『로드짐』은사랑하는사람의몸을찾지못해제대로된울음한번울지못하고애도를시작도못한우리의아픈세월호를떠오르게한다.
[책속으로추가]
꾸며내고극적으로만드는것이능사가아니라귀를기울여야한다는것이다.트라우마적사건앞에서한없이무력한것이문학이니까,그래도자신의존재를인정받으려면사람들의고통에귀를기울여야한다는것이다.그리고그고통에귀를기울이기위해서는한없이자신을낮춰야한다는것이다.이것이알렉시예비치의‘목소리소설’이증언하는것이다.그녀는이렇게말한다.“고통에귀를기울인다.고통은지난한삶의증거이다.다른증거따윈없다.다른증거같은건,나는믿지않는다.사람의말이얼마나우리를진실에서멀어지게했던가.”이것은말이아니라고통이먼저고,문학이아니라“비밀에대한최상의정보인고통”이먼저라는선언이다.말을앞세우면,어떤것을꾸며내는문학을앞세우면,진실에서멀어질수있다는선언이다.(pp.172-173)
총체성은그리쉽게구현되는것이아니라개개인이드러내는것을종합하고통합해야겨우근접할수있는것일지모른다.바로이것이우리가모든사람의상처를대변하지못했다고모건을탓하기보다그녀의글이드러내는개인적인상처를이해하려고노력해야하는이유이다.진실은집단의진실이기전에개인적인진실이다.(p.228)
왜인간은고백을하는것일까.아니,그보다먼저,왜과거에집착하는것일까.부끄러운기억이라면더더욱잊는것이자기에게이로운일인데,왜집착하는것일까.그이유를깨닫는것은그리어려운일이아니다.그것은누군가에게해를입힌것이상처가되어자신에게되돌아오고,그흉터가그대로남기때문이다.결국트라우마의문제다.이렇게말하면,트라우마를피해자의것으로만생각하는사람들은다소혼란스러울수있겠지만,트라우마는가해자에게도얼마든지발생할수있다.누군가에게돌이킬수없는잘못을저지른사람이이후로그것에사로잡혀자학적인삶을살아간다면,그것은모종의트라우마가발생했기때문이다.가해자도피해자와마찬가지로트라우마에시달릴수있는것이다.피해자의트라우마에는양심에거리낄게없는도덕적정당성이라는버팀목이라도있지만,가해자의트라우마는기대거나의지할것이아무것도없어더욱힘든것일지모른다.트라우마가피해자의전유물이라는생각은가해자를비난하는데급급한나머지가해자도피해자와마찬가지로상처를받을수있는인간이라는사실을간과한데서발생한다.(p.261)
『속죄』는가해자의트라우마가윤리적인행위로이어질수있다는것을감동적으로말해주는고통스러운소설이다.매큐언의소설은가해자를악으로규정하고가해자에게트라우마가존재할가능성을봉쇄하고차단하려하는이분법적사고가얼마나위험하고잘못된것인지를실감나게보여준다.어쩌면바로이것이프로이트가트라우마를얘기하면서가해자와피해자를구분하지않은이유였을것이다.그의심리이론어디를보아도트라우마가피해자의전유물이라는말은없다.누가어디에서어떻게왜입은것이든,트라우마는트라우마이고,따라서우리가보듬고다독이고이해해줘야하는대상일따름이다.(pp.280-281)
트라우마가무질서의세계라면,소설은질서의세계이다.트라우마가오직과거의어느시점,어느경험을향해줄달음질을치면서시간을파괴한다면,소설은과거와현재에질서를부여한다.(p.292)
바오닌은슬픔이“고통을극복할수있는”수단이며“행복보다고귀”하고“고상”하다고말한다.전쟁의트라우마를극복하는데있어서슬픔보다더좋은것이있을수없다는이야기다.그래서그는과거를향한끼엔의뒷걸음질을부정적인것으로보지않는다.비록그것이“희망없는정신세계가만들어낸비상식적이고폐쇄적이고비관적인상황”에서“과거를향해돌아가는”것이라해도,작가는그뒷걸음질과그것에결부된슬픔에아름다움이있다고믿는다.『전쟁의슬픔』은그래서슬픔을예찬하는소설인셈이다.(p.307)
위기의상황에서난민들에게환대의정신을보여주지못한다면,독일은더이상“나의나라가아니다”라고말하는위대한여성을총리로둔독일은이제,그들의아일란을위해울수있는자격을얻었다.그러나그들은진즉울었어야했다.온나라가울었어야했다.역사의과도한짐에밀려,고통과슬픔을억압하는것은순리가아니었다.프로이트의말처럼,억압된것은돌아오기때문이다.그라스의『게걸음으로』는억압된것이어떻게돌아오는지를생생하게보여주는,트라우마의교과서같은소설이다.(p.349)
그것은몸의상처에서마음의상처로외연을확장하더니,프로이트에이르러서는후자를의미하는것으로전용되어지금은몸의상처보다는마음의상처를의미하는쪽으로더많이사용되고있다.그러다보니트라우마는더이상몸의상처를가리키는용어가아닌것처럼느껴지고,실제로도몸의상처를트라우마로지칭하는경우가드문게현실이다.
그런데우리가트라우마와관련하여잊지말아야할것중하나는몸의상처와마음의상처를반드시분리시킬필요가없다는사실이다.몸이아프면마음도아프고,역으로마음이아프면몸도아프다.몸과마음의상관관계를보다잘이해하기위해서는트라우마가그리스어에서어원을취했으니그것의적절한예를그리스비극에서찾아보는것도괜찮을듯싶다.(p.364)
인간의역사는그래서여성의몸에대한폭력의역사,야만의역사였다.에우리피데스의비극은여성들이어떻게“예속의지붕밑으로”들어가역사와전쟁의트라우마를살아내는지를보여준다.그들에게몸과마음의구분은사실상의미가없었다.천막안에서남성들에게배분되기를기다리는여성들의몸과마음을구분하는것이무슨의미가있는가.국가도잃고부모형제도잃고자식도잃은여성들에게몸과마음은나뉠수있는것이아니었다.몸이마음이었다.몸의예속은마음의예속이었다.이런의미에서에우리피데스의비극은,몸의상처를의미하는그리스어에서유래했으면서도마음의상처만을의미하는것으로더자주사용되는‘트라우마’라는말이원래의의미로돌아가몸의상처를지칭하면서,동시에마음의상처를지칭하는것으로사용되어야한다는사실을우리에게환기시킨다.(p.384)
근대역사와사상이우리에게가르쳐준것중하나는타인의상처와아픔을얘기할때,즉그들의삶을재현할때,대단히신중해야한다는것이다.그래서타인에대해말하는것은우리의편견을벗어나그를알아가는과정이기도하다.그런데학자에따라서는타인의상처와아픔을대변하고재현하는것이아예불가능하다고보는입장도있다.“아우슈비츠이후의시는야만적이다”라는아도르노의유명한말은타인에관해얘기하고타인의고통을언어로바꾸는일이더이상가능하지않게되었다는말이다.그의말은유대인대학살처럼언어로표현될수없고,언어가감당할수없는경험을문학의소재로삼는것에따르는일종의비윤리성을경고한말이다.그렇다면문학은아우슈비츠처럼참혹한사건들과관련하여침묵해야하는것일까.언어를초월하는것이니논리적으로는,침묵하는게맞을지모른다.그런데문제는침묵하게되면그것이영원히묻혀버린다는것이다.그래서침묵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