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진영 너머로 (남북한의 중립·비동맹·제3세계 외교 (1948~1976) | 양장본 Hardcover)

냉전의 진영 너머로 (남북한의 중립·비동맹·제3세계 외교 (1948~1976)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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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진영 너머에 나타난 새로운 물결, 중립·비동맹
―냉전의 최전선에서 탈식민·탈냉전·평화의 새물결을 바라보다

1950년대 중후반 반둥회의를 계기로 지구적 냉전의 새로운 국제정치의 행위자로 중립·비동맹을 지향하는 국가들이 출현했다. 물론 오스트리아가 항구중립화를 선언하고 독립을 실현했던 것처럼 오래된 스위스식 형태의 중립국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록 중립의 내용과 성격은 다양했으나, 1950년대 후반 중립의 물결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남한 정부는 1950년대 출현한 탈식민 평화와 중립의 물결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평화와 중립은 공산 세력을 이롭게 하는 자유 진영에 대한 평화공세이자 중립공세일 뿐이었다. 반면 북한은 평화와 민족해방운동의 시각에서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를 보냈다.
비동맹에 대해 상반된 인식과 대응을 보인 남북한이지만, 평화와 중립의 효과를 평가할 때는 ‘대칭적 유사성’을 보였다. 평화와 중립이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만 따졌다. 반둥회의와 오스트리아 중립화 독립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가 표방한 중립외교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발원했다. 따라서 북한은 반둥회의와 오스트리아 중립화 독립은 환영하면서도, 사회주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출현한 중립은 반(反)혁명이자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대칭적’으로 남한은 헝가리 중립은 환영했으나, 자본주의 국가들이 다수 참여한 반둥회의와 자본주의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독립은 비난했다. 이처럼 1950년대 탈식민·탈냉전 평화를 지향하며 지구적으로 출현한 중립의 물결은, 냉전의 최전선인 분단된 한반도에 도달하자마자 강력한 양극적 원심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중립과 비동맹의 땅에서 경쟁하며 스스로를 증명하라
―아시아·아프리카회의장에서 다시 만난 남북한

1950년대 중후반 남북한은 자신의 진영을 넘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비사회주의 국가 또는 중립국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특히 1960년을 전후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이 증대하자, 아프리카 국가를 둘러싼 남북한의 외교경쟁이 본격화했다.
1961년 비동맹회의의 탄생과 성공은 냉전의 어느 한편에 서기를 거부하는 국가들이 지구적 냉전질서의 주요한 행위자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였다. 1964년 자카르타 준비회의 결정에 따라 남북한은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정식 초대국이 되었으며, 곧바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회의의 초청장도 받았다. 이로써 남북한은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한 이후 10년 만에 다시 제네바에서 마주 앉았다.
1960년대 초중반 아프리카 국가들의 급증은 아시아·아프리카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제3세계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증대하는 숫자만큼 국가들의 충돌도 증대했다. 또한 그동안 중립·비동맹을 이끌어온 주역들이 사망하거나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는 일이 발생했다. 특히 제3차 비동맹 정상회의가 1960년대 내내 열리지 못하면서, 비동맹회의는 국제정치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동시에 냉전의 진영 너머를 향한 남북한의 외교경쟁도 잦아들었다. 중립·비동맹의 시대가 저무는 듯했다.


탈냉전, 평화를 지향한 비동맹의 신념
―전쟁을 선동하는 냉전의 목소리에 제동을 걸다

1970년을 전후하여 미·소, 미·중의 지도자들이 긴장완화를 추구하며 지구적 냉전과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정세가 급변하고 비동맹 정상회의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특히 1973년 알제리 비동맹 정상회의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결의안이 채택되고 북한이 비동맹에 직접 가입을 시도하자 남북한의 외교경쟁은 격화했다. 1975년 페루 리마 비동맹 외상회의에서 북한은 남한의 방해를 물리치고 단독 가입에 성공했다. 북한의 비동맹·제3세계 외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북한의 비동맹 외교는 1976년 콜롬보 정상회의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북한이 제시한 결의안에 유보를 표시한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결의안 채택이 무산된 것이다.
이는 1976년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 북한에 대한 비동맹 국가들의 ‘반감’ 때문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탈냉전 평화를 지향하는 다수 비동맹 국가들에게, 전쟁 위기를 앞세워 미국을 공격하는 북한의 선전은 동의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1961년 냉전의 어느 한편에 줄서기를 거부하며 등장한 이후, 비동맹 국가들이 일관되게 지향해온 방향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고자 하는 다수 비동맹 국가들의 주체적인 판단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북한의 과격한 주장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대적 냉전질서를 거부하고 평화를 꿈꾸던 행위자들
그리고 냉전의 최전선에서 진영 너머를 향해 펼쳐진 남북한 외교전쟁

이 책은 1948년부터 1976년까지 냉전의 어느 한편에 서기를 거부했던 ‘중립·비동맹·제3세계’의 움직임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탈식민 분단국으로서 남북한이 냉전의 진영 너머로 진출하다가 1970년대 중반 비동맹회의에서 격돌하게 되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냉전의 진영 너머를 향한 남북한의 치열했던 외교경쟁은 양극적 냉전에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지구적 냉전·탈식민·분단’의 문제 등이 교차하는 장(場)에서 펼쳐진 다이내믹한 역사였다. 냉전의 주변부로 치부됐던 약소국 남북한과 제3세계는 지구적 냉전질서의 변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행위 주체들이었다. 이 책의 주선율은 진영 너머를 둘러싼 남북한 외교경쟁의 역사이지만, 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냉전 폭력을 넘어 탈식민·탈냉전 평화를 꿈꾸던 행위자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담겨 있다.
저자

김도민

저자:김도민
1980년목포에서태어났다.2001년서울대국사학과에입학하였고,같은대학에서학사,석사학위를받았으며,2020년「1948~1968년남·북한의'중립국'외교연구」로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2020년3월부터2021년8월까지서울대인문학연구원에서선임연구원으로근무했으며,2021년9월부터강원대역사교육과조교수로재직하고있다.
저서로『1970년대박정희정부의비동맹외교』,『냉전과탈식민의세계사』(공저),『한반도정전체제의형성·변동과평화기획』(공저),『새로쓴한국사특강』(공저),『구술로본한국현대사와군』(공저),『세월호이후의사회과학』(공저),『근대화라는이데올로기』(공역)등이있고,논문으로는「1948~50년주한미대사관의설치와정무활동」,「1956년헝가리사태에대한남한의인식과대응」,「1968년'프라하의봄'에대한남북한의인식과반응」,「냉전과탈냉전시기한국민족주의의역사적전개와성격」,「미군정기아동노동법규와미성년자노동보호법」,「춘천'에티오피아한국전참전기념관'의전시분석과개선방향」,「1961~1973년박정희정부의대(對)중립국외교와할슈타인원칙」,「1954년한반도문제에관한제네바회의와북한의활동」등이있다.

목차


서론지구적냉전과남북한을함께본다는것

제1부진영외교와중립의출현ㅡ1948년~1950년대중후반
1장남북한의진영외교와탈식민문제(1948~50)
1.남한의자본주의진영외교와일본문제
2.북한의사회주의진영외교와민족해방운동
2장중립의출현과남북한의반응
1.한반도정전과중립국에의한정전감시및포로송환(1950~54)
2.제네바회의와콜롬보회의(1954)
3.최초의아시아·아프리카회의(1955)
4.오스트리아의중립화독립(1955)
5.사회주의헝가리(1956)와유고슬라비아(1958)의중립

제2부냉전의진영너머로ㅡ1950년대중반~1960년대후반
3장첫걸음(1957)
1.북한의비(非)사회주의국가외교
2.남한의중립국외교
4장새아프리카와남북한의외교경쟁
1.아프리카신생국의급증과남북한의적극적인외교(1958~68)
2.남북한의국가승인과‘두개의한국/조선’문제(1961~64)
5장냉전의진영너머의국제회의와남북한의대응
1.열리지않는제2차아시아·아프리카회의와비동맹회의의탄생(1958~61)
2.제2차아시아·아프리카회의준비회의와제2차비동맹정상회의의개최(1964)
3.반둥회의10주년과제2차아시아·아프리카회의의무기한연기(1965)

제3부‘비동맹/쁠럭불가담’을향하여ㅡ1960년대후반~1976년
6장전초전
1.새로운냉전과남북한의자주외교(1960년대후반)
2.재개된비동맹회의와남북한의관망(1969~70)
3.급진화하는비동맹회의와남북한의적극적인외교(1972~73)
7장정면대결
1.비동맹/쁠럭불가담가입을위한남북한의외교전(1974~75)
2.제5차비동맹정상회의와남북한의한반도결의안대결(1976)

결론중립과평화

출판사 서평

중립과비동맹의땅에서경쟁하며스스로를증명하라
―아시아·아프리카회의장에서다시만난남북한

1950년대중후반남북한은자신의진영을넘어아시아·아프리카지역의비사회주의국가또는중립국에처음으로진출했다.특히1960년을전후하여아프리카국가들의국제정치적영향력이증대하자,아프리카국가를둘러싼남북한의외교경쟁이본격화했다.
1961년비동맹회의의탄생과성공은냉전의어느한편에서기를거부하는국가들이지구적냉전질서의주요한행위자임을세계에알리는계기였다.1964년자카르타준비회의결정에따라남북한은제2차아시아·아프리카회의정식초대국이되었으며,곧바로스위스제네바에서열리는아시아·아프리카경제회의의초청장도받았다.이로써남북한은1954년제네바에서열린회의에참가한이후10년만에다시제네바에서마주앉았다.
1960년대초중반아프리카국가들의급증은아시아·아프리카그룹을중심으로하는제3세계의국제정치적영향력을강화했으나,동시에증대하는숫자만큼국가들의충돌도증대했다.또한그동안중립·비동맹을이끌어온주역들이사망하거나군부쿠데타로실각하는일이발생했다.특히제3차비동맹정상회의가1960년대내내열리지못하면서,비동맹회의는국제정치의역사속으로사라지는듯했다.동시에냉전의진영너머를향한남북한의외교경쟁도잦아들었다.중립·비동맹의시대가저무는듯했다.

탈냉전,평화를지향한비동맹의신념
―전쟁을선동하는냉전의목소리에제동을걸다

1970년을전후하여미·소,미·중의지도자들이긴장완화를추구하며지구적냉전과동아시아,그리고한반도의정세가급변하고비동맹정상회의도다시열리기시작했다.특히1973년알제리비동맹정상회의에서북한이주장하는한반도문제관련결의안이채택되고북한이비동맹에직접가입을시도하자남북한의외교경쟁은격화했다.1975년페루리마비동맹외상회의에서북한은남한의방해를물리치고단독가입에성공했다.북한의비동맹·제3세계외교는거칠것이없어보였다.그러나이렇게승승장구하던북한의비동맹외교는1976년콜롬보정상회의에서어려움에봉착했다.북한이제시한결의안에유보를표시한국가들이늘어나면서결의안채택이무산된것이다.
이는1976년한반도에서전쟁위기를고조시킨북한에대한비동맹국가들의‘반감’때문일수있다.기본적으로탈냉전평화를지향하는다수비동맹국가들에게,전쟁위기를앞세워미국을공격하는북한의선전은동의를얻기어려웠을것이다.1961년냉전의어느한편에줄서기를거부하며등장한이후,비동맹국가들이일관되게지향해온방향은전쟁을멈추고평화를만드는것이었다.따라서전쟁없는평화로운한반도를만들고자하는다수비동맹국가들의주체적인판단이,전쟁을불사하겠다는북한의과격한주장에제동을걸었던것이라고볼수있다.

적대적냉전질서를거부하고평화를꿈꾸던행위자들
그리고냉전의최전선에서진영너머를향해펼쳐진남북한외교전쟁

이책은1948년부터1976년까지냉전의어느한편에서기를거부했던‘중립·비동맹·제3세계’의움직임을설명하면서,동시에탈식민분단국으로서남북한이냉전의진영너머로진출하다가1970년대중반비동맹회의에서격돌하게되는일련의역사적과정을살펴보았다.
냉전의진영너머를향한남북한의치열했던외교경쟁은양극적냉전에부차적이거나종속된것이아니라‘지구적냉전·탈식민·분단’의문제등이교차하는장(場)에서펼쳐진다이내믹한역사였다.냉전의주변부로치부됐던약소국남북한과제3세계는지구적냉전질서의변동에적극적으로개입한행위주체들이었다.이책의주선율은진영너머를둘러싼남북한외교경쟁의역사이지만,적대적이고이분법적인냉전폭력을넘어탈식민·탈냉전평화를꿈꾸던행위자들의이야기들도함께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