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벌과 사대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정벌과 사대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28.04
Description
“15세기 조선은 한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외정벌을 자주 시행했다.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한국사 전체를 살펴봐도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이다. 조선의 정벌은 국가와 국가가 대립했던 대규모 전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사실상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행위였다. 따라서 15세기 조선이 대외정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시행했던 의도를 설명하는 것은 조선 초기의 국가적 역량과 국제관계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조선의 대외정벌은 표면적으로는 여진과 왜구에 대한 군사행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명·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15세기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대외정벌의 필요성 역시 강조했다. 그들은 대외정벌의 시행이 사대명분과 충돌한다는 비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5세기의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가치로 인식했던 것이 아니라 국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저자

이규철

李圭哲
조선전기국제관계사와역사콘텐츠연구자로서,성신여자대학교사학과에재직중이다.15~16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를조선의대외정책을통해파악하는방법을연구해왔다.기존의조선시대사연구를심화하면서역사속내용을현대사회에활용하는콘텐츠를만드는연구에관심을가지고있다.대표논저로는「연산군대대외정벌추진과정을통해서본외교역량의약화」(2019),『고려에서조선으로-여말선초,단절인가계승인가』(공저,2019)등이있다.

목차

책머리에
서론
1부태조대대외정책기조의수립과대마도·요동정벌
1장건국후대외정벌정책수립의배경
2장1396년대마도정벌의의미
3장건국직후대명관계와요동정벌의추진
2부태종대대외정벌정책의추진과시행
1장태종대의대명의식과모련위정벌
2장1419년대마도정벌이전왜구의활동과명의상황
3장명의정왜론에대한조선의논의와대마도정벌
3부세종대대외정벌정책의본격화와파저강정벌
1장파저강정벌이전의국제정세
2장여연사건과파저강정벌의결정
3장파저강정벌단행과조선의대명의식
4장파저강재정벌의준비와단행
5장영토확장과대외정벌의위험성
4부세조대대외정벌정책의계승과대명의식
1장모련위정벌의의미와대명의식
2장건주위정벌단행과명의출병요청
5부성종대대명의식변화와대외정벌정책의한계
1장명의출병요청과대명의식의변화
2장북정실패와왕권의약화
결론

출판사 서평

‘명분’에앞서‘실리’를추구한15세기조선의국제관계
대외정벌은조선의의도에따라기획·시행된외교정책이었다
15세기조선의대외정벌은기존의통설에서여진이나왜구세력의침입혹은약탈때문에시행되었다고설명되었다.하지만당시기록들을보면외부세력이조선을침입한횟수나규모는매우적었다.조선은자신들이입었던피해보다훨씬큰규모로대외정벌을시행했다.심지어침입의주체를파악하지도않고특정세력을대규모로정벌한사례도있었다.이는15세기조선의대외정벌이외부세력에대한대응이아니라직접기획하고주도했던대외정책이었음을보여주는것이다.
15세기조선의대외정벌은대부분여진세력을대상으로시행되었다.그런데여진지역은명목상이라고는하지만이미명의영역에포함되어있는지역이었다.조선의대외정벌은표면적으로는여진과왜구에대한군사행동이었지만실제로는명-일본을포함한동아시아전체와연결된문제였다.여기서주목되는것이바로사대(事大)이다.조선건국이후사대의가치를정면으로부정한적은단한번도없었다.특히태종과세종은지성사대(至誠事大)를강조하며명에대한존중심을항상드러냈다.여진에대한대규모정벌은조선이누구보다강조했던사대의가치에어긋나는대표적사례였다.그러나조선의국왕들은사대의중요성을강조하면서도대외정벌의필요성역시강조했다.15세기의조선은사대를반드시지켜야만하는가치가아니라국정을장악하고자신들의정치행위에정당성을부여하기위해활용하는수단으로인식했다.
정벌추진과시행과정에서나타났던조선의대외의식은정치적목표에따라변용되었다.조선에게사대는중요했지만그위에는국왕권(國王權)이있었다.15세기조선의국왕들은누구보다사대를강조하면서도상황에따라서는누구보다먼저사대의가치를변용시켜적용하는일에앞장섰다.국왕의권위와정치적권한을유지하고확대시키기위해사대명분을활용하려는의도가반영된것이었다.

태조,대외정책기조를수립하다
:국익을위해서라면명도공격할수있다
조선의대외정책기조는이성계,정도전과같은건국핵심세력의주도하에수립되었다.그들은공민왕대대외정책의시행과정에직접참여하면서큰영향을받았다.공민왕대추진되었던대외정책기조는조선건국후에도연결되었다.조선은건국을전후한시기에태조의터전이었던동북면과두만강일대의여진추장들을귀부시켜압록강에서두만강에이르는자국의영역을설정했다.하지만여진세력의지배문제는조선과명의대립을야기했다.조선은건국후왜구에대해서새왕조의위력을과시하기위해대마도정벌을단행했다.그리고명과의정면대결을감수하면서까지요동정벌을추진했다.비록요동정벌은좌절되었으나조선은국익을위해서라면명도공격할수있다는태도를보여줬다.

태종,대외정벌정책을추진하고국제관계를조율하다
:대명관계개선과여진지역에대한영향력확대
왕자의난을통해국정을장악하고왕위에오른태종은태조대와는달리명과의관계개선에많은노력을기울였다.따라서태종은누구보다사대명분을지켜야한다는점을강조했다.하지만외교적사안에서는전혀다른모습을보여줬다.특히여진초유문제에서는명과대립하는양상도보였다.당시조선은여진지역에대한영향력을확대하기위해노력했다.특히명에입조했던동맹가첩목아처리문제에많은관심을기울였는데,이는대명외교의이면에숨겨져있던조선·여진·명삼자의관계를압축적으로보여준다.
태종10년단행된올적합정벌은모련위지역에대한조선의주도권을확보하기위한군사행동이었다.정벌의시행과이와관련된내용을중국에보고했던조선의태도를통해,태종의집권으로인해대외정책의방향이변했지만목표까지변경된것은아니었음을파악할수있다.태조대의대명강경론자들이북방지역경략을위해서는명과의군사적충돌도감수해야한다는견해였던것에비해,태종대에는북방지역경략을위해명과의우호적관계를유지하는가운데목표를달성하기위해노력해야한다는태도의차이가나타날뿐이었다.태종은국정과외교관계의안정을위해사대를더욱강조했다.

세종,정벌을통한영토확장과왕권강화를노리다
:파저강정벌을통해노린것과얻은것
정벌을중심으로한대외정책을적극적으로활용해후대의국왕들에게많은영향을주었던임금은세종이었다.세종은지성사대를강조하면서도여진정벌과관련된부분에서는이에구애받지않았다.세종은정벌을추진하는과정에서황제의지시를자의적으로해석하는경우가많았다.결국세종은두차례에걸친파저강정벌을단행했고,정벌의성과를성공적으로활용했다.세종은정벌이후재위전반기보다더욱강한정치적통제력을행사했다.특히세종은정벌의추진과정에서신료들의반대의견을무시하는경우가많았다.이는국왕이대외정벌을활용해군주의위상을높이는동시에정치주도권을확대하고자했음을설명해준다.
태종이나세종은대외정벌의실패가가져올위험성을충분히인지하고있었다.하지만국내의조치로얻을수있는성과는한계가있었기때문에국왕주도하에보다큰영향력을미칠수있는정책이필요했는데,그것이바로대외정벌이었다.위험성에도불구하고성공했을경우얻을수있는성과가훨씬컸기때문에,조선초기의국왕들은신료들의거센반대에도정벌의시행을주도적으로추진했다.

세조,명의견제속에서대외정벌정책을계승하다
:모련위,건주위정벌이후조선과여진의관계
세조는계유정난을통해실권을장악한이후부터여진세력들의내조를적극적으로권장했다.명은사신을파견해조선과여진의통교를문제삼으며압력을가했다.조선은명의견책에대해해명하고자노력했지만명이실제로요구했던여진과의교류중지는거부했다.조선은명에대한사대자체를부정하거나정면충돌을야기할수있는행동은자제하면서도,국익을위한대외정책을유지하는양면적태도를보였다.
명의건주위출병은정벌을통해조선을견제하고여진지역에대한자신들의영향력을확대하려는의도였다.세조대의조선은명의청병요구에응하면서도정벌성공의가늠자가되는적의총수포획과처형에성공함으로써여진지역에대한영향력을유지할수있었다.조선은사대명분을지키면서여진지역에대한영향력도유지했다.

성종,대외정벌과사대사이를방황하다
:대외정벌정책의실패와왕권의약화
성종재위기는국왕의정벌추진에대한신료들의반대양상이더욱확대되어나타난시기였다.또한국왕과신료모두이전시기보다사대명분에더욱집착하기시작했다.
당시명은세조대처럼건주위정벌에조선의지원을요청했다.전대의국왕들에비해국정장악력이떨어졌던성종이사대명분에의탁해국왕의권위를높이고자했다.명이건주위정벌에다시나섰던데는해당지역에대한영향력을확보하고조선을견제하기위한목적이포함되어있었으나성종대의조선은사대의리를지키는일에급급해여진지역에대한영향력감소에효과적으로대응하지못했다.이는여진지역에대한조선의영향력을감소시키는결과를초래했다.
성종22년의북정은대간들의격렬한반대에도건국이후최대규모의정벌군편성으로단행되었다.하지만북정은기대했던성과를얻지못했다.이상황은이전과달리언관의활동과공론등이국왕의정치적주도권을제한하는방식으로작동하도록했다.성종대를중심으로조선의사대의식은명분과국익이라는두가지가치를모두얻고자하던태도에서점차명분과국익이하나가되는방향으로변하게되었다.

“15세기조선에서사대는결국국왕권의강화와유지에필요한수단중한가지였다.그렇기때문에사대가국왕의권위나권력의행사에방해가될경우에는쉽게지켜지지않았다.15세기조선의국왕들은사대명분을효과적으로활용해어느시기보다강한국왕권을확립하는데성공했다.하지만사대명분을정치적으로활용하는데는시간이지남에따라한계가나타나기시작했다.사대명분은조선에서점점더중요하게인식되었고,결국에는사대명분이국왕의권한마저제한할수있는가치로평가되기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