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판결은대체뭘먹고자랐을까?
비법률가시민이들여다본법정의풍경
성폭력피해자들이마주하는고통스러운현실과,성폭력사건을다루는사법시스템의간극은이미알려져있다.변화가필요하다는데도대부분동의할것이다.문제는거기까지라는점이다.언젠가부터외부의비판은‘솜방망이’라는단어에멈춰져있다.다양한이유가있겠지만,용어부터논리까지‘전문영역’으로여겨지는사법시스템에일반인들이접근하기가쉽지않아서일것이다.
‘비법조인시민’의눈으로꼼꼼하고꾸준하게사법시스템을들여다본저자가제일먼저주목하는이들은판사다.그가보기에한국의재판부는‘재량’이많이보장되어있으며,처벌이‘솜방망이’가된원인도상당부분은여기에있다.예컨대2020년대법원은디지털성범죄에최대29년3개월까지선고할수있도록양형기준을마련했지만,판사가재량으로법정형을2분의1까지깎을수있는‘정상참작감경’제도가존재하는한엄벌이요원하다는사실을여러사례로보여준다.피해자의의사가우선적으로고려되어야할‘합의’또한,그과정에서추가가해에빈번하게일어나는데도이런문제에주의를기울이는재판부가드물고,오히려가해자가합의에실패하든성공하든실제로는양형에유리하게반영되고있는점을지적한다.
“판사는판결로말한다”라는말은흔히판사의독립과재량을강조할때사용된다.그러나저자는과연판사들스스로는이말을지키고있는지되묻는다.세계최대아동성착취사이트의운영자였던손정우에대한범죄인인도청구재판의불허사유에서볼수있듯시민들의상식과동떨어진논리가담겨있는가하면,가해자를선처할때‘진지한반성’이라는단어로뭉뚱그리며판에박힌듯부실한판결문을내놓는모습도전국법원에서목격된다고꼬집는다.피해자가법원에나와말해주길바란다면서도재판과정에서피해자를어떻게보호할지는고민조차하지않는경우가허다하다며,들을준비는하고있는지도묻는다.이렇듯저자가일반시민의‘상식적인’관점으로들려주는법정이야기들을따라가다보면,‘솜방망이’의다음단계로넘어가사법시스템을바라볼수있게될것이다.
“알고보면다르다,알고비판하면달라진다”
‘그판결’뒤의보이지않는톱니바퀴들
성폭력사건재판을보도하는기사를읽다보면재판부의이름도종종발견할수있다.일반인들에게‘법대로’는대개‘판결’로받아들여지므로기사의초점또한재판결과에맞춰지는경우가많고,이때판사는마치모든결과를만들어낸사람처럼보이기도한다.그런데책에따르면‘솜방망이처벌’을논할때이야기되어야하는이들은판사만이아니다.부실한재판뒤에는수사와재판의여러단계가존재하며,그과정에다양한주체들과제도들,관행들이자리잡고있다.사법시스템의‘현실’은복잡하게얽혀있다.
저자가‘또다른톱니바퀴’로먼저꼽는이들은경찰과검찰이다.이들의수사와기소가부실하면재판에도영향을주며,판사가“유죄심증이있어도무죄를선고할수밖에없는”상황은흔히이런과정에서비롯된다.더욱이피해자는형사재판의당사자가아니라서증인신문에출석하는경우가아니면방청석에앉아있어야하는등수사와재판과정의전반에서소외당하는경우가많다.그러나검경수사권조정이후역할과권한이커졌음에도‘고소장쪼개기’등으로피해자의고통을더하는경찰의사례,가해자의범죄를입증할책임이있고피해자를대변할수있는‘당사자’임에도피해자보호와공판준비를소홀히해피해자에게고통을안기는검사의사례등은여전히현실에넘쳐난다.
이들뿐인가.열악한제도의현실속에서피해자에게실질적인도움을제공하지못하는피해자국선변호사들,‘피해자에게고통주기’를전략화한성범죄전담전문법인을비롯한피고인측변호인들,피해자와연대자들의입을틀어막기위한보복성고소등의‘방법’을인터넷카페에서공유·학습하는가해자들,부적절한인용과묘사등으로추가가해에동참하는언론의성범죄보도관행등은사법시스템의문제가판사들만의문제가아님을보여준다.특히군의성범죄수사·재판에서는이모든톱니바퀴들이한데얽혀피해자들을막다른골목으로몰아갔다고볼수있으며,이는군바깥의민간재판에까지영향을끼친다.
그렇다고이책이모두가문제라는식의양비론의메시지를전하려는것은아니다.각각의문제들은그자체로하나하나가피해자의회복을심각하게방해하며,일상을재구성하려는시도를갉아먹고있음을이책은보여준다.따라서경중을따지기어려우며반드시함께이야기되어야한다는사실을깨닫게된다.저자는이러한수많은주체들의모습을관찰하며감시하고,때로는직접목소리도들으면서‘사법시스템’이라는거대하고견고한실타래를구성하는실들을하나씩풀어보여준다.
피해자는어떻게생존자,그리고연대자가되었나
“살아남은,그리고살아남지못한이들의이야기”
2010년,성폭력피해를입은후경찰서앞에서망설이며돌아섰던저자는도저히‘포기’가안된다는것을깨닫고고소를결심한다.고소이후가해자로부터“여섯종류의보복성고소를여덟건정도”당했다는건조한고백은그의싸움이짐작조차어려운고통의시간이었음을보여준다.4년간의길고고된법정싸움을거쳐성폭력피해를인정받았지만,그끝에남겨진것은“무너진언어체계,악화된건강상태,단절된경력,끊어진인간관계,추락한경제상황,출소한가해자의보복위협,그리고승소했다는판결문”뿐이었다.계속되는후유증속에서생각을완성된문장으로표현하고자시작하게된트위터에서,그는가해자가자신을조롱하며불렀던명칭‘마녀’를닉네임으로정한다.이책에는그후의이야기,즉고통의기억을연료삼아사법시스템이라는높고단단한벽을일일이만져보고두드리며다른피해자들과연대해나갔던이야기가담겨있다.
그의활동은여러영역을넘나든다.그가연대한사건은일반성폭력사건부터디지털성범죄사건,피해자들과연대자들이당하는무고와명예훼손(한국에서는사실을밝혀도‘명예훼손’이될수있다)등보복성고소사건,공동체안에서의해결을모색했던사건,가해자가사망한사건,우리가기사를통해어느정도알고있는유명인가해자들의사건까지다양하다.그리고점차연대의영역을넓혀일반시민들을위한재판모니터링과판결문읽기등의교육프로그램을기획하고,싸움이끝난후에도웅크린채로또다른싸움을이어나가는피해자들을밖으로불러내기위한파티를열기도하며,사법시스템내외부의사람들을잇는등다양한단계와장소에서활동해왔다.홀로고립되어싸움을이어갔던자신에게지금의자신이있었다면덜고통받았을거라는생각으로시작한연대였지만,경험을바탕으로원칙을만들고,성찰을바탕으로오류를수정해나가며진화하기시작한다.
그러나그는자신이기준이되는것을경계한다.‘불필요한잡음’을만들고싶지않아본업을유지한채원조없이모든활동을이어가고있지만,개인의시간과비용과건강을갈아넣는방식은문제가많다고여러차례지적한다.‘자신의회복을위해’기한을정해놓고시작했던그의여정은스스로도예상치못한만남들과이별들을계기로새로운국면을맞이한다.‘지속가능한연대’와‘연대자로서의책임’에대해끝없이질문하면서각성하게된그는,이윽고‘마녀’에서‘디(D)’로활동명을바꾸며‘다리를놓는사람’이되고자결심한다.“연대는일방향이아니며책임은공동의몫이다”라고말할수있게되기까지,누구보다치열하게‘그림자’가되어갔던저자의성실한궤적이책속에그려져있다.
‘잊히기위한연대’는어떻게가능한가?
시스템을바꾸는연대,연대의시스템화를향하여
흔히‘법대로’는문제해결을위한마지막방법을,판결은그‘끝’이라고여겨진다.따라서재판의결과는중요하다.그러나저자는피해이후판결에이르는구체적인과정들,즉제대로된수사와재판의과정이그자체로회복의출발점이될수있다고말한다.법이끝이아니라시작이될수도있는것이다.
이책은사법시스템을향한촘촘하고구체적인비판들로가득하지만,이러한비판은사실누구보다변화를믿고시스템을신뢰하려는저자가보여주는애정의시선이기도하다.그가당사자로서,또연대자로서겪은바시스템이망가지면누구보다피해자부터타격을입고,피해자중에서도가장취약한피해자부터타격을입는다는점을잘알고있기때문이다.피해이후홀로사법시스템속에서싸우는동안마주했던고립감과고통이다른피해자들에게는결코되풀이되지않길간절히바라는그는,그렇기에비판과신뢰,결과와과정이모두중요하다고믿으며,구체적인변화를위해서는구체적인감시와기록과목격이필요하다고본다.비중이크진않지만그런이유로이책에는저자가수사와재판과정에서목격한‘좋은’판사와검사,경찰과변호사의사례들도들어있다.
이책은구체적인변화를위한구체적인감시의길을안내한다.우리가익히들어온‘n번방’과‘박사방’사건을포함해2020년이후전국적으로진행된디지털성범죄사건들의재판과정을따라가며주의깊게써내려간방청기,꼼꼼히축적한범죄자별재판결과,범죄자들의형량과보안처분들에관한통계,수사·재판·연대의과정을한데모아놓은연대표등은그자체로방청연대기록의모범이기도하다.이책에는독자들도재판방청을시도해볼수있도록재판절차와기록할사항등을안내하는‘재판모니터링수첩’도들어있다.
<추천의말>
이책은어떤법조인이쓴책보다전문적인성범죄관련법률지침서이다.누구를위한지침서인가.딱히누구라고특정하기어렵다.읽는사람각자의입장에서길을찾을수있기때문이다.변호사,검사,판사를향해서는매서운질책을보내면서제대로된변호,기소,재판을위한길을보여준다.피해자들에게는지난한법정다툼의현실을날것으로대면하게하면서도누구의도움을받을지,어떤무기로싸울지,어떻게버틸지,나아가법정다툼이끝난후의삶을어떻게준비해야하는지를최전방에서싸운사람만이구사할수있는언어로,혼자가아닌함께가는길을보여준다.또이책은한사람의엄청난욕심이담긴책이다.성폭력피해자로서스스로를구하고,나아가연대로써세상까지구하려고하는야망이꿈틀대는책.그의야망을적극응원한다. -김수정(변호사,<아주오래된유죄>저자)
너무나귀한책이나왔다!성범죄피해자를넘어서서연대자의삶으로나아간저자가고통과어려움을다져누르며써내려간한글자한글자가죽비가되어정신이번쩍들도록머리끝을내리친다.판사는물론이고검사,경찰,피해자국선변호사,그밖에사법절차관여자라면누구라도밑줄그어가며읽어야할필독서다.우리는이책으로피해자를제대로공부해야한다. -임수희(판사,<처벌뒤에남는것들>저자)
성폭력피해자는형사사법절차상‘당사자’가아니다.피고인만큼기록을열람·복사할수도,의견을개진할수도없다.그러나,그래서‘연대’가있다.이토록방대하고정확하게,분노와희망속에서,따뜻하고단호한모습으로.“성폭력은유죄나기쉽고무고도많지?”막말하는이들앞에서우리는이책을편다.‘피해자’를삭제하려할수록더많은연대자들이감시하고기록할것이다. -김혜정(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나는부끄러웠고,많이배웠다.장관책상에서만든법적·제도적장치가피해자가처한현실에서는얼마나허망한것인지(다시)절절하게확인했기때문이다.이책의귀중함은현장곳곳에서피해자가겪는여러난관을치밀하게짚으면서,필요한조언을적확하게알려주는데있다.나아가현장의공백을메워주는연대자들의존재와활동의소중함을깨우친점도큰기여이다.성희롱·성폭력이라는시대적아픔에공감하는모든분께이책을필수학습서로추천하고싶다.-정현백(전여성가족부장관,<연대하는페미니즘>저자)
성폭력사건이발생했을때,때로사회는치부를축소하고책임을회피한다.가해자,방관자,시스템이무의식적으로공모한불의는피해자를사회적으로배제한다.이렇게다시한번고립되어고통과무력감에빠진피해자들에게다가가기꺼이그림자가되고자하는이가있다.그는말한다.일단살아만있으라고,그리고원한다면싸우는법을익혀함께두려움에맞서자고.연대자D는자신의고통을열어보여주는생존자이자증언자이며,시간과행동으로함께하는그림자이고연대자다.담담히써내려간이책전체가그와그가연대해온피해자들의용감한회복일지이자불의와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