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지영 장편소설|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지영 장편소설|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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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언어와 실존의 관계를 젊은 감각으로 풀어낸 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플라톤이 제시한 개념 '시뮬라크르'(simulacre)는 쉽게 말하면 본질(이데아)을 복제한 가짜, 즉 허상을 뜻한다. 근대 철학 이후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질 들뢰즈에 의해 더 구체화하는데, 그는 모든 이미지가 실체인 원본의 복제품이라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 비평이 해석하는 시뮬라크르는 아예 복제를 다시 복사한 복제를 뜻하게 됐다. 즉 '원본이 실종된 복제'인 셈이다. 예컨대 당신을 찍은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나의 실체가 아닌 나를 그려놓은 허상의 이미지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나'의 사진 이미지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극대화한 공간이 바로 가상현실(VR)이고, 이 VR을 현실에서 상업적으로 구현하면 요즘 주목받는 '메타버스'(Metaverse)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만 구사할 줄 알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를 완전히 잊고 잃는 대신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던' 프랑스어를 완벽히 쓰게 됐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이 맞는가? 당신의 언어적 정체성이 바뀌었다면 당신의 본질은 사라지고 허상만 남은 게 아닐까? 그런데 또 다른 고민도 있다. 지금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내가 볼 때 한국어를 말했던 과거의 나는 나의 인생에서 진짜 본질이 맞았을까?
올해 수림문학상 수상작인 지영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이런 실존적 화두를 새롭고 신선한 형식으로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에게 일어난 기이한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세계인에 감동을 주고 영웅이 된 수키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지 오십 여일 만에 깨어나 첫 마디를 던진다. "Mori…Upper."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던 이 말은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한국인 한준의가 수키를 만나면서 마침내 의미가 통한다. 그가 처음 뱉어낸 말은 한국어로 "머리 아파"였다.
수키는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만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원어민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이 전대미문의 이상 증상은 의과학계의 관심을 받으며 '수키 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질병명까지 탄생시킨다. 극한의 분쟁과 갈등 상황 또는 사고 현장에서 크게 다쳤으나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서 발현된다는 공통점도 발견됐다. 이 병은 최초 발병자 수키에 국한하지 않고 서서히 퍼져나가 2023년 기준 5천213명까지 환자가 늘어난다.
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이 병의 심각한 예후는 시간이 지나면 신체 부위가 조금씩 먼지로 변해 결국에는 몸 전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환자 수는 많지 않지만 걸리면 결국 생명을 잃게 되고 세계적으로 증상이 발현되는 심각한 질환이라는 점에서 '팬데믹'을 선언한다.
언어 문제로 미국에서 생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수키는 한국에 와서 방송 출연과 언론 인터뷰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지면서 일거리는 줄어들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인도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어디론가 떠나 자취를 감춘다.
소설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나'가 수키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수키에 관한 언론 보도를 되짚는 내용만으로 서사를 진행하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한다. '나'는 촬영 중 당한 폭탄 테러에서 살아남은 뒤에 이상한 꿈을 꾸고 환영과 환청에 시달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꿈은 수키 증후군 환자들의 기억이었기 때문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수키의 흔적을 쫓는다. 수키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수림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우리의 말을 붙든 낯선 소재, 과감한 생략과 단단한 문장은 다른 소설과 확실한 차별을 보이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면서 "이 신인은 우리에게 흔히 말하는 소설의 재미를 이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저자

지영

1984년광주광역시에서태어나고자랐다.
이화여자대학교와대학원에서역사교육과문학을공부했다.‘5.18신인문학상(소설)’을수상했다

목차

인도네시아발리사누르선착장7
코코웨스턴,코코이스턴10
Ver.17-「먼지인간,수키들」13
1.Mori,Upper16
2.84C330-Suki’ssyndrome19
3.모든이야기의시작27
4.수키에대해우리가말할수있는것37
5.21세기의나지오56
6.잃어버린것과얻게된것66
7.이름을부르자76
8.암시107
9.호기심의유통기한115
10.포스트수키,혹은포스트숙희의시대128
11.그냥그저해야할일151
12.감자와알루사이177
13.다시호명된이름,수키191
14.어쩌면우리모두214
15.침묵을기억으로써222
나의그날,여름의지점229
경이로운세계,라오236
준의에게239
코코라오,블랙비치241
한권의책245
온더레코드:우리가잃어버린248
작가의말251
제9회수림문학상심사평257

출판사 서평

〈심사평〉
코로나19가지속되고있고,인간의단절은더욱심각하게진행된다.혹자는대부분의활동이비대면으로이어지는이런현상은앞당긴미래의모습이라고도한다.
이시기인간의다양한삶의모습,거기서파생되는다양한관계를이야기하는소설이야말로그역할이커졌다고볼수있겠다.원고지800매이상의장편소설쓰기의지난한노력을잘알기에심사는그어느심사보다많은공력이들어갔다.놀라운신인의탄생을바라는마음이공력을더했을것이다.
많은응모작들이각기개성을드러내며이세계를이야기하고있어반가웠다.한가지,우리는영화나드라마의영상을잠깐만봐도,혹은대사처리의방식만봐도잘만들어진작품인지아닌지안다.
마찬가지로소설에도명백한소설의문장이있다.장편소설은세계를다양한방법으로확장해보여줄수있다는장점이있다.이때이확장의방법이중요하다고할수있다.영화와마찬가지로좋은소설인지아닌지는‘어떻게’에서판가름나는경우가많다.이‘어떻게’가소설의문장이라고할수있다.현대의소설쓰기는‘무엇을’이아니라‘어떻게’에맞춰져있는데아직도무작정하고자하는이야기를써나가는‘무엇을’에방점이찍힌소설들이많았다.
『사라지는,사라지지않는』은모든심사위원이공히추천한작품이었다.테러현장에서사고를당한뒤깨어난인물들이모국어를잃고언젠가접해본적이있는언어를모국어처럼자연스럽게말하게된다는설정이관심을끌었다.사고뒤전혀다른환경에놓인다는설정은낯설지않지만그것이‘말’이라는점이신선했고,언어와세계와의관계를집요하게파고드는힘이있었다.
모국어를잃고전혀다른언어를완벽하게구사한다는것은몸에다른옷을입는것이아니라몸자체가바뀐것과같아,결국이세계에서고립되고,먼지로사라질수밖에없다는내용은언어에대한놀라운천착이었다.
또한,1000매가까이되는작품전체를‘수키증후군’과관련된인터뷰와기사만으로채운점도놀라웠다.인터뷰와기사사이에는어떻게기사를접하게됐는지,혹은인터뷰를하게됐는지보조설명도없이툭툭문단이나뉘고서술되지만그것이허술하게느껴지는것이아니라오히려시의행이나연처럼압축된힘을가졌다.우리의말을붙든낯선소재,과감한생략과단단한문장은다른소설과확실한차별을보이며우위를점하고있었다.
다만,신체가먼지가되어사라진다는설정을할수밖에없는점은이해가가지만설득력이조금약했고,기본서사가기사나인터뷰만으로채워지고,행간의생략이심하다보니일반독자의가독력을담보하지못하는것은아닌가하는우려가일부있었다.
그럼에도심사위원들은독특한설정과전개방식으로새로운한세계를펼쳐보인신인의패기를높이샀다.이신인은우리에게흔히말하는소설의재미를이제는전혀다른곳에서찾아야할때라고말하고있는듯하다.그저그렇게잘쓴소설이아닌,전혀다른소설의문법으로한국문단에새로운파장을일으키길기대한다.

*수림문학상
수림문학상은연합뉴스와수림문화재단이한국문학의새로운미래를열어갈신진작가발굴을위해2013년공동제정한문학상이다.올해9회째이다.제1회수림문학상은최홍훈의'훌리건K',제2회는장강명의'열광금지,에바로드'에돌아갔다.제3회에서는수준에이른응모작이없어당선작을내지못했다.
제4회에는김혜나작가의'나의골드스타전화기',제5해에는이진작가의'기타부기셔플',제6회에는김의경작가의‘콜센터’,제7회최영작가의‘로메리고주식회사’,지난해에는김범정작가의‘버드캐칭’이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