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지 (이형순 시집)

행선지 (이형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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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형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행선지’(도서출판 그루)가 발간됐다. 「꽃 궁전」, 「천지삐까리」, 「꽃비 마중」, 「바라기같이」, 「그대와 나」, 「어쩌면 좋아」, 「삼합사」, 「남빛의 비밀」, 「모르고 싶다」, 「몽돌의 넋두리」, 「이별 연습」, 「동행」 등 62편을 싣고, 사진 작품 17점도 곁들였다. 자연과 사람을 향한 사랑 노래의 다채로운 변주를 담고 있는 이 시집은 외경과 감사의 대상인 자연의 사랑 안에서 그 순리와 질서에 순응하며, 그늘진 삶의 파토스나 이루지 못하는 소망마저 조신하게 삭이고 그러안는 겸허한 마음자리를 원숙하게 떠올린다.
저자

이형순

이형순 시인은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여자중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영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25년 첫 시집 『여자의 꿈』으로 등단했으며, 대구YMCA합창단, 대구레이디스코러스합창단 단원 등으로 활동했다.

목차

005 시인의 말

Ⅰ

012 꽃 궁전 / 013 천지삐까리 / 014 채비 / 016 꽃비 마중 / 018 기쁨 / 020 햇살 / 021 삼원색 / 022 바라기같이 / 024 참 좋다 / 026 비상 / 028 아름다운 광경 / 030 게임 / 031 호수 / 032 희망, 화답 / 034 세상에 가장 귀한 것 / 035 행선지

Ⅱ

038 희망 사항 / 040 그대와 나 / 041 청혼 / 042 갈망 / 044 어쩌면 좋아 / 045 짝꿍 / 046 기대감 / 047 기다림 / 048 메아리 / 050 그대에게 / 051 회상 1 / 052 회상 2 / 054 늪 / 056 맑은 날 / 058 대화 / 059 어떤 존재

Ⅲ

062 삼합사 / 064 속삭임 / 066 사위四圍 / 067 홍시 / 068 정말 / 070 남빛의 비밀 / 071 걸음마 / 072 알곡 / 073 겨울 마음 / 074 한겨울 사랑 / 076 욕심 비우기 / 078 무료입장 / 079 손끝 하나로 / 080 모르고 싶다 / 082 그런 사람 / 083 미완의 매듭

Ⅳ

086 몽돌의 넋두리 / 088 사무침 / 090 바보 / 092 하나와 둘의 대화 / 093 서러움 / 094 마찬가지 / 096 어느 겨울날 / 097 삶과 죽음 / 098 이별 연습 / 099 나들이 / 100 계단 / 102 무용지물 / 103 하루 / 104 동행

해설
108 사랑 노래의 다채로운 변주_이태수

출판사 서평

세상과 삶을 진솔하게 성찰
사랑 노래의 다채로운 변주

이형순 시인의 이 두 번째 시집에 담긴 시편들은 자연과 사람을 향한 사랑 노래의 다채로운 변주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향일성을 애틋하게 지향한다. 외경과 감사의 대상인 자연의 사랑 안에서 그 순리와 질서에 순응하며, 그늘진 삶의 파토스나 이루지 못하는 소망마저 조신하게 삭이고 그러안는 겸허한 마음자리 때문이다.
사랑은 시인에게 존재 이유라 할 만큼 가장 소중하고 높이 받드는 덕목일 뿐 아니라 몽매에도 잊지 못할 정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가치다. 특히 자애로운 자연의 품에서는 임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머물고 싶은 소망이 언제 어디에서도 한결같이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말을 극도로 아끼는 ‘말 없는 말’에 무게를 싣는다.
지난해 낸 첫 시집 『여자의 꿈』은 ‘이형순의 시는 진솔하고 담백하며 원숙하고 유연하다. 사랑에의 기구와 그리움, 기다림이 중심축을 이루는 그의 시에는 팔순에 접어든 연륜과 경륜에 걸맞은 승화된 여유가 관류하며, 오랜 체험들이 부드럽게 녹아든 깨달음과 꾸밈없는 지혜들이 은은한 무늬와 빛깔로 떠오르고” 있지만, 이번 시집도 같은 풀이가 거의 유효하다. 다만 세상과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마음의 그림’들이 한결 간명하고 깊어졌으며 투명하고 여백의 묘미가 두드러져 있는 점이 다르다.
시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며, 외경의 대상이자 감사의 대상은 생성과 사랑으로 충만한 자연이며, 자연은 광대무변하고 풍요로운 생성과 사랑의 품이다. 이에 견주어 자신은 한갓 ‘바라기’(조그마한 사기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연 앞에서 겸허하게 자세를 낮춘다.
그러면서 사람에게는 자연의 사랑은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얼마나 소중한가를 완곡하게 일깨운다. 이 같은 가장 소중한 사랑을 향한 겸허한 자세는 「행선지」에서 간결한 문맥 속에 더욱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있으며, 사랑은 ‘너’(대상)에게로 간다고 아가페적인 사랑의 미덕을 견지한다.

바람이 말한다
부는 대로 간다고

강물은 말한다
흐름을 따라간다고

사랑은 말한다
너에게로 간다고
-「행선지」 전문

간명하고 진솔한 이 시는 자연의 섭리를 람과 강물의 흐름을 통해 암시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는 자세로 사랑은 대상을 향해 먼저 가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극도로 함축된 사랑의 메시지를 떠올리는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나/너를//너/나를//사랑하는 것”이 시 전편이 이며, 술어를 빼버린 단 한 문장이다.
시 「기쁨」에서는 사랑의 대상인 ‘그대’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만나러 나서려 하니 먼저 와서 기다린다는 진술은 액면 그대로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바라는 바의 사랑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사랑은 설령 ‘그대’와 ‘나’가 함께 있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며, 마음 깊은 곳에 언제까지나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랑 깊이 끌어안기’와 연계된다. 외경과 감사의 대상으로 받드는 자연의 품에서는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일깨우며 감탄하는 경우다.
시인의 사랑을 품은 마음은 봄 풍경과 마주하면서 자연의 사랑에 젖어 들고, 벅찬 감격과 함께 감사한다. 꽃들이 만발한 풍경을 “잔칫상 차려 하객들을 맞이한다”(「천지삐까리」)고 보는 마음이 그러하다. 또한 시선을 더 넓혀 상춘객들을 향해서는 “삼삼오오 짝지어 즐기게 하는/푸짐한 상차림은 만복이로고/바람도 강물도 갈채를 보내니/천하엔 하객 천지삐까리다”(같은 시)라고, 만복을 안겨주는 대자연의 봄날을 자연에 인간들에게 베푸는 ‘푸짐한 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이 잔치에는 자연 현상인 바람도 강물도 갈채를 보내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현상을 천하에는 하객이 ‘천지삐까리’(매우 많음)라고 한다.
또한 「꽃 궁전」에서는 “재워둔 설렘도 깨어나/맨발로 살포시/꽃 궁전 초대를/만끽한다”며 “꽃 궁전 화려한/이 봄날의 외출”이라고 기꺼워한다. 이 같은 인식은 자연 현상을 외경심으로 받들어 바라보고 사랑의 모습으로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참 좋다」도 그 연장선상의 시다.

오늘 바다로 와서
이야기 나누고

어제는 산에 올라
노래를 불렀지

내일은 들판에 나가
춤을 추리라

두 팔을 벌리며
그윽한 미소로 감싸는

산과 바다와
들이 있어 참 좋다
-「참 좋다」 전문

시인은 이 시에서 바다, 산, 들판을 그 대표적인 경우로 예시하면서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예찬의 폭을 넓혀 보인다. 있지만, 말하지 않은 말들도 적잖이 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눈에는 자연 속의 광경들 역시 거의 마찬가지다. 시선을 산골 마을, 하늘, 땅속, 바다 등으로 두루 보내면서 아이의 글 읽는 소리, 철새 행렬, 집 짓는 개미들, 모천으로 회귀하는 물고기, 홀씨들의 비행을 비롯해 이루 다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들을 ‘이쁨’이라는 찬사나 ‘스승’이라는 외경심으로 바라본다.
시인의 이 같은 마음자리는 모든 빛깔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색깔인 삼원색이 다른 색과 섞이면서 빚어지는 색을 화해와 융화, 친화와 동행이라는 미덕으로 받아들인다.

빨강과 파랑이 만나

서로 이쁘다고 부추긴다

잠자던 노랑이 깨어나

빨강과 파랑을 양손에 잡고

함께 밥 먹으러 간다
-「삼원색」 전문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이면 보라색이 되는데 이 두 색깔은 서로 이쁘다고 부추긴다든지, 노란색이 빨간색과 어우러지면 주황색이 되고 파란색과 섞이면 초록색이 되지만, 노란색은 이 두 주황색과 초록색을 빚는다는 걸 양손을 잡고 함께 밥 먹으러 간다고 하는 표현도 재미있으며, 융화와 친화의 묘미를 미묘한 색깔의 변화에 비유해 그린다.
그러나 사랑은 이상적으로 추구하고 노래할 때와는 달리 현실 속에서 체험과 연결될 때는 갈망과 갈등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갈망」에서 시인은 “가 보고 싶다/해 보고 싶다//가서 만나/못 견디게/보고 싶어서//왔노라고/고백하고 싶다”라고 토로하는 한편 「희망 사항」에서는 “사랑아/나랑/먹고 자고 놀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바라는 바의 심중을 털어놓는다. 이런 갈망은 「그대에게」에서와 같이 사랑의 대상(그대)에게 자신이 찾아갈 때까지 있어 주기만 해달라는 애원으로도 이어진다.

그대, 그대로
그냥 있기만 해요

행여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이 오더라도

그러는 의미를
받아들이기만 해요

웃다 울다 버티다가
그대에게 갈 테니

그대, 그대로
그냥 있기만 해요
-「그대에게」 전문

그대와 헤어져 있는 정황에서의 심중을 애틋하게 노래하는 이 시는 ‘그대’와 ‘나’가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이 오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나’가 웃고 울며 버티다가 찾아갈 테니 그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그대로 그냥 있기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애원은 행여 ‘그대’가 ‘나’를 기다리며 그런 상황을 버티지 못할까 봐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나’는 기필코 ‘그대’에게 이르겠다고 하는 ‘사랑에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인은 체념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다는 인식에도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기다림」에서는 “만남은 너무 짧고/기약은 아득하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기다림이/기쁨인 줄 알기에/노래를 부른다”라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나아가서는 ‘그대’는 멀리 떠나가 버리고 미련만 남아 있지만, 그런 기다림 자체마저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회상 2」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비가인 동시에 그 반전을 보여주는 시다.

그대는 슬그머니 갔어도
마음속에 깊이 박인 흔적은
캐도 캐내도 그대로다

목줄 잡은 미련과 만나서
회상의 날개를 퍼덕인다

지난날의 산과 바다를
수시로 넘나들기도 한다

이젠 텅 빈 시간
속절없는 추억 반추인가 했는데

그런 미련과 회상 덕분에 새삼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대는 슬그머니 갔어도
회상만으로도 아름답다
마음속에 있어 줘 고맙다
-「회상 2」 전문

‘그대’와의 사랑의 기억에 주어져 있는 이 시는 슬그머니 가버린 ‘그대’를 사모하는 사랑 노래다. ‘슬그머니’와 ‘끝없는 되새김질’이 대비를 이룰 정도로 ‘그대’와 ‘나’는 대조되는 정황에 놓여 있다. ‘그대’는 슬그머니 갔어도 ‘나’에게 사랑의 기억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게 “마음속에 깊이 박인 흔적”이며, “캐도 캐내도 그대로”일 정도다. 게다가 아무래도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추억을 반추하게 되며, 사랑의 기억이 새겨진 산과 바다를 수시로 넘나들게도 된다.
그러나 그 미련과 속절없는 추억의 반추를 거듭하다가 자신을 들여다보니 그 “회상만으로도 아름답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며, 그 사랑의 기억들이 자신의 마음속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미련’의 승화에 다다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비가이면서도 ‘그대와의 사랑’을 소중하고 높게 돌아보는 찬가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그의 일련의 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물상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며, 자연 현상은 그 길로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한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힘들고 큰 상실감을 안겨주는 겨울에는 “겨울은 생명 품고//설렘으로//새봄을 기다린다”(「겨울 마음」)라고 추위 속에서 기다림을 내세우기도 하며, 그런 겨울에 “양지의 온기가/거실에 가득하고/꽃들이 활짝 웃는다”(「한겨울 사랑」)라고 겨울에 피는 꽃에 따스한 마음을 투사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겨울의 햇빛과 온기를 “미소 머금으며/맺힌 응어리를 녹이는/따사로운 한겨울 사랑”(같은 시)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