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언론인, 계몽사상가, 독립운동가
개화기에 선각자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서재필 평전!
서재필의 개화 시기의 역할과 해방 후의 행적 등을 자세히 들려준다
개화기에 선각자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서재필 평전!
서재필의 개화 시기의 역할과 해방 후의 행적 등을 자세히 들려준다
서재필은 수구파를 척살하고 개혁정치를 실현하려던 혁명가이고, 개화운동의 선구자이며, 이 땅에서 처음으로 ≪독립신문≫이라는 근대적 신문을 만든 자유언론인이자,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공화주의 시민운동가였다. 이 모든 일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을 제외한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서재필의 생애는 당대 한국인 누구 못지않은 파란곡절(波瀾曲折)의 삶이었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산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 보니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했을 때는 한국말이 서툴렀고, 외국인 행세를 하며 한국을 ‘귀국(貴國)’이라 불렀다. 미국 여성과 재혼하고,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니 반은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한국인이었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서재필에 관한 책은 이미 여러 권이 나와 있고, 연구 논문도 많다. 최근에는 그의 행적을 두고 과대 포장되었다는 비판적인 주장도 제기되었다. ≪독립신문≫을 두고도 ‘부왜역적 기관지’라는 극단적인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또 하나의 ‘서재필 평전’을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연구가이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의 평전을 써서 ‘평전의 대가’라는 평을 받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그 이유를 “개화 시대의 그의 역할과 해방 후의 행적 등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망명과 추방, 멸문지화에도 조국의 자주독립운동과 통일국가를 염원하는 독립운동가로서 한평생을 바치며 살다 간 서재필의 삶과 업적을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가 미국 필라델피아의 서재필 선생 기념관을 찾아 전시관을 둘러보고, 기념관 주위에서 자라는 대나무(서재필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가져왔다고 함)를 보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거인의 평전을 쓰고자 다짐했다고 한다. 그때가 2000년 8월이니, 그 다짐을 지키기까지 2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갑신정변과 서재필
서재필은 스물한 살 때인 1884년에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 인사들과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독립과 개혁정치를 이룩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구세력이 끌어들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나라군에 진압되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서재필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휘하의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와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서재필 박사(doctor)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으로 귀화한 1호 한국인이 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안 의과대학(오늘날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인턴 과정을 수학한 뒤 의사 면허증도 땄다. 서재필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각종 기록에서 ‘서재필 박사’라고 쓰는 것은 흔히 의사를 ‘닥터(doctor)’라고 하는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독립신문≫과 독립문, 그리고 다시 추방
서재필이 미국에서 정착하는 사이에 국내 정세는 급변했다. 갑오개혁(1894~1896)이 일어나 개혁정치가 단행되고, 서재필 등에게 내려졌던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이로써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서재필은 1895년 말에 귀국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망명한 지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백성들의 계몽이 중요하고,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8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창간일인 4월 8일은 오늘날 ‘신문의 날’이 될 만큼 ≪독립신문≫의 기능은 막중했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우리나라 한글이 보급되고 발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데 이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개화사상을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 역할을 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주창하고, 정부 대신들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한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서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줄기차게 수구파의 국정 농단과 이와 결탁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폭로·비판했다. 그러자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이들의 중심에서 서재필이 작용한다고 보고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가 다시 쫓겨나기 전까지 2년여 동안 한국에서 벌인 여러 가지 활동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그 누구도 그의 업적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데 또한 이 시기에 그의 납득하기 어려운 일탈 행위도 없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에 매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에 국내에서 3·1 혁명이 벌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국회의’를 개최하고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회에 참여하여 독립운동도 전개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병원을 개업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서재필은 1922년에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열리자,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1925년에 하와이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열렸을 때는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각국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서재필이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병원은 경영이 어려워지고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45년 만의 귀국, 그리고 서거
서재필은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국 정부의 한국문제 수석고문(미군정최고의정관)에 위촉되어 망명 45년 만에 환국했다. 미군정 측은 한때 이승만 대신 서재필을 남한의 집권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재필은 이 같은 일로 이승만의 견제를 받다가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8년 9월 11일에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고국의 민주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근교 몽고메리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재필의 생애는 당대 한국인 누구 못지않은 파란곡절(波瀾曲折)의 삶이었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산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 보니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했을 때는 한국말이 서툴렀고, 외국인 행세를 하며 한국을 ‘귀국(貴國)’이라 불렀다. 미국 여성과 재혼하고,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니 반은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한국인이었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서재필에 관한 책은 이미 여러 권이 나와 있고, 연구 논문도 많다. 최근에는 그의 행적을 두고 과대 포장되었다는 비판적인 주장도 제기되었다. ≪독립신문≫을 두고도 ‘부왜역적 기관지’라는 극단적인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또 하나의 ‘서재필 평전’을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연구가이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의 평전을 써서 ‘평전의 대가’라는 평을 받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그 이유를 “개화 시대의 그의 역할과 해방 후의 행적 등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망명과 추방, 멸문지화에도 조국의 자주독립운동과 통일국가를 염원하는 독립운동가로서 한평생을 바치며 살다 간 서재필의 삶과 업적을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가 미국 필라델피아의 서재필 선생 기념관을 찾아 전시관을 둘러보고, 기념관 주위에서 자라는 대나무(서재필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가져왔다고 함)를 보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거인의 평전을 쓰고자 다짐했다고 한다. 그때가 2000년 8월이니, 그 다짐을 지키기까지 2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갑신정변과 서재필
서재필은 스물한 살 때인 1884년에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 인사들과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독립과 개혁정치를 이룩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구세력이 끌어들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나라군에 진압되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서재필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휘하의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와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서재필 박사(doctor)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으로 귀화한 1호 한국인이 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안 의과대학(오늘날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인턴 과정을 수학한 뒤 의사 면허증도 땄다. 서재필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각종 기록에서 ‘서재필 박사’라고 쓰는 것은 흔히 의사를 ‘닥터(doctor)’라고 하는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독립신문≫과 독립문, 그리고 다시 추방
서재필이 미국에서 정착하는 사이에 국내 정세는 급변했다. 갑오개혁(1894~1896)이 일어나 개혁정치가 단행되고, 서재필 등에게 내려졌던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이로써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서재필은 1895년 말에 귀국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망명한 지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백성들의 계몽이 중요하고,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8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창간일인 4월 8일은 오늘날 ‘신문의 날’이 될 만큼 ≪독립신문≫의 기능은 막중했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함으로써 우리나라 한글이 보급되고 발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데 이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개화사상을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 역할을 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주창하고, 정부 대신들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열강들의 이권 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한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서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줄기차게 수구파의 국정 농단과 이와 결탁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폭로·비판했다. 그러자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이들의 중심에서 서재필이 작용한다고 보고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가 다시 쫓겨나기 전까지 2년여 동안 한국에서 벌인 여러 가지 활동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그 누구도 그의 업적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데 또한 이 시기에 그의 납득하기 어려운 일탈 행위도 없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에 매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에 국내에서 3·1 혁명이 벌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국회의’를 개최하고 월간지 ≪한국평론≫을 발행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회에 참여하여 독립운동도 전개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병원을 개업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서재필은 1922년에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열리자,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1925년에 하와이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열렸을 때는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각국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서재필이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병원은 경영이 어려워지고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45년 만의 귀국, 그리고 서거
서재필은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국 정부의 한국문제 수석고문(미군정최고의정관)에 위촉되어 망명 45년 만에 환국했다. 미군정 측은 한때 이승만 대신 서재필을 남한의 집권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재필은 이 같은 일로 이승만의 견제를 받다가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8년 9월 11일에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고국의 민주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근교 몽고메리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개화기의 선각자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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