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과민주주의에대한해부,
엘리트주의를극복한시민의정치를위하여
헤르만R.판휜스테런의기획은커다란이론적야심을품고있지만구체적인다수의‘사례들’을통해알기쉬운언어로예시되어있다.
-에티엔발리바르
헤르만R.판휜스테런은네덜란드의정치이론가이다.그는첫단독저서인『정치적책임에대한사고』를1974년공간한이래2020년현재까지단행본을27권(단독저서14권,공저및편집13권)발표하고,논문과기고문,인터뷰등도180편가까이출간하는등활발히활동하였다.
1998년,휜스테런의대표작인『시민권의이론』이출간되면서,그의이론은세계적으로큰주목을받게된다.일례로이책이발간된1998년,프랑스의소장철학자파트리스마니글리에(PatriceManiglier)는이책에관해22쪽에달하는상세한서평을『악튀엘맑스』(ActuelMarx)에기고한다.같은해발리바르도학술대회에서이책에관한토론문을발표하고,이를2001년발간한자신의단행본『우리,유럽의시민들?』(Nous,citoyensd'Europe?)에재수록한다.발리바르의책은총12장으로구성되어있는데,이중절반인6편의논문에서이책이시민권이론의중요자원으로거론ㆍ활용된다.
휜스테런은아리스토텔레스,루소,T.H.마셜,벤저민바버,아렌트,메리더글러스,하버마스,푸코,비트겐슈타인등다양하고풍성한이론들을활용해시민권,민주주의,정치의기원을탐구한다.현실적쟁점을명료한문체로이야기하는휜스테런의서술은변화와개혁을꿈꾸는한국독자들에게시민행동의새로운대안을제시해줄것이다.
‘1989년혁명’이라는사건
이책에처음등장하는명사구가‘1989년혁명’이라는사실이단적으로말해주듯,이책은1989년혁명으로상징되는정치적지각변동,아렌트적의미의‘사건’을배경으로삼고있다.이사건이개시한시대는이책의발표시점인1998년은물론그로부터20여년이흐른오늘의정세역시규정하고있다.1989년이후국민국가와동서진영을축으로삼은정치질서는돌이킬수없이끝났지만,안정된모습의새질서는아직껏오지않았기때문이다.2차세계대전이후1989년까지각나라를좌지우지하던주요정치세력은대부분권좌를내놓거나거대한도전에직면하였지만,오늘날회고하건대대안적인정치세력이등장하여새로운정치체제를건설한경우는드물었고,한때대안으로주목받던세력들(한국의경우라면이른바‘386세대’를필두로한민주화운동세력)도거대한환멸을자아내기일쑤였다.시민들의불만과좌절이높아지면서기성정치일반에대한거부감을비민주적ㆍ반민주적경로로표출하는양상은여전하거나,1989년이후환멸의여파로더심해진경우도적지않다.극우파의극단주의,이방인들과여타‘잉여’인들의주변화,정치에대한혐오,신빈곤에대한무관심으로말미암은불법적이고폭력적인행동들은정확히동시대적문제들이다.이책은이러한위기또는‘궐위’(闕位/interregnum)의시대를사고하고이시대안에서차이를만들어내려는지적노력에해당한다.우리가저위기와궐위의시대를빠져나온것이아닌한이책은여전히현재적이다.
영웅의숭고한행위가아닌,
시민의불완전한능력으로부터시작하자
이책에서저자휜스테런이제시하는입장은신공화주의이다.신공화주의라는용어는휜스테런이공화주의전통을적극상속하고있다는것,다른한편으로공화주의전통을비판하거나정정하고있다는것을동시에말해준다.
우선그가상속하는공화주의전통의원천은고대그리스민주정,그리고그리스민주정을이론에서대표하는아리스토텔레스이다.이원천에서그가취하는것은민주주의적인정치개념으로,그핵심원리는평등이고으뜸가는직책(office)은시민권이다(이런의미에서흔히‘시민권’으로번역되는citizenship을‘시민직職’이라고옮길수도있다).조금풀어서말하자면,평등의원리에따라기존의비대칭적이고일방적인지배관계를재조직한결과,또는시민이라는직책에무제한적인권한을부여하거나최소한권력관계가지배관계로변질되는것에대항할수있는권한을부여한결과탄생한것이정치이고,따라서정치의뿌리에는민주주의가있다는통찰이다.이렇게볼때공화주의전통을상속하는신공화주의기획은의고주의나보수주의와는전혀무관하고,차라리급진적이고(뿌리를건드린다는뜻의)발본적이라는이중적의미에서‘래디컬’민주주의사조에속한다.그런점에서휜스테런의작업은같은사조에속한다른정치이론가들,가령셸던월린이나자크랑시에르,샹탈무페나에티엔발리바르등의작업과함께읽을필요가있다.그의작업이이상의작업들과동일해서가물론아니라,래디컬민주주의사조의일부로휜스테런을읽어야그의작업을더수월하게이해할수있고,역으로휜스테런의작업이래디컬민주주의사조전반을더역동적으로파악할수있게해주는실마리가될수있기때문이다.
동시에휜스테런은공화주의전통을비판하거나정정한다.이는특히공화주의전통이중시하는‘덕목’(virtue)개념에집약된다.그가보기에고전공화주의가중시하는덕목은군사적이고남성적이라는문제가있다.하지만그는바람직하지않은특정덕목을비판하는데그치지않고덕목개념자체를문제삼는데까지나아간다.주지하듯덕목의어원은고대그리스의‘아레테’(aret?)로,이는모든종류의‘수월성’(秀越性/excellence)을뜻하는용어인바,덕목을강조하면능력주의나엘리트주의로흐를위험이극히높다는것이다.그렇다면덕목,현대적인용어를쓰자면‘능력’개념자체를멀리해야하는가?그렇지는않은데,다만그전제는“최고한도의능력”이아니라“최저한도의능력”을추구하는것,달리말하면능력개념을수월성이나완벽성(perfection)의문제설정에서떼어내는것이다.이에상응하는것은정치를‘탈영웅화’하려는시도인데,휜스테런에게있어정치란(또는적어도지금시대에필요한정치란)위인과영웅이자신의수월성을뽐내어불멸의전당에입장하는숭고한행위가아니라,시민들이불완전한능력을발휘하여다원성을공화정으로조직하는세속적실천/관행이된다.
다원성개념의정교화,
네개의축으로이루어진운명공동체
이책의가장큰특징중하나는,아렌트에게서연원한다원성개념을가공ㆍ정교화한다는점이다.휜스테런은다원성을“운명공동체를공유하는사람들사이의차이들”로재정의하는데,여기서운명공동체란“개인들이각자일하고살아가는방식을포기하지않는한서로맞닥뜨리지않을수없”고,“개인들이서로의차이를어떻든상대해야만”하는처지에놓여있다는뜻이다.이개념으로써휜스테런은개인주의와공동체주의간의고질적대립을단번에상대화한다.운명공동체는사람들의존재여건이고,따라서운명공동체와별개의개인이란개인주의의신화일뿐이다.하지만이운명공동체를지배하는것은초월적규범이나단일한정체성,합의가아니라차이와갈등이며,그런점에서이공동체는차라리‘공동체없는공동체’다.즉운명공동체개념의의의중하나는개인주의와달리공동체라는물질적이고상징적인현실을인정하면서도,공동체주의와다른(심지어정반대의)방식으로,가령‘합의에맞서’‘갈등의꾸준한섭취’를옹호하는방식으로공동체문제에접근한다는점이다.
휜스테런은이운명공동체또는다원성이네축으로구조화되어있다고말한다.다원성은(상대적으로주관적인)개인적정체성들과감정들,(상대적으로객관적인)능력과제도들로이루어져있다.이런접근에는크게두가지의미가있다.우선정치의대상이자수단을더세밀하게파악하고,이로써다소추상적인수준에머물렀던아렌트의다원성개념을정교하게발전시킨다.이와함께다원성의구체화와상관적으로그를다루는정치도구체화한다.이제정치,그러니까다원성의조직화는이네축에개입하는과정,정체성들의형세를재편하고,어떤감정은북돋고어떤감정은중화하며,특정한사회적능력을요청ㆍ조장하고,새로운제도들을구축하는과정으로재정의되는것이다.휜스테런의이러한분석은소수자의정체성을은폐하고갈등을악마화하는정치문화를극복하기위해무엇이필요한지,다양한능력을포괄할수있는제도란무엇인지다시한번고민하게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