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 (고구려의 중국계 이주민 정책과 다문화 | 양장본 Hardcover)

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 (고구려의 중국계 이주민 정책과 다문화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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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4세기 초·중반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들어온 다수의 외래 이주민이 남긴 많은 중국 계통의 고분들에는 적지 않은 벽화와 문자 자료들이 남겨져 있기에 그들의 독특한 사회상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역비한국학연구총서 44번째로 기획 편찬된 『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는 4세기 초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외래 전통의 독특한 장의(葬儀) 전통 및 이와 관련된 국가의 ‘이주’ 정책, 그리고 현지에 정착하여 자체적인 사회상을 구현해갔던 이주집단의 삶에 주목하였다.

민족국가의 틀과 일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거시적 공간에서 고구려를 이해한다

4세기 초반 이래 낙랑·대방군 고지(2군 고지, 현재의 황해도·평안도 일대)에 외래 이주민 관련 고분들이 다수 나타나게 된 배경은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4~5세기에 화북 동북부에서 요서-요동-고구려로 이어지는 공간은 인적 유동(流動)이 이루어지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체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놓고 상호 경쟁 및 연합을 이루기도 하는 지역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정치적 격변과 혼란 속에서 중국 왕조의 변경에 있던 군현들이 차례로 소멸하는 과정, 그리고 1세기 가까이 지속된 거대한 유이민 파동과 이를 두고 화북의 주요 세력들이 이주민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였던 현상 등은 동북부의 고구려에도 일정한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다문화 이해공동체였다. 고구려라는 영역과 경계 내에서 정치·제도적 발전상에만 주목한다면 결코 고구려의 다원적 국가상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일국사적 관점과 국가의 성장, 지배체제 중심의 연구 시각에 갇혀 있던 고대의 다채로운 자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4~5세기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역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족들을 구성원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화북의 정치적 변동과 추이를 긴밀하게 파악하는 가운데 내부의 정책을 조율하고 적용했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분 속 벽화와 묵서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주민 집단의 존재 양상과 주민 구성

4세기 초반 서진(西晉) 왕조의 붕괴와 동시에 화북 일대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많은 유이민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화북의 이주민을 자국에 유치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에도 화북에서 유입되는 이주민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수용하는 데는 고구려 정권의 의도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이 이주민들을 2군 고지의 곳곳에 안치했다고 본다. 2군 고지는 서진 정권의 붕괴로 인해 중앙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사실상 소멸 단계를 밟고 있었다. 고구려는 바로 그곳에 생산 기반과 수취체제를 복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주민들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2군 고지 내 중국계 망명인들의 고분에는 묘주의 공적 사적 일상이 묵서와 벽화로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묘지(墓誌)의 기록이 흥미롭다. 거기에는 중국 지명이 관칭된 태수·자사호 등의 지방관호도 보이며, 당대 행정지명이 아닌 과거 시기의 주·군 단위명을 활용한 사례도 나타난다. 이는 4세기 이래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난 화북의 이주민들이 타지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지연(地緣)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군 고지의 동수와 진의 고분에서 과거의 주·군·현 단위 본적 지명을 표기한 사례는 출신지 인식에 대한 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는 2군 고지에 안치한 고위 망명인들 각각의 예하에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주민들을 편성했다. 동수·동리·진 등 망명인들의 개별 관할지 내에는 유주와 요동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주민 외에도 그 주변에 원래 거주했던 한인(韓人)과 예인(穢人)을 비롯하여 낙랑·대방 출신을 표방하는 일부 토착주민이 함께 편성되기도 했다. 토착민까지 일부 포함된 이러한 다양한 주민 구성은 개별 망명인들이 임의로 편성한 결과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그들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덕흥리벽화고분의 칠보행사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주민의 사회상, 정서와 이념, 신앙적 지향

덕흥리벽화고분 내 묘지·묵서는 연속된 장면 배치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즉 일종의 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덕흥리벽화고분 전실의 관람 순서를 보여준다(222~223쪽 그림 참조). 이에 따르면 덕흥리벽화분의 전실은 관람객이 최초 남벽의 출입문을 통해 들어올 경우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맞은편 북벽의 통로문 상단에 묘지를 배치했으며, 이후 시계 방향으로 북벽 우하단의 행렬도→동벽의 행렬도→남벽 통로문 좌측의 행렬도→남벽 통로문 우측의 막부관리도→서벽의 13군 태수내조도→북벽 출입문 좌측의 묘주도 순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서사와 구성 의도는 묘주의 주변인들과 외부의 시선을 고려하여 대외용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외부 관람자를 뜻하는 ‘관자(觀者)’ 관련 묵서 역시 같은 의도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는 중국 문화에 기반을 둔 묘주 일족의 정서·지향을 같은 처지에 있던 휘하의 이주민 사회와 함께 공유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덕흥리벽화고분의 칠보행사도는 기존에 고구려 중앙정부가 개입하여 치른 공적 행사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필자는 묘주 진의 관할지에서 열렸던 일상 행사의 모습이라고 파악한다. 묘주인 진, 혹은 고분의 제작자들은 현실(玄室) 안의 많은 연꽃 도안과 칠보행사도를 통해 묘주가 평소 중시했던 불교 신앙을 그의 사적 공간에서 최대한 강조하려고 했으며, 묘주 자신의 신앙적 지향을 외부에 드러내려고 했다고 본다. 또한 이 지역에 안치되었던 소규모 집단이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장기간 거주했던 양상을 보여주는 근거로 바라본다.
저자

안정준

저자:안정준
연세대학교대학원사학과에서한국고대사를전공했으며,「高句麗의樂浪·帶方郡故地지배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다.현재서울시립대학교국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동아시아라는역사·지리공간을배경으로한반도와그주변지역의고대사를연구하는작업을계속하고있으며,대중의역사인식과역사학의사회적역할문제등에대해서도깊은관심을갖고있다.저서로는『소장학자들이본고구려사』,『고구려중기의정치와사회』,『한국고대사와사이비역사학』(이상공저),『반전의한국사』등이있으며,논문으로는「2000년대한·중역사분쟁과정에서나타난‘한국사’인식의문제」,「‘광개토왕릉비’문의수묘인연호조에보이는비성(非城)단위지명의출현배경」,「백제의對南朝외교전략과遼西經略기사」,「역사적공간으로서의‘遼東’과고구려의國際秩序인식」등이있다.

목차


서론연구현황과접근방법

1장낙랑·대방군의소멸과군현계토착집단의귀속
1.고구려의낙랑·대방군공략과두군의소멸과정
2.낙랑·대방군고지내토착·외래집단의귀속

2장4~5세기화북지역의혼란과이주민집단의유입
1.화북지역의유이민발생추이
2.4세기고구려의이주민수용
3.이주민의낙랑·대방군고지안치

3장고구려체제하의중국계주민집단편성
1.이주민집단의정체성과본적표기
2.이주민집단의인식을반영한관호官號
3.이주·토착민을포함한군집群集의편성과그배경

4장중국계주민집단의전통과지향
1.낙랑·대방군고지의고분속에구현된대외용서사와구성의도
2.고분속에보이는정치·사회적지향
3.이주집단의신앙·가치관과‘칠보행사도’

맺음말

보론6세기고구려의북위北魏말유이민수용과‘유인遊人’
1.‘유인’관련기사의검토
2.북위말유이민의안치와지배

출판사 서평


민족국가의틀과일국사적관점에서벗어나
동아시아라는거시적공간에서고구려를이해한다

4세기초반이래낙랑·대방군고지(2군고지,현재의황해도·평안도일대)에외래이주민관련고분들이다수나타나게된배경은당시동아시아의역사상과무관하지않다.4~5세기에화북동북부에서요서-요동-고구려로이어지는공간은인적유동(流動)이이루어지는통로였을뿐만아니라,여러정치체가공동의이해관계를놓고상호경쟁및연합을이루기도하는지역적‘연속성’을갖고있었다.이시기동아시아의정치적격변과혼란속에서중국왕조의변경에있던군현들이차례로소멸하는과정,그리고1세기가까이지속된거대한유이민파동과이를두고화북의주요세력들이이주민확보를위해경쟁을벌였던현상등은동북부의고구려에도일정한정책적대응을요구하는상황으로이어졌다.
고구려는다양한종족으로이루어진일종의다문화이해공동체였다.고구려라는영역과경계내에서정치·제도적발전상에만주목한다면결코고구려의다원적국가상을파악할수없다.따라서일국사적관점과국가의성장,지배체제중심의연구시각에갇혀있던고대의다채로운자료들을새로운시각으로재해석하는것이필요하다.그래야만4~5세기만주와한반도에걸친넓은영역과그내부의다양한종족들을구성원으로삼았던고구려가화북의정치적변동과추이를긴밀하게파악하는가운데내부의정책을조율하고적용했던과정을이해할수있다.

고분속벽화와묵서는무엇을말해주는가
이주민집단의존재양상과주민구성

4세기초반서진(西晉)왕조의붕괴와동시에화북일대가큰혼란에빠지면서많은유이민이발생했으며,이과정에서동북아시아의여러국가들은화북의이주민을자국에유치하려는다양한노력을기울였다.고구려에도화북에서유입되는이주민이적지않았는데,이들을수용하는데는고구려정권의의도도상당히작용했을것이다.
저자는고구려가이이주민들을2군고지의곳곳에안치했다고본다.2군고지는서진정권의붕괴로인해중앙의지원을받을수없어사실상소멸단계를밟고있었다.고구려는바로그곳에생산기반과수취체제를복구할필요가있기때문에이주민들의노동력을적극활용했을것이라고추정하는것이다.
2군고지내중국계망명인들의고분에는묘주의공적사적일상이묵서와벽화로표현되어있는데,특히묘지(墓誌)의기록이흥미롭다.거기에는중국지명이관칭된태수·자사호등의지방관호도보이며,당대행정지명이아닌과거시기의주·군단위명을활용한사례도나타난다.이는4세기이래원래살던지역을떠난화북의이주민들이타지에서도자신들의정치·사회적지위와관련된지연(地緣)을그대로유지하려는관성을지니고있기때문이다.2군고지의동수와진의고분에서과거의주·군·현단위본적지명을표기한사례는출신지인식에대한그들의보수적인성향과무관하지않다.
고구려는2군고지에안치한고위망명인들각각의예하에다양한지역출신의이주민들을편성했다.동수·동리·진등망명인들의개별관할지내에는유주와요동등지에서이주해온이주민외에도그주변에원래거주했던한인(韓人)과예인(穢人)을비롯하여낙랑·대방출신을표방하는일부토착주민이함께편성되기도했다.토착민까지일부포함된이러한다양한주민구성은개별망명인들이임의로편성한결과로보기어렵다.고구려가그들을제어하고통제하기위해적극적으로개입한결과라고보는것이자연스럽다.

덕흥리벽화고분의칠보행사도는어떻게바라봐야할까
이주민의사회상,정서와이념,신앙적지향

덕흥리벽화고분내묘지·묵서는연속된장면배치를통해이야기가전개되는방식,즉일종의서사가이루어지고있다.필자는이서사를이해하기위해덕흥리벽화고분전실의관람순서를보여준다(222~223쪽그림참조).이에따르면덕흥리벽화분의전실은관람객이최초남벽의출입문을통해들어올경우제일먼저시선이가는맞은편북벽의통로문상단에묘지를배치했으며,이후시계방향으로북벽우하단의행렬도→동벽의행렬도→남벽통로문좌측의행렬도→남벽통로문우측의막부관리도→서벽의13군태수내조도→북벽출입문좌측의묘주도순으로이어진다고한다.이와같은서사와구성의도는묘주의주변인들과외부의시선을고려하여대외용으로만들어졌을가능성이있는데,외부관람자를뜻하는‘관자(觀者)’관련묵서역시같은의도로제작되었을가능성을높여준다.이는중국문화에기반을둔묘주일족의정서·지향을같은처지에있던휘하의이주민사회와함께공유함으로써궁극적으로는서로간의결속을강화하려는목적과관련이있다고할수있다.
한편,덕흥리벽화고분의칠보행사도는기존에고구려중앙정부가개입하여치른공적행사로보는경향이있었지만,필자는묘주진의관할지에서열렸던일상행사의모습이라고파악한다.묘주인진,혹은고분의제작자들은현실(玄室)안의많은연꽃도안과칠보행사도를통해묘주가평소중시했던불교신앙을그의사적공간에서최대한강조하려고했으며,묘주자신의신앙적지향을외부에드러내려고했다고본다.또한이지역에안치되었던소규모집단이자신들의문화적특성을유지하면서장기간거주했던양상을보여주는근거로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