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은 엄마가 된 장자 연구자가 언젠가 엄마가 될 딸을 위해 쓴 철학에세이다. 전국시대 제자백가 대부분이 태평성세를 꿈꿀 때, 장자는 모든 질곡桎梏(쇠사슬과 쇠고랑)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자유를 꿈꿨다. 그는 자유를 억압하는 질곡의 실체를 파헤쳤고, 그것이 ‘나(ego)’를 고집하고 확장시키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다. 장자는 자신의 글이 경전이 되고 자신의 메시지가 교리가 되는 것조차 경계하며,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모호한 우화들을 남겼다. 저자는 장자의 우화들을 부모의 시선으로 읽고 해석해 들려준다.
보통의 부모교육서가 아이를 위해 부모가 갖추어야 할 지식과 기술을 다루는 데 비해, 이 책은 아이가 아닌 부모를 위해 쓰여졌다. 부모가 스스로를 옭죄던 마음의 질곡을 발견하고 자유로워지길, ‘나’를 비운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품게 되길 바라며.
아이는 부모 품에서 자란다. 부모 품의 크기가 아이가 살아갈 세계의 크기가 된다. 그 품의 온기가 아이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온도를 결정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모교육서나 아동심리학을 탐독할 필요는 없다. 품이 크고 따뜻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좋은 부모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 품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다. 자신을 둘러싼 광막한 세상과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소리 없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처음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을 지닌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하고 기대하고 상처 입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 우린 그의 품에 기대어 쉬고 떠들고 놀다가 어떤 미안함도 없이 그를 떠나고 잊을 수 있다.
‘마른 웅덩이에서 서로를 위한다며 아가미에 침을 뱉어주는 물고기들과, 강과 호수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물고기들, 당신이 물고기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소?’
장자의 물음에 답합니다. 나는 아이가 ‘나’를 까맣게 잊은 채 강과 호수에서 자유롭게 헤엄쳤으면 좋겠습니다. 한껏 호수를 누비고 돌아와 작은 지느러미를 팔랑이며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 진짜 멋진 호수야!’
기억해보면 아이에게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바라는 것도 욕심일지 모릅니다. 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느라 뾰족하게 눌린 머리, 푸르스름해진 손가락, 자지러질 듯한 울음, 힘겹게 뜬 한쪽 눈. 내가 견뎠던 산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고통을 견디고 아이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가슴에 올려진 아이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이 작고 경이로운 존재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일렁이는 생명의 그물 가운데 하나의 그물코입니다. 나를 통과해 또 하나의 그물코가 만들어진 것일 뿐 바지런히 코바늘을 놀리며 그물을 뜨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노자와 장자가 말한 ‘겸허’의 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장자는 겸허를 ‘탁부득이託不得已’,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 기대는’ 삶의 자세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엔 나의 욕망과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는 부득이의 바다에 띄워진 작은 배를 타고, 끝이 언제인지 모를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해류를 타고 온 아이의 배를 만났습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아이의 배를 나의 배에 묶어두려 시도했습니다. 아이의 배에 나의 이름을 새기고 기억해주길 바랐습니다. 아이가 이룰 성취와 실패, 명예와 오욕이 나의 것인 양 불안해하며 아이의 뱃머리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아이의 배를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곳은 내가 매달아준 과거의 돛으로는 항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내가 묶어둔 불안의 닻으로는 편안히 머물 수 없는 세계입니다. 나는 이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나의 사랑이 그림자가 되지 않길. 나를 잊고 세상과 노래하길.
다시 장자의 물음에 답합니다. 호수 이 편과 저 편에서 서로를 잊고 헤엄친다 해도, 들녘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잊고 노래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지금 아이의 아가미를 거친 물과 아이가 내쉰 숨을 마십니다. 우린 같은 호수, 같은 공기 속에 삽니다. 잊혀진다 해도 외롭지 않을 겁니다. 부모와 아이는 이어진 그물코니까요.
- 『장자 마음 교육』 후後 가운데
보통의 부모교육서가 아이를 위해 부모가 갖추어야 할 지식과 기술을 다루는 데 비해, 이 책은 아이가 아닌 부모를 위해 쓰여졌다. 부모가 스스로를 옭죄던 마음의 질곡을 발견하고 자유로워지길, ‘나’를 비운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품게 되길 바라며.
아이는 부모 품에서 자란다. 부모 품의 크기가 아이가 살아갈 세계의 크기가 된다. 그 품의 온기가 아이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온도를 결정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모교육서나 아동심리학을 탐독할 필요는 없다. 품이 크고 따뜻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좋은 부모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 품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다. 자신을 둘러싼 광막한 세상과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소리 없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처음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을 지닌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희생하고 기대하고 상처 입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 우린 그의 품에 기대어 쉬고 떠들고 놀다가 어떤 미안함도 없이 그를 떠나고 잊을 수 있다.
‘마른 웅덩이에서 서로를 위한다며 아가미에 침을 뱉어주는 물고기들과, 강과 호수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물고기들, 당신이 물고기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소?’
장자의 물음에 답합니다. 나는 아이가 ‘나’를 까맣게 잊은 채 강과 호수에서 자유롭게 헤엄쳤으면 좋겠습니다. 한껏 호수를 누비고 돌아와 작은 지느러미를 팔랑이며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 진짜 멋진 호수야!’
기억해보면 아이에게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바라는 것도 욕심일지 모릅니다. 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느라 뾰족하게 눌린 머리, 푸르스름해진 손가락, 자지러질 듯한 울음, 힘겹게 뜬 한쪽 눈. 내가 견뎠던 산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고통을 견디고 아이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가슴에 올려진 아이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이 작고 경이로운 존재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일렁이는 생명의 그물 가운데 하나의 그물코입니다. 나를 통과해 또 하나의 그물코가 만들어진 것일 뿐 바지런히 코바늘을 놀리며 그물을 뜨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노자와 장자가 말한 ‘겸허’의 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장자는 겸허를 ‘탁부득이託不得已’,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 기대는’ 삶의 자세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엔 나의 욕망과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는 부득이의 바다에 띄워진 작은 배를 타고, 끝이 언제인지 모를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해류를 타고 온 아이의 배를 만났습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아이의 배를 나의 배에 묶어두려 시도했습니다. 아이의 배에 나의 이름을 새기고 기억해주길 바랐습니다. 아이가 이룰 성취와 실패, 명예와 오욕이 나의 것인 양 불안해하며 아이의 뱃머리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아이의 배를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곳은 내가 매달아준 과거의 돛으로는 항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내가 묶어둔 불안의 닻으로는 편안히 머물 수 없는 세계입니다. 나는 이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나의 사랑이 그림자가 되지 않길. 나를 잊고 세상과 노래하길.
다시 장자의 물음에 답합니다. 호수 이 편과 저 편에서 서로를 잊고 헤엄친다 해도, 들녘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잊고 노래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지금 아이의 아가미를 거친 물과 아이가 내쉰 숨을 마십니다. 우린 같은 호수, 같은 공기 속에 삽니다. 잊혀진다 해도 외롭지 않을 겁니다. 부모와 아이는 이어진 그물코니까요.
- 『장자 마음 교육』 후後 가운데
장자 마음 교육 (젊은 부모를 위한 장자 이야기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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