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1569∼1618)만큼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는 작가도 드물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면모는, 역모죄로 몰려 사형을 당한 생애만큼이나 강렬한 빛을 던져주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스러운 면이 있지만, 여기서의 논의거리로 삼기에 적절치 못하므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사회개혁가로서, 뛰어난 시인으로서, 훌륭한 시 비평가로서 허균의 면모는 끝모를 주름 사이에 굽이굽이 숨어 있다.
이러한 허균의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글들로 엮어져 있어 허균을 한층 더 우리 가까이로 끌어들일 수 있는 책인 허균산문집 '누추한 내 방'이 도서출판 태학사에서 나왔다.
허균의 다층적인 사유의 이면에는 그의 험난한 인생 경험이 숨어 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법한 허균에게 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참으로 곡절 많은 인생길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20세(1588)에 그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 않던 둘째 형 허봉의 죽음을 맞이하며, 이듬해(1589)에 누이 허난설헌의 죽음을 맞이한다. 한 해를 걸러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의 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허균의 글 곳곳에 남아있다. 허균은 24세(1592) 때 임진왜란을 만난다. 강릉을 향한 피난길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첫아들을 잃는다. 이 사건은 허균의 생애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글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마다 무수한 곡절을 겪지만, 허균의 경우 그 곡절의 갈피마다 시문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의 글이 다시 보인다. 조선의 성리학이 인성론의 문제를 넘어 예론禮論의 시대로 넘어가던 시점에서, 중세적 이성의 무차별적인 확대는 허균에게 강한 구속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성인이 만든 예법禮法보다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정情을 따르겠노라는 그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뇌를 온몸으로 맞아 헤쳐나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이다.
허균 관련 자료를 읽다보면 그의 독서 편력은 놀라울 정도다. 게다가 그의 암기력은 아마 우리 역사상 꼽아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허균의 암기력 덕분에 지금도 우리가 접하는 문집이 여럿이다. 얼추 생각나는 것만 꼽아도 허균의 둘째 형인 허봉許?(1551∼1588)의 문집, 시 스승 이달李達(1539∼1612)의 '손곡집蓀谷集', 누이 허초희許楚姬(1563∼1589)의 '난설헌집蘭雪軒集'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난설헌의 문집에 실린 시 작품 중 일부는 정말 허난설헌의 것인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의 암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허균의 글쓰기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척독尺牘’이다. ‘척독’은 말 그대로 짧은 편지를 지칭한다. 문집의 편제에서는 ‘서書’와 비슷한 성격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명나라 이후 소품문의 발흥과 함께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 것으로 취급되었다. 우리 나라 문집에서 서書와 척독尺牘의 차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반영한 것은 허균이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 편지의 편차를 제대로 갖추면서 비교적 길게 쓰는 편지를 ‘서’라고 한다면, 의례적인 인사나 복잡한 내용과는 별도로 간단한 연락이나 감회를 적은 짧은 편지는 ‘척독’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의 장단長短에 따라 ‘서’와 ‘척독’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길이를 어느 정도에서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호하다. 명대明代에 오면 소품문을 쓰는 사람들이 척독을 선호하게 되고, 이들은 과거의 짧은 편지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전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짧은 편지는 있었지만, 그것에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게 된 것은 명대의 문인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책벌레 허균의 경우, 중국 문단의 변화에 민감한 촉수를 들이밀고 있었던 탓에 그러한 경향을 재빨리 파악하고 자신의 문학적 영역으로 적극 끌어들여 자양분을 흡수한 것이다.
셋째는 개혁적인 글이다. 우리가 허균에게서 강렬한 사회 개혁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은 그의 몇몇 논설들, 예컨대 '호민론豪民論', '소인론小人論', '유재론遺才論' 등의 글이 주는 힘 때문이다. 그동안 선학들에 의해 특히 주목되어 온 사회 개혁가(혹은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는, 그 과도한 해석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16세기 말, 17세기 전반에 이처럼 과감한 글을 쓴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꼽아보면 허균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비극적인 역사 경험과 개인사적 사건들이 허균의 세계관을 이러한 방향으로 가게 했을지라도, 그 글들에서 느끼는 강렬도와 깊이는 삶의 고비마다 마주치는 부당한 사례들에 눈길을 회피하지 않고 면밀한 관찰과 사유를 펼쳐온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넷째로 주목할 것은 그의 글쓰기에서 도선적道仙的 경향이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방달함으로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이단처럼 여겨졌던 도선적인 소재와 내용을 글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었다면, 허균의 사유가 일단은 당대 주류적인 것에서는 벗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현실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혁명의 길로 나서든, 이미 짜여진 틀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든, 그것은 세상을 건너는 자신만의 방식일 것이다. 허균은 그 방식으로 도선적인 것을 선택하였다. 그의 글에서 유난히 이런 문제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선적인 경향이 현실도피적인 부면을 가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사유를 깊은 차원에서부터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아가 그 광활한 대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것 역시 도선적인 사유였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전혀 새로운 상상력은 억압 저편에 새로운 희망을 던지고, 그 희망의 빛은 일종의 ‘혁명적 낭만성’으로 발현한 것이다.
혁명가는 현실을 완전히 뒤바꾸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다. 그가 꿈꾸는 세계는 일종의 이상사회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절망적이고 암흑 가득한 세계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을 범박하게 ‘혁명적 낭만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허균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낭만성은 실제 행동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생각의 차원에서 끝나기도 하는데, 허균은 후자에 가까운 인물로 보인다.
도선적인 것을 통해 사회의 견고한 지층을 흔드는 허균의 사유는 이후 이같은 계열의 전개에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 한 생애가 꿈처럼 지나갔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꿈은 현실로 부상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근원적인 힘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