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시편 전반에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적 묘사가 뚜렷하게 읽힌다. 이미 사라져 버린 흑백의 시간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사유의 공간을 확장한다. 가령 “꽃 시샘 이월이/ 명분 없이 서성대”(「이월과 삼월 사이」)며 삼월로 건너가는 동안의 여백이 그렇다. 여백을 하나씩 채우며 “비단을 잘 다려 펼쳐놓은 연둣빛”(「여름이 오고 있다」)이 초록으로 물드는 시간이 그렇다. 초록이 깊어져 무성한 녹음綠陰으로 치달은 계절은, 폭염과 폭우의 시간으로 지나간다. 여름날 열기로 들끓는 시간과 폭우에 잠겨 뭉개진 잎사귀처럼 풀 죽은 시간의 경계가 아슬하다. 아슬한 경계를 뛰어넘어 성장한 계절의 페이지엔 “단풍잎 한 장 얹어 배달된 발 빠른 가을”(「환절기 풍경을 읽다」)과 “풍만한 곡식 낟알”을 나르는 한 짐 가득한 만추의 수레가 있다. 만추의 수레는 팽팽해진 만월과 같다. 팽팽한 만월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제 몸이 깎이면서 쪼글쪼글해진다. “빈 몸의 허수아비가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일상은 허무하게 흔들린다. 무한정으로 흘러가는 세월의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정지된 시간의 극점에서 희망과 절망이라는 긴장감은 우리의 삶의 속살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시간에 꽂아둔 책갈피 - 책만드는집 시인선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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