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 편지 한 장으로 족합니다 (고문서와 옛 편지에 관한 에세이, 독사수필)

문안 편지 한 장으로 족합니다 (고문서와 옛 편지에 관한 에세이, 독사수필)

$25.00
Description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
동국진체, 추사체, 그리고 연암과 다산의 글씨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의 형태로 군자와 소인이 드러난다.” 중국 한나라 양웅의 『법언(法言)』에 나오는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글씨를 마음의 그림, 즉 마음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았다. 글씨에 대한 생각이 이러했기 때문에 안부를 묻는 간단한 내용의 간찰에서도 성정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이 책은 간찰과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의 역사, 정치, 문화, 생활을 살펴보지만 단순히 간찰과 고문서의 내용과 그 해설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특히 1장 「간찰로 글씨를 읽다」에서는 간찰 속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 편지 발신인과 수신인의 사연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추사체’, 연암 박지원의 생동감 넘치는 서체,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이른바 실용적인 서체 등을 간찰의 내용과 함께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간찰과 고문서의 실제 유물을 생생히 볼 수 있도록 해당 도판을 모두 싣고 있으며, 1~3장은 간찰을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각각의 편지에 쓰인 주인공의 필체를 빠짐없이 느껴볼 수 있다. 그런데 1장에서는 더 나아가 글씨에 대한 편지 주인공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송하 조윤형은 정조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당대에 표준이 되는 글씨를 구사한 인물이다. 그는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서체, 즉 동국진체의 맥을 잇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는 첫째로 경홍景洪(한석봉)을 칩니다. 그런데 백하白下(윤순)가 손가락과 팔뚝 사이의 기운을 펴내는 삼매경도 역시 좋지 않습니까?” -19쪽.

연암 박지원은 족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상서체가 비록 벼슬하는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대가의 필법은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김수항이나 윤급의 글씨가 우아하기는 하지만 풍골이 전혀 없어서 대가의 필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박지원의 글씨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 그의 글씨에서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글씨를 ‘기운생동’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다. 조선시대 글씨와 학문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글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글씨도 느껴볼 수 있는, ‘책 속의 서예작품 전시관’이라 할 수 있다.
저자

김현영

서울대학교인문대학국사학과를졸업하고국사편찬위원회에근무하면서조선시대사와고문서학을공부했다.1999년,2003년에는그동안공부해왔던연구를정리하여『조선시대의양반과향촌사회』(집문당,1999),『고문서를통해본조선시대사회사』(신서원,2003)로간행하였다.
근래에는『동사강목』을저술한역사학자순암안정복의자료를정리하여그성과를발표했고(『순암안정복의일상과이택재장서』,성균관대출판부,2013),박제가나통신사와같은동아시아문화교류의선진적인물들에대해서도공부하였다(『통신사,동아시아를잇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13;『초정박제가연구』,사람의무늬,2013).최근에는간찰강독의성과를모은글들을기획편집하여펴냈다(『내가읽은옛편지』,도서출판다운샘,2019).

목차

1.간찰로글씨를읽다
동국진체와송하조윤형/벼루열개를구멍내고:간찰체는따로없다/기운생동,연암의글씨/현란한문장:추사가초의에게보낸편지/실용의도구로서간찰:다산의생각/19세기조선의‘동파열’과소동파의「백수산불적사유기」

2.간찰로역사를읽다
부채정치와책력정치/책력하나보내오니산중갑자헤아리십시오/소치의그림값/소치의아들/슬픔을달래주는편지/선비에게가장핍근한것,『유자최근』

3.간찰로생활을읽다
선비들이쓰는꽃편지,시전지/세벗들의우정어린편지,『삼현수간』/나리님덕택이라고:신현이지방수령인형신진에게보낸간찰/‘구름위진사’이야기:이이기가재종최몽현에게보낸간찰/연담선사를그리며:다산이완호화상에게보낸편지/노사심화:노사기정진의간찰

4.고문서로역사를읽다
바위틈에핀들꽃:장예원속신입안/노비가된대학자:정의의법정,「안가노안」의재해석/노비를사고팔다:백문문기와관서문기/이계송,송씨가문을계승하다:1580년담양부입안/집안의기대주,문과에합격하다:임장원의문중과채수기/온집안이축하하는과거합격:신응망의등제별급문기/18세기서울의샐러리맨:녹패

5.고문서로정치를읽다
문서의양식,의례의표현:조선시대의외교문서/‘즈다오’,‘즈다오러’:거행조건/영조의어필정치:갱재첩/정조의비답정치:상소와비답/제대로천거하지않았다면재앙을입으리라:사관의자격317/율곡의붓아래완전한사람없다:사초와사필/송강이겪은임진왜란:『백세보중』

6.고문서로생활을읽다
추노,그리고비첩의정조/면앙정선생의가마를메다:하여면앙정/북을울려공박하다:정약용의명고시/너무마음이아파기록한다:『순암책력일기』의이면/임금이사랑한소나무,어애송/국왕의친인척관리:정조가김한로에게보낸간찰/문안편지한장으로족합니다:서애유성룡이만경현령이준에게보낸편지

출판사 서평

간찰속다양한생활모습
그림값을요구하고,슬픔을달래주고...

추사김정희로부터‘압록강동쪽에서최고의솜씨’로인정받은소치허련은호남문인화의비조이며,헌종의부름을받아궁궐에서그림을그려올려극찬을받은인물이다.그런그가해남향리에게속마음을적나라하게내비친편지를보냈다.

“…폐일언하고객지에서수족을마음대로하는일이과연어렵습니다.그에구애받지말고10량을주시면어떻겠습니까?저는이돈이없으면보존하기가어렵지만,당신은이돈이없어도축이나지않을것같으니이름에맞게의리를생각해주시면어떻겠습니까?…”-99쪽.

조선후기의대표적화가소치허련은김정희,권돈인,흥선대원군,민영익등명류들과폭넓게교유관계를가지며당대에이미명성이자자했다.그림솜씨는두말할나위도없을정도다.
하지만해남의한향리가그에게그림을부탁하고그림값을제대로치르지않았던모양이다.그림값을제대로쳐달라는소치허련의요구는굉장히노골적이다.그가살았던시대는그림그리는일만으로는생활을영위해나가기가어려웠다.

『이재난고』의저자이재황윤석과송상은은열세살차이지만한스승아래서과거공부를함께하고,서로학문을강론하는벗이었다.돌림병과굶주림으로인해친구송상은이세상을떠났지만돌림병이가라앉지않아황윤석은조문을가지못하고그아들들에게위로의편지를보냈다.위장또는조장이라고도하는이조문편지에는벗과의교유관계가그려지고있다.죽은사람을애도하는글은깊은감동과슬픔을자아낸다.

이외에도여러간찰이소개되고있는데,동생이형에게보내는편지에서(신현의편지),아비가아들에게보낸편지에서(연암박지원의간찰과소치허련의간찰),스승이제자에게보낸편지(노사기정진의간찰)등에서조선시대다양한생활모습을살펴볼수있다.


집안의최고경사,과거합격
재산을물려받기도했지만,빚도져야했던...

두건의대비되는고문서가눈길을끈다.둘다온집안의경사인과거급제와관련있는문서다.소과를거쳐대과에급제하는일은양반이라면누구나꿈꾸는바람이지만,결코쉽지않은일이다.평생과장(科場)에만출입할뿐합격의영예를누리지못한양반도많다.기껏해야소과에합격하여생원이나진사가되는것이고작이고,대과에합격하여관리로임용되는것은그야말로하늘의별따기다.그러니대과에합격하면본인은물론이고가문과문중의크나큰영광이고경사였다.‘삼일유가’라하여사흘간스승과선배들을찾아다니며인사를하고거리에서풍악을울렸으며,‘도문연’이라하여친지들과지역유명인사들을초청하여잔치를베풀었다.
이도문연을벌이기위해전라도보성양반임장원은문중에서논을빌려팔아빚을지고그빚을갚겠다는‘과채수기(科債手記)’를썼고,영광양반신응망은이도문연에서어머니로부터과거합격을축하받으며재산을상속해준다는별급문기를받았다.

양반에게과거합격의의미가얼마나큰지,또빚을지고서라도잔치를크게벌여야했던현실,집안과가문을빛낸과거합격자에게미리재산을떼주는모습까지고문서가알려주는정보는생생하다.


영조의어필정치,정조의비답정치
고문서속에나타난영·정조의정치

영·정조시대는이야깃거리가무궁무진하다.이책에서주목하는것은영조가세손및여러신하들과함께운자에맞춰시를짓고화답하여만든『어제갱진첩』,그리고정조가홍문교교리이동직의상소에대해친필로비답한문서이다.
1770년영조는『중용』읽기를마친세손과16명의신하들과함께갱재(?載),즉시를이어지으며화답하는자리를가졌다.영조가먼저‘중(中)’자운으로“孫仝講一堂中(할아비와손자가한곳에서공부를하네)”라고하니,세손이“聖誨欣承一部中(성스러운가르침이기꺼이한부의중용에있네)”라고화답하였다.이어채제공등여러신하들도갱재하였다.자리가파한뒤영조는함께시를지은신하들에게글씨첩을만들어나눠주었다.어필을받은신하들이얼마나감격했을지짐작된다.『어제갱진첩』에보이는영조의글씨는노쇠하고병약한말년의글씨인데,부드럽지만강인한느낌을준다.
영조는기회만되면신하들에게어필시를비롯하여갱재시를첩으로만들어하사하였다.행사자리의시종신들에게어필을하사함으로써그것을받은신하들의충성심을끌어낸셈이다.저자는이를가리켜‘어필정치’라하였다.

호학군주로알려진정조는신하들이올리는상소나차자에일일이꼼꼼하게비답을내렸다.홍문관교리이동직의상소에대해직접쓴비답은폭37cm,길이240cm,1,100여자에이르는장문이다.하루에도수십건씩상소나차자가올라오는데,그중에서정치적함의가짙은것은직접답변을썼다.정조는이동직이문체를빌미로정치적반대세력을제거하려한다생각했고,이를엄히꾸짖는비답을내렸다.『정조실록』과『홍재전서』에서는빠지고친필비답에만있는정조의비판은아주맹렬하다.
정조는비답뿐만아니라신하들에게편지를많이쓴것으로도유명하다.벽파의영수심환지에게4년간350여통의밀찰을보냈으니1년에거의100통가까이편지를쓰고,그밖에남인의영수채제공에게도비밀편지를보냈다.저자는정조의이러한정치를‘비답정치’라하고,그의갑작스런죽음에‘과로’도큰영향을미쳤을것이라본다.

【편집자노트】
그림또는공예품전시회를관람하거나박물관엘다녀오면너무많이본탓에간혹무엇을보았는지헷갈릴때가있다.이책의저자도학생시절사찰답사를다닐때너무많은사찰을둘러봐서어느절이어느절인지구별이안될정도였다는말을했다(136쪽).누군가내게이런말을한적이있다.모든것을마음속에다담아내지못한다면마음을끌어당기는서너점만떠올려보라고...
이책에소개되는간찰과고문서는하나같이귀하고음미해볼만한자료들이다.거기에담긴이야기도흥미롭고,역사를공부하는재미가느껴진다.하나도허투루넘길수없다.그럼에도불구하고세가지만꼽으라면다음을말하겠다.
1.연암박지원의간찰(1장「기운생동,연암의글씨」34~43쪽)
2.소치허련의간찰(2장「소치의그림값」98~107쪽)
3.초의선사가그린〈다산초당도〉(3장「연담선사를그리며」180쪽)
연암박지원이아들에게보낸간찰은저자가그의글씨를‘기운생동’이라표현했듯이그진본을보는즐거움이있고,집안을챙기는아버지의살뜰한마음을느낄수있어좋다.또,그의문도인박제가를‘망상무도’하다며신랄하게비난하면서도,전혀거리끼지않고그들에게자신의편지를내보이라는말까지한다.솔직하다.문도에대한신뢰가아니면할수없는말이다.
소치허련은그림으로워낙유명한인물이다.산수화의대가이지만화업만으로는먹고살기힘들었던상황이간찰에고스란히나타나있다.해남향리에게그림값을노골적으로요구하고,사흘뒤그그림값을받은뒤에는돈과함께받은술을‘신선의물’이라비유하는답장까지써서보낸다.당시전업화가의곤궁한처지를짐작할수있는간찰이다.그림뒤에숨겨진또다른생활모습이다.
전남강진에있는다산초당은다산정약용이유배시절머물렀던곳으로,현재사적으로지정되어관리되는유적이다.이름은짚으로엮은초가집,곧초당인데현재모습은기와집이다.그래서이상했다.초의선사가다산정약용에게그려준〈다산초당도〉는확실히초가집으로표현되어있다(180쪽).옆에는네모난연못도그대로묘사되어있다.허름한이집에서실학을집대성하고강진만의바다를바라보았을대학자를상상해본다.
이책을읽는독자는무엇이가장마음에와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