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17.00
Description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에 대해서 지도부와 엘리트가 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민중이 만세시위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다. 만약 33인의 독립선언만 있고 방방곡곡에서 그에 호응한 만세시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큰 조직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33인이 지도자로서 받게 되는 존경 또는 실망도 지금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자임’을 추인하여 명실상부한 ‘대표’로 만든 것은 나라 안팎의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우리는 만세시위 참여자를 잘 모른다. 참여 민중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다.
저자

정병욱

고려대학교사학과와동대학원에서한국사를공부하고‘일제하조선식산은행의산업금융에관한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으며,현재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교수로재직하고있다.2011년2월부터2016년2월까지계간지『역사비평』의편집주간을지냈으며,저서『식민지불온열전』으로2014년제14회지훈국학상을수상했다.최근관심주제는민중의일상과공공역사다.주요논저로『한국근대금융연구:조선식산은행과식민지경제』(역사비평사,2004),『일기를통해본전통과근대,식민지와국가』(공저.소명,2013),『식민지불온열전』(역사비평사,2013),「1931년식민지조선반중국인폭동의학살현장검토」(『사총』97,2019)『유언비어(1)아시아태평양전쟁발발과‘불온언동’』(공편역.동북아역사재단,2021)등이있다.

목차

0최흥백,두만강을건너다
1단천천도교인최덕복의어떤결심
2평양시민,경찰서에돌질하다
3수안의황천왕동이홍석정,한낮에비로소쉬다
4심영식,겉눈만못보지속눈마저못보는줄아냐
5삼일운동참여자수감사진의비밀
6태형,고통의크기
73월22일서울남대문역부근만세시위,누가주역인가?
83월말서울의만세시위,‘군중’
9수원군장안면·우정면만세시위,“많은인민을이길수없다”
10제주신좌면만세시위,그후

보론1:‘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와사료비판
보론2:1919년3월황해도수안만세시위의재구성
보론3:삼일운동과학력주의의제도화

출판사 서평

한국인이라면다아는삼일운동
왜‘낯선삼일운동’일까?

“유구한역사와전통에빛나는우리대한국민은3·1운동으로건립된대한민국임시정부의법통과불의에항거한4·19민주이념을계승하고,…”

삼일운동은대한민국헌법전문에도나온다.한국인이라면다알고,모르는게오히려이상한데‘낯선삼일운동’이라니?대체무엇이낯설다는거지?
저자는엘리트가남긴사료중심으로연구,서술되는역사를비판한다.삼일운동도예외가아니어서,지난2019년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국가기록원이공동주최했던삼일운동100주년특별전시회뿐아니라전국에서열린삼일운동100주년특별전이모두‘엘리트중심의전시’였음을분석해냈다.삼일운동관련피고인중근대학교교육을받은자는19%에불과한데도전시에서는76%를차지하고있다며,엘리트편향은결국민중의주변화나실종이될수밖에없다고말한다.박물관관계자는유명하지않거나엘리트가아니면자료가없어전시를할수없다고하지만,저자는그런생각에의문을품으며,단지의지와방법,그리고시간의문제라고일침을놓는다.너무빛나는엘리트위주의사료만보다가눈이멀고귀가먹은것인지도모른다고말한다.
이책은민중의삶으로들어가그들의눈으로삼일운동을바라보게한다.저자는뭉뚱그려진민중의모습이아닌삼일운동참여자로서개인의생애에도주목한다.여러차례에걸친현장답사와꼼꼼한사료분석을통해삼일운동이일어난마을과사건을재구성하고그속에서삶과일상을놓치지않는다.이책은그동안눈멀고귀먹은우리가낯설지만더듬더듬삼일운동의주역을찾아가는길을안내해준다.


밤새걷고또걸어독립선언서를전달한홍석정
그의최후와살아남은사람들의삼일운동

1919년당시쉰네살의홍석정.황해도수안군의전천도교교구장인그는3월2일새벽3시독립선언서를이웃한곡산군에전달하고돌아와서3월3일새벽6시수안면만세시위에앞장섰다.수안군에서곡산군까지는90리,35.3km다.하루꼬박90리를왕복하는게가능할까?그것도잘닦여진평탄한길도아니고산길이다.게다가쉰네살의젊지않은나이다.
젊은나이도아니지만,서울중앙교구에서보낸중요문서를아무에게나맡길수없기에전수안교구장홍석정이맡게된것이다.그는곡산에가서‘조선독립만세를부르면독립이되니그렇게하라’며독립선언서를전달하고,돌아오는길에도몇집을들르고길에서만나는사람에게도시위에나오라고권유했다.판결문에나오는수안면의1~3차만세시위참가자58인중22인이홍석정의연락을받고시위에나섰다고하니,그가얼마나바삐움직이며사람들을만났을지충분히짐작된다.
3일새벽6시홍석정을포함한1차시위대는헌병대를찾아가항의하고헌병분대를인도하라는구호를외친뒤돌아왔다.그전날헌병대의수안교구실압수수색과수안교구실간부연행에따른항의성격이짙다.이후교구실은교구실대로,헌병대는헌병대대로각기대책을마련한다.수안교구실은군내각지에서몰려들교인들의만세시위를준비해야할터이고,헌병대는또다시있을시위에대비하기위해헌병·경찰외에도일본인상인과사냥꾼중에총기소지자를불러모았다.
그런데11시30분쯤헌병대쪽에서총소리가났다.수안면의옛서부면거주자들과대천면사람들이수안면석교리교구실로오다가헌병분대앞을지나가면서만세를외쳤는데(2차시위),헌병대는해산에불응한1차시위대가다시시위에나섰다고판단하여총격을가한것이다.
교인의사망소식을들은교구실간부와교인들이다시나섰다.3차시위의시작이다.이시위에서는구경하던열두살소녀가총에맞아사망하는등,일제검경의4월말집계보고에따르면13명이사망하는잔혹한진압이이루어졌다.180리(약71km)길을밤새걷고또걸어곡산에독립선언서를전달하고,사람들에게시위를독려했던홍석정도이3차시위에서총을맞는다.밤새걷느라눈한번제대로붙이지못하고,다리한번펴지못한채만세시위에참여했을홍석정은그제서야쉼을얻고눈을감는다.
3차시위에서살아남은한병익은곡산으로가수안의피해사실을알리고곡산의만세시위에까지참여한다.그는이일로내란죄로기소되어경성의법정에까지서게된다.

본문「3.수안의황천왕동이홍석정,한낮에비로소쉬다」는「보론2:1919년3월황해도수안만세시위의재구성」과같이읽으면좋다.「보론」에서는조선총독부판검사가수안군시위에‘내란죄’를적용하기위해쓴‘습격’,‘폭동’이라는단어를역사학자들이사료비판없이긍정적의미의관점으로바꿔‘공세적시위’라고서술하는데반대한다.저자는‘습격’이나‘공세적시위’가아니라해서수안군시위가격렬하지않았다는뜻은아니며,그의미도깎이는것이아니라고강조한다.오히려저자가주목하는바는나라가사라진상황에서종교공동체·지역공동체에속한그들이독립만세를부르며요구하는‘구속자석방’의의미가결코가볍지않다는데있다.즉,그역시식민권력에대한도전이며부정이라는것이다.


삼일운동수감자머그샷의비밀
그들은단체로사진을찍혔다!

역사영화는작가의상상이들어가있다고는하지만사료에근거한팩트체크가기본적으로되어있을거라생각하고,신문기사는공신력이있다고생각해아무런의심없이받아들일때가많다.그러나무턱대고사실로믿어버리면안된다.영화,신문,인터넷자료의정보가모두사실은아니다.
우선,제일많이잘못알고있는사실하나.유관순의수인번호.1965년3월26일자『동아일보』는치안국에서유관순수감사진을발견했다며그의수인번호를‘371’이라고했다.

“이사진은유관순양이3·1만세운동때왜경에잡혀서대문형무소에수감됐을때찍은것으로푸른수인복을입은유양가슴에는‘371’의수인번호가뚜렷하다.”
―『동아일보』1965.3.26.

2019년개봉한영화<항거:유관순이야기>에도유관순의수인번호는371이다.그러나371은수인번호가아닌‘사진원판보존번호’이다.즉,<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부착할사진을인화하는데쓰인원판의번호라는것이다.
저자는수안면만세시위로잡힌이들의수감사진을들여다보다가놀라운발견을한다.인물카드에는개개의인물사진이보통의사진처럼사각형이아닌양옆이비스듬히잘려나가거나한쪽이사선으로잘려나가있다.이들사진을잘린면을중심으로맞춰보았더니5~6인씩찍은단체사진이었다(81쪽,<그림15>와<그림15-1>참조).사진의오른편에는(보는사람의시각으로는왼쪽)많은사람들이수인번호로착각한보존번호가일련번호로적혀있다.보존번호가이웃한다는것은곧같은사건으로잡힌이들일가능성이매우높다.개별카드에부착된사진만으로는도저히알수없는사실이다.20세기초부터사람의초상이찍힌사진이민중통제에이용되기시작했는데,문제는비싼비용때문에한사람씩찍을수없었던것이다.
단체사진속각각의인물사진가장자리를많이오려버린탓에수안면만세시위자수감자사진처럼잘연결되지않지만,이승훈,한용운,최남선도함께찍혔을가능성이높다(87쪽,<그림18>참조).1864년생이승훈,1879년생한용운,1890년생최남선이벽돌건물앞에나란히서있는모습을잘라진사진속에서상상해볼수있다.저자는50대,40대,30대가나란히같이서있는사진을보면서여러세대의같은소망이담긴삼일운동을생각한다.



<편집자노트>
저자는2013년에『식민지불온열전』을펴냈다.식민지권력이일상영역에침투하고통제를강화하며삶을옥죄던때불온한언동을했다는죄로검거된사람들의이야기다.일제강점기독립운동이라는거대역사대신,당대의작은개인들의삶에주목하고그들의일상과저항을복원했다.저자스스로‘불온한글쓰기’라이름한,역사적사실을존중하면서행위자에어울리는이야기식글쓰기,분석과검증,그리고상세한주를단논문식글쓰기를병행했다.『낯선삼일운동』도저자의그같은글쓰기의연장선상에있는데,서사가한층풍부해졌다.『낯선삼일운동』의주인공을따라가다보면가슴찡한감동과뭉클함이밀려온다.
2016~2017년광화문광장에서촛불시위가벌어질때친구하나가다섯달가까이매주한번도빠지지않고참석했다.추운날씨에독감까지걸려기침을해대면서도촛불을들고광화문에나갔다.왜그렇게가냐고물었더니“그래야만할것같아서...그래야바뀔것같아서...”촛불시위에참여했던사람들이그리는사회상이다똑같지는않았을것이다.그러나적어도국정농단사태를두고만볼수없고사회가,정치가좀더나은방향으로가길원하는바람은같았을것이다.1919년삼일운동에참여한보통사람들의마음도그렇지않았을까?나라가사라진상황,헌병경찰통치하이미폐지된태형이아무렇지도않게다시시행되고,자유와권리는탄압되는상황에서만세시위에참여하면세상이달라질수있다고생각하지않았을까?
저자라면1919년민중의삼일운동을썼듯이,먼훗날시민이주인공인촛불시위를역사적서사구조를가지고감동적으로서술할수있을듯하다.



<책속에서>

첫문장
p.14:1869년9월9일최흥백은자식둘을데리고두만강을건너러시아로?들어갔다.


p.30:어쩌면그에게‘독립’은자신과동료를죽이거나죽이려했던사람들과함께나라를만든다는결심이었을지모른다.‘만세’는그것이일본의지배하에서노예처럼사는삶보다낫다는외침이아니었을까.

p.44:“국토는식민지,민족은노예”

p.70:경찰,“장님이무슨독립운동을한다고육갑이냐.”심영식,“겉눈만못보지속눈마저못보는줄아느냐.”

p.88:삼일운동은여러세대의같은소망이담긴운동이었다.

p.104:삼일운동은?‘태형’으로?상징되는?1910년대?‘무단통치’를?끝냈다.?삼일운동이?조선총독부의?지배에?끼친?영향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경찰·헌병의?범죄즉결사건?수와?그?처분?인원수의?추이다<그림?21>.?경찰과?헌병?수는?거의?변함이?없는데,?범죄즉결사건?및?그?인원수는?1919년과?1920년?망치로?두들겨?맞은?것처럼?축소되었다.?경찰?수가?대폭?늘어난?뒤?1920년대?중반에?가서야?삼일운동?이전?수준을?회복했다.?삼일운동이라는?‘망치’에?얻어맞아?1910년대?‘무단통치’기에?구축된?경찰·헌병의?통치력,?일상적?민중?통제?장치가?찌그러진?것이다.?

p.124:민족?차별도?계급?차별도?싫다.?이러한?민중의?높아진?평등?의식,?차별에?대한?감수성?위에?「대한민국임시헌장」(1919.?4.?11)?제3조?‘대한민국의?인민은?남녀,?귀천?및?빈부의?계급이?없고?일체?평등하다’도?나오고,?1920년대?사회주의의?바람도?불었다.?

p.143:약자로서?강자에게?정의,?인도,?평화를?요구한다면?자기와?비슷한?또는?자기보다?약한?자에게도?똑같이?정의,?인도,?평화로써?대하는?것이?상식이다.?민족?내부의?강자와?약자?관계도?마찬가지다.?그렇게?대하지?못하는?어떤?이유를?댄다면?그것은?거꾸로?자신에게도?적용될?수?있다.?민족주의는?상식이?통하지?않게?하는?구분과?배제의?힘이?있다.?삼일운동이?던진?과제는?깊고?커서?‘민족주의’만으로?풀?수?없다.

p.165:많은?인민을?이길?수?없다.?사람이?많이?모이면?하늘도?이길?수?있다(人衆勝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