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선각자 서재필

개화기의 선각자 서재필

$19.64
저자

김삼웅

독립운동사및친일반민족사연구가로,현재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공동대표를맡고있다.≪대한매일신보≫(지금의≪서울신문≫)주필을거쳐성균관대학교에서정치문화론을가르쳤으며,4년여동안독립기념관장을지냈다.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전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위원,백범학술원운영위원등을역임하고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자문위원,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위원등을맡아바른역사찾기에부단히노력하고있다.
역사·언론바로잡기와민주화·통일운동에큰관심을두고,독립운동가와민주화운동에헌신한인물의평전등이분야의많은저서를집필했다.주요저서로『한국필화사』,『백범김구평전』,『을사늑약1905그끝나지않은백년』,『단재신채호평전』,『만해한용운평전』,『안중근평전』,『김대중평전』,『안창호평전』,『빨치산대장홍범도평전』,『김근태평전』,『10대와통하는독립운동가이야기』,『몽양여운형평전』,『우사김규식평전』,『위당정인보평전』,『보재이상설평전』,『의암손병희평전』,『조소앙평전』,『백암박은식평전』,『나는박열이다』,『신영복평전』,『현민유진오평전』,『외솔최현배평전』,『3·1혁명과임시정부』,『장일순평전』,『의열단,항일의불꽃』,『수운최제우평전』,『꺼지지않는오월의불꽃:5·18광주혈사』,『운암김성숙』,『이승만평전』,『김재규장군평전』,『우당이회영평전』,『다산정약용평전』,『겨레의노래아리랑』등이있다.

목차

들어가는말:서재필은누구인가5
1.격동기에태어나다13
2.청소년시기19
3.갑신정변의격류속에서37
4.1차망명시기57
5.다시개혁에앞장서다79
6.독립협회와만민공동회창설하다117
7.미국으로추방137
8.기미년3·1혁명149
9.워싱턴회의에진력하다167
10.항일전선에서생업전선으로179
11.국내외지도자들에게편지를보내다195
12.미·일전쟁시기211
13.반세기만의환국219
14.미국귀환과서거247
주(註)258

출판사 서평

갑신정변과서재필

서재필은스물한살때인1884년에김옥균과박영효,홍영식등개화당인사들과청나라에의존하려는척족중심의수구당을몰아내고,실질적인독립과개혁정치를이룩하고자갑신정변을일으켰다.그러나수구세력이끌어들인위안스카이(袁世凱)의청나라군에진압되어갑신정변은삼일천하로막을내렸다.서재필은목숨을구하기위해고국을떠나야만했고이후일본을거쳐미국으로망명했다.

서재필은갑신정변당시휘하의사관생도들을지휘하여고종을호위하고수구파를처단하는역할을맡았다.갑신정변이실패한뒤그의가족은역적으로몰려부모·형제와아내는음독자살하고,동생은참형을당했으며,두살된아들은돌보는이가없어굶어죽었다.

서재필박사(doctor)

일본에서미국으로건너간서재필은미국으로귀화한1호한국인이된다.낮에는일하고밤에는컬럼비안의과대학(오늘날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인턴과정을수학한뒤의사면허증도땄다.서재필은박사학위를받은적이없다.각종기록에서‘서재필박사’라고쓰는것은흔히의사를‘닥터(doctor)’라고하는데서온착오인듯하다.

『독립신문』과독립문,그리고다시추방

서재필이미국에서정착하는사이에국내정세는급변했다.갑오개혁(1894~1896)이일어나개혁정치가단행되고,서재필등에게내려졌던역적의죄명이벗겨졌다.이로써죄인의신분에서벗어난서재필은1895년말에귀국하고,중추원고문에임명된다.망명한지12년만에귀국한서재필은백성들의계몽이중요하고,개화정책을국민에게알리기위해서는신문을발행하는일이시급하다고판단하여1896년에우리나라최초의민간신문인『독립신문』을창간했다.창간일인4월8일은오늘날‘신문의날’이될만큼『독립신문』의기능은막중했다.『독립신문』은최초로한글전용과가로쓰기와띄어쓰기를함으로써우리나라한글이보급되고발전하는데에도크게기여했다.

서재필은『독립신문』을창간한데이어독립협회를조직하고,만민공동회를열어개화사상을대중화시키는데기여했다.독립협회와만민공동회는우리나라최초의시민단체역할을하면서입헌군주제를주창하고,정부대신들의부정부패를규탄하고,열강들의이권침탈을강력하게비판했다.또한청나라사신을맞아들이던영은문이헐린자리에프랑스개선문을본떠서독립문을세웠다.
『독립신문』과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줄기차게수구파의국정농단과이와결탁한열강의이권침탈을폭로·비판했다.그러자수구파정부와국제열강들은이들의중심에서서재필이작용한다고보고그를미국으로추방했다.그가다시쫓겨나기전까지2년여동안한국에서벌인여러가지활동은우리나라개화운동사에큰비중을차지한다.당시그누구도그의업적을넘어서기어렵다.그런데또한이시기에그의납득하기어려운일탈행위도없지않았다.

미국에서도독립운동에매진

다시미국으로돌아간서재필은생업에종사하다가1919년에국내에서3·1혁명이벌어지자필라델피아에서‘한국회의’를개최하고월간지『한국평론』을발행했다.상하이임시정부가워싱턴에설치한구미위원회에참여하여독립운동도전개했다.펜실베이니아주에서병원을개업해생계를꾸려나갔다.

서재필은1922년에워싱턴에서군축회의가열리자,우리나라독립을세계여론에호소했다.1925년에하와이에서범태평양회의가열렸을때는우리나라대표로참석하여일제의만행을규탄하면서,한국의독립을각국지도자들에게호소했다.서재필이이렇게조국의독립을위해동분서주하는사이에병원은경영이어려워지고결국문을닫아야했다.

45년만의귀국,그리고서거

서재필은일제가패망한뒤미국정부의한국문제수석고문(미군정최고의정관)에위촉되어망명45년만에환국했다.미군정측은한때이승만대신서재필을남한의집권자로옹립하려는움직임을보였다.서재필은이같은일로이승만의견제를받다가정부가수립된뒤인1948년9월11일에홀연히미국으로돌아갔다.한국전쟁이한창이던1951년1월5일,고국의민주통일국가를염원하던서재필은필라델피아근교몽고메리병원에서87세를일기로눈을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