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소년들은 위대했고 계엄군은 잔인하고 무도했다
박 석 무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Ⅰ.
어느날 이덕준 군과 최치수 군이 가편집된 커다란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책의 제목은 『오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이었는데, 5·18민중항쟁으로 생명을 바친 어린 학생과 고등학생들의 삶의 족적이자 죽음의 기록이요, 요행히 살아남아 오월의 새벽을 지켰고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고 생을 걸고 투쟁하는 고교생 출신 민주투사들에 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고 전재수 군, 중3의 박기현·김명숙의 참담한 죽음, 고1의 문재학·안종필 열사, 더 많은 고2·고3의 백두선·전영진 열사 등의 투혼과 의혼이 고스란히 정리되었고, 못 죽은 한으로 생을 걸고 항쟁의 진실을 밝히고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하고 있는 투사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개개인의 스토리를 모아놓고 보면 5월항쟁의 전모가 완전하게 나타나고 전두환 세력의 잔인무도한 학살 만행을 숨김없이 파악해낼 수 있는 자료집이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군홧발과 총칼에 의해 고귀한 생명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학살당했고, 비록 죽음이야 면했지만 생존하기까지의 참담한 고통을 얼마나 심하게 당했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불의한 권력의 횡포가 인권과 자유를 얼마나 박탈했던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증언해주는 실화들의 내용이다. 42년 전에 겪었던 비인도적·반인륜적 계엄군의 만행들은 이제는 어떤 변명으로도 ‘학살’이었음을 감출 수 없는 역사가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초등 4학년이 총탄에 쓰러지고 중학생·고등학생들이 잔인한 죽음을 당했는데도 ‘자위권’ 발동 등의 거짓으로 역사를 왜곡할 길이 있겠는가. 이 책 한 권만으로도 5월항쟁은 불의의 총칼 앞에 민주적으로 싸우다가 끝내는 무장해서 계엄군 폭도들과 투쟁했던 위대한 민중항쟁임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다.
Ⅱ.
고3의 전영진 군은 “조국이 우리들을 부릅니다”라면서, 말리는 부모들을 뿌리치고 뛰쳐나가 시민군이 돼서 투쟁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량 선생은 한이 많아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있는 시신을 관에 넣고 관 위에다 “장하다, 내 아들아! 니가 다하지 못한 꿈을 아버지가 이루겠다”고 적었던 것이 바로 5월 정신이 꽃피어 나올 수 있는 본질이었다.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군은 계엄군이 다시 진입한다고 도청을 사수하다 귀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도청을 지키다가 27일 총탄에 쓰러져 생명을 잃었고, 그의 어머니 김길자 씨는 그런 아들이 폭도라는 이유로 장례비도 주지 않자, 폭도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는 한 어떤 보상비도 단연코 거절했으니, 거기서도 또 5월항쟁의 정신은 이미 꽃피고 있었다.
5월 정신, 항쟁의 참다운 의미가 이 책에 통째로 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책인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자유와 평화를 찾아내자던 5월 정신, 그 정신의 발양을 위해 책을 제작해낸 최치수 군 등의 노력에 찬사를 바치고 싶다. 5월 26일 저녁부터 계엄군의 재진입이 명확해지자, 대학생 선배 시민군들은 자신들이야 죽기로 각오하고 소년 시민군들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강하게 권했으나, 죽음을 각오한 소년 투사들이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 일, 그래서 끝내 목숨을 바친 순국, 5월의 정신은 그래서 참으로 위대하다. 호생오사(好生惡死)! 인간의 본능이다. 죽기야 싫고 살기야 좋아하는 본능인데, 그런 본능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정신, 5·18의 숭고함은 거기에도 있었다.
Ⅲ.
5·18 1년 전인 79년, 필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말할 자유도, 글을 쓸 자유도 모두 빼앗겨, 유배지에서 신음하는 유배인들처럼 비굴하고 불쌍하게 살아가던 군상이 당시의 지식인 사회였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지위도 턱없이 낮았던 교사인 우리들은 벌벌 떨면서 살아가야 했다. 다행히 광주라는 특별한 도시의 분위기에서 그래도 우리는 참으로 조그마한 용기를 내서 인권을 신장하고 사형제를 폐지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는 광주지부를 창설하여, 내가 총무담당 운영위원의 자격으로 인권에 관한 집회도 열고 회보를 제작해 인권에 관한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모기만한 목소리를 내고 살아가던 유배객의 신세였다고 여겨진다.
앰네스티 일과 함께 뜻있는 교사들과 손을 잡고 광주에 양서조합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양서 읽기를 권장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해 가을, 마침내 10·26이 일어났다. 독재자 박정희 현직 대통령이 부하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다. 그 사건은 27일 새벽에야 공개되었는데, 그날 10월 26일 오후 대동고등학교 2학년 학생 1반에서 4반까지의 240여 명은 점심 후 교실에서 뛰쳐나와 운동장에 집결하여 교련 반대·보충수업 반대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저녁 무렵 시위의 주모자들이라고 7~8명의 학생들이 수사기관에 잡혀가서 공갈·협박으로 사건의 전모를 토로하였다. 당시 1반에서 4반까지의 영어과목 담당 교사는 필자였다. 12반까지 있는 2학년 전체에서, 하필이면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만 시위에 참여했으니, 내가 선동이라도 했다고 여겨 다음날이면 연행해서 크게 곤욕을 치러야 할 판인데, 바로 대통령 ‘유고’가 방송되면서 진상이 밝혀지자, 수사하던 학생도 풀어주고, 저도 연행하지 않는 다행이 이어졌다. 이 책의 주인공들인 고 전영진 군, 김향득 군, 이덕준 군 등 당시 대동고 2학년 학생으로 바로 10·26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학생들이었다.
Ⅳ.
그 무렵 나는 책의 출판을 준비하던 때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집인 『여유당전서』를 읽다가 그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와 형에게 보낸 편지들이 너무 훌륭한 내용이 많아 한글로 번역하여 젊은이들에게 읽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0월이면 원고가 거의 정리되어 출판사로 모두 보낸 뒤에 10·26사건이 터졌다. 책은 11월 20일자로 간행되었는데 바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이었다. 독재자 일당 몇몇 권력자들만 멋대로 살아가고 일반 국민들이야 유배지에서 신음하는 형편이어서, ‘유배지’라는 책 제목만으로도 책은 유명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은 그때 이래 2019년 7월까지 무려 다섯 번째로 간행되어 판이 바뀔 때마다 내용도 보강되고 교정·교열을 제대로 해서 이제는 국민교양서의 지위에 오른 책이다.
이 책 전영진 열사 편에, “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2학년 영어교사였던 박석무 선생님이 자주 들려주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전영진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부연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나는 학생 시절, 고등학생 때의 4·19에서 대학생 때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월남파병 반대 시위, 교련 반대 시위, 박정희 하야 운동 등 민주화운동이나 앰네스티 등 시민운동에 적극 가담했지만, 수업시간에 민주화운동에 관해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없다. 학생들이 느끼기에 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들 나름대로 판단이지 사실과는 다르다. 유신시대에 고교 교사였으니, 유신 말기 간행했던 책의 서문을 통해 그 시절에 내 생각의 일단을 피력했는데, 그때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이다.
“역자는 이번 역문이 지식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아버지들, 젊은 청년들에게 많이 읽혔으면 한다. 금전만능과 권력만능의 사회적 풍조에 젖어 있는 나이 어린 학생들, 이들을 어떻게 그러한 깊은 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교단에 서서 매일 청소년들을 대하는 역자로서 항상 가슴 아픈 부분이다. 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도록 해야 할까. ……”라는 글에서 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볼 수 있다. 어른인 나야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나어린 학생들에게는 유행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좋은 책을 읽어서 옳고 바른 삶의 가치를 찾아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고전의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성들만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만 나라가 안녕을 누린다(民唯邦本, 本固邦寧)”라는 말도 해주면서, 독재자만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들은 유배객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었고, “수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야 빼앗아올 수 있지만 하찮은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는 『논어』의 이야기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국민이 되어 국민의 권리를 포기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사나이의 굳은 뜻은 어떤 독재자도 빼앗아갈 수 없다는 등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자주 언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나타나는 결과는 결코 내 의도와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10·26시위에서 보듯, 내 수업을 듣던 1~4반의 학생들만 시위에 가담한 사실, 78·79·80년 사이에 내 수업을 들었던 많은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어서는 상당한 숫자의 학생들이 전국 여러 대학의 운동권에 참가하여 민주화운동의 주동자들이 된 것도 사실이다. “형님한테 꼭 알리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뭣인고 하니 다름 아니고 내가 그동안 징역살이 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중 형님이 고등학교 재직 때의 제자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광주 옥에서, 전주 옥에서 내가 확인한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은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국에 소재해 있는 감옥에도 많이들 갇혀 있을 것인데 그 수는 엄청나리라 생각됩니다.”(『김남주 산문 전집』, 2015, 푸른사상)라는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내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제목의 글이다.
위의 내용 또한 정확한 사실이라고 여길 수 없다. 80년대 초 나라의 형편이 학생들이 가만히 공부만 할 수 없는 시대인데다, 독재가 너무 극악했기 때문에 여타의 많은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서 올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야 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들 큰 오해가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