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일보의 탄생

조선·동아일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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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마침내 100년의 역사를 맞이한 두 신문
유구한 역사 속에 감춰진 사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바꾸게 만들었다. 헌병 경찰을 이용한 강압적인 무력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변화다. 통치방침의 변화에 따라 언론통제가 완화되면서 ‘조선 민족의 불평을 완화해주는 안전판이며 민심의 흐름을 살피는 바로미터’로 한글신문 창간이 허용되었고,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같은 해 4월 1일 창간되었으니, 2020년에 두 신문 모두 창간 100돌을 맞았다. 저자는 이 두 언론에 성대한 상찬과 비판이 있어야 할 100주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논쟁도 없이 사사(社史) 속 궤변이 인용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동안 연구한 일제하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과 경영, 폐간에 이르는 과정을 파헤쳐 근대 신문의 역사를 구성했다. 보통 우리는, 일제 말 천황을 떠받들고 친일 기사로 도배되었지만 적어도 창간 초기에는 정간과 압수를 당할 정도로 항일을 내세웠다고 믿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가해진 몇 번의 압수와 정간 사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등이 두 신문을 ‘민족의 정론지’로 인식해온 이유였다. 사실, 또 그렇게 학습해왔다.

우선, 하나의 큰 사실부터 바로잡는다. 바로,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다. 대체로 많은 사람이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대정실업친목회라는 경제단체로 알고 있다. 그에 맞게 조선일보는 비정치적인 ‘실업신문’을 표방했으며, 그 창간 목적이 주효했는지 조선총독과 경무국장으로부터 창간 허가를 따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대정실업친목회가 아니라 정확히 대정친목회이며, 이 단체는 내선융화운동을 목적으로 경성의 유지들이 조직한 친일단체였다. 그런데 창간 초기 조선일보는 불온한 기사로 23회에 달하는 발매 반포 금지와 두 차례의 정간을 당하며, 30건의 기사를 압수당한다. 정간과 압수는 곧 일제의 탄압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저항(항일)으로 연결된다. 조선일보의 ‘항일’ 이미지는 이때 처음 대중에 인식되었다. 이 지점에서 큰 의문이 생겨난다. 친일단체가 만든 신문사의 항일 기사라니! 이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는 무엇인가?

당대에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개벽』 필자는 조선일보가 대정친목회의 주의·강령을 돌아보지 않고 경영난 타개를 위한 신문 판매 확장책으로 항일 기사를 게재했다고 본다. 기업 경영에는 능했지만 신문 경영에는 어설펐고, 3·1운동 이후 독립의 열망을 끓어오르던 세태를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당대 의제를 선점하지 못한 채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결국 최다 압수를 당하고 독자를 만나지 못한다. 아무리 민족적 기사를 쓰고 항일 기사를 쓴들 그것을 읽는 독자를 만나지 못하면 기사의 생명력은 없다. 조선일보에게 영업용 항일 기사는 단기적으로 득이 되지 못한 셈이었다.
저자

장신

연세대학교사학과에서학사와석사를,성균관대학교동아시아학과에서「1930·40년대조선총독부의사상전향정책연구」로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인문학부에서한국근대사를가르치고있다.조선총독부의사상통제정책과인사정책,식민주의사학을중심으로한역사학의생산과유통,동아일보·조선일보의경영과편집권의관계등을연구하였다.진행중이거나계획하는연구는‘감시와미행-한국근현대요시찰제도의역사’,‘명문과학벌의탄생’,‘방응모평전’등이다.

목차

1장.1920년대정친목회의조선일보창간과운영
1.창간초기조선일보연구의쟁점
2.대정친목회의조선일보창간
3.대정친목회의조선일보경영
4.실업없는‘실업신문’
5.판매용‘항일’신문:‘광적狂的신문’의본질
6.‘창간일등신문’의생존법

2장.1924년동아일보개혁운동과언론계의재편
1.내분과개혁사이
2.주식회사발족전후동아일보주도층의변화
3.동아일보개혁운동의전개
4.개혁운동의귀결과언론계의재편
5.개혁의실패는혁신으로

3장.1930년대초조선일보의부침과잡지『신조선』
1.『신조선』의창간
2.조선일보사의경영권다툼
3.『신조선』의속간과재휴간

4장.일제하노정일의언론관과중앙일보경영
1.중앙일보연구의필요성
2.노정일의생애
3.노정일의언론관
4.노정일의『중외일보』인수
5.노정일의중앙일보

5장.1930년대언론의상업화와조선·동아일보의선택
1.친일의계기를둘러싼논점
2.1930년대초언론계의재편과상업화
3.1936년일장기말소사건의발생과동아·『조선중앙일보』의선택
4.중일전쟁의발발과조선일보
5.언론에서기업으로

6장.조선총독부의언론통제와동아일보·조선일보폐간
1.의문의강제폐간
2.동아·조선일보의뒤바뀐역사
3.조선총독부의언론통제계획
4.경무국과조선일보·동아일보의폐간협상
5.명분과실리,그리고역사

부록
자료소개238|부록1:동아일보사의『취체역회결의록』242|부록2:조선언론기관의통제지도책293|부록3:언문신문통제에관한건307

출판사 서평

개혁의실패는혁신으로
동아일보의개혁,조선일보의혁신

동아일보는김성수의자본을기반으로창간되었지만창간초기에는경영권이특정개인에게집중되지않았고,전하는기사는민족주의와사회주의,유심론과유물론을오가는다양한스펙트럼을보였다.그러나‘조선민중의표현기관’을자임하던동아일보도자금난을피해가지못하고1921년주식회사로발족했다.주식회사출범후동아일보의주도층은대주주김성수와그의의중을대변하는사장송진우로바뀌었으며,신문의논조도조선의즉각독립을보류하고현실이허락하는범위내에서운동을전개한다는방침을수용했다.지면은창간정신보다주식회사의입장에충실한방향으로나아갔고,수익을더욱중시하게되었다.
이에동아일보내부에서는경영진과사원의갈등이쌓여가고외부에서는동아일보의개량화와상업화를비판하는목소리가커져갔다.1924년이광수의「민족적경륜」의연재는동아일보에대한공개성토의계기가되었다.마침내동아일보기자들은경영진퇴진을요구하며개혁운동을전개한다.편집국장에인선된홍명희는개혁이전의대주주입장을반영하던동아일보와명확히선을긋고공리공복을위한신문으로만들고자했으나김성수와그의형제들은주식을대거매입하여소유상의지배권을강화했다.
개혁주체들은끝내개혁을성공시키지못하고퇴사하면서조선일보로옮겨갔다.동아일보개혁세력은조선일보에서그뜻을펼치게되었고조선일보혁신에들어갔다.바로이혁신을계기로조선일보는그사사에서자랑하는,민족주의좌파와사회주의자들의통일전선인신간회의기관지가되었고,이때의항일운동을적극내세우게된것이다.

왜그들은소위'친일'로나아갔는가?
기업과샐러리맨으로서신문사와기자

저자는동아일보·조선일보를민족지와친일지로구분하는이분법적사고보다는그들이무엇을계기로친일로나아갔는지를살펴본다.1920년대중반동아일보의개혁운동,조선일보의혁신운동이있었음에도두언론사는확실히1937년중일전쟁이후친일적으로노골화했다.폐간직전의논조는조선총독부의기관지『매일신보』와다를바없었다.신년호1월1일1면에는일왕부부의사진이실리고조선총독의연두사가실렸다.친일의고착화-이는총독부의언론탄압으로인한부득이한것인가,아니면타협과자발에의한것인가.
동아일보는1925년막강한자본력을바탕으로김성수가경영권과편집권을장악하고,조선일보는1933년방응모에게인수되고그의사장취임을계기로소유주의언론관이편집에영향을미치게된다.고질적인경영난은언론사의상업화를부채질했다.과거저항의상징이던압수나정간은기업경영을위해피해야하며,광고유치에온힘을기울였다.편집국장의주된업무는일제의검열수준을벗어나는데있었다.그러나총독부의정책을비판하면서민족의식을고양하는기사를좋아한독자도만족시켜야했으므로한글신문들은독자와총독부사이에서줄타기를잘해야했다.이러한사정을잘알던총독부도언론사에천천히압박을가하면서신중했는데,이같은통제정책은1936년일장기말소사건과1937년중일전쟁을계기로180도전환했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조선중앙일보는사실상의정간과다를바없는휴간에이어결국1937년폐간되었고,동아일보도무기정간을당했다.폐간과굴복의기로에서동아일보는주식회사의파탄을막는다는명분으로총독부의「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을수용하고인사개혁요구를받아들였다.한편조선일보는총독부의탄압이들어오기전에신문사가입을피해를최소화해야한다는논리로순응의길을택했다.
동아일보나조선일보내에는민족주의의지도적지위를포기하지않는다수의기자들이존재했지만,이미그들은신문사에고용된샐러리맨에지나지않았고,주식회사의경영에관여할수도없었다.언론의편집방침은이윤을얻으려는기업적가치에충실하면서더욱적극적으로친일로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