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
흑인노예제도와 백인미국주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덕적 사회개혁 운동이 정당 정치와 제휴하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정리하여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표출된 미국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의 실체를 규명하고, 정치 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정당 활동에 투신하였을 때 나타난 현상들을 정리하였다.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의식은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흑인 노예제도 폐지 운동과 여권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두 운동이 전개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 시대는 백인 참정권이 크게 확장(주민의 2%에서 약 10%로)된 시대였고, 백인 보통 남성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한 서민(庶民)의 시대였다.
잭슨 대통령 시대는 백인 남성들의 참정권이 확장된 시대였으나, 잭슨 지지자들은 노예주(奴隸州)와 자유주(自由州)로 구성된 미국 연방공화국의 흑인 노예제도 문제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도덕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노예제도 보다 미국연방의 분열을 더 걱정하였다.
전국 규모의 정당인 민주당과 휘그당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남부와 그 반대인 북부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능력이 없어서 184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미 남부와 북부의 분열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흑인 노예노동가 아니라, 자유노동 이데올로기가 남·북 대결을 더욱 가열시켜, 결국 반-남부적 정강을 내 것 공화당(Republican Party)이 출현하게 되었다.
1862년 9월 22일 공화당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하여 북부에 저항하는 남부 연합의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북부에 협력한 남부 주의 흑인 노예는 해방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정치 활동을 통하여 법적으로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고자 한 정치적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목표는 성취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후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에 미국인들이 보여준 백인 미국주의와 인종차별 정책은 윌리엄 개리슨(William L. Garrison)과 루이스 타판(Lewis Tappan) 같은 박애주의적 흑인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주창한 인종 평등은 전혀 성취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링컨 대통령도 흑인 노예제도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흑인문제 보다 연방의 분열과 재통일(再統一) 그리고 백인 미국 공화주의에 더 유의였던 것 같다. 현재 미국의 일부 공화당들도 인종차별의 근거인 백인 우월주의 미신을 믿고 있는 것 같다.
프롤로그 중에서 2024년 6월
김 종 길
흑인노예제도와 백인미국주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덕적 사회개혁 운동이 정당 정치와 제휴하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정리하여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표출된 미국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의 실체를 규명하고, 정치 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정당 활동에 투신하였을 때 나타난 현상들을 정리하였다.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의식은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흑인 노예제도 폐지 운동과 여권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두 운동이 전개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 시대는 백인 참정권이 크게 확장(주민의 2%에서 약 10%로)된 시대였고, 백인 보통 남성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한 서민(庶民)의 시대였다.
잭슨 대통령 시대는 백인 남성들의 참정권이 확장된 시대였으나, 잭슨 지지자들은 노예주(奴隸州)와 자유주(自由州)로 구성된 미국 연방공화국의 흑인 노예제도 문제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도덕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노예제도 보다 미국연방의 분열을 더 걱정하였다.
전국 규모의 정당인 민주당과 휘그당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남부와 그 반대인 북부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능력이 없어서 184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미 남부와 북부의 분열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흑인 노예노동가 아니라, 자유노동 이데올로기가 남·북 대결을 더욱 가열시켜, 결국 반-남부적 정강을 내 것 공화당(Republican Party)이 출현하게 되었다.
1862년 9월 22일 공화당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하여 북부에 저항하는 남부 연합의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북부에 협력한 남부 주의 흑인 노예는 해방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정치 활동을 통하여 법적으로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고자 한 정치적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목표는 성취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후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에 미국인들이 보여준 백인 미국주의와 인종차별 정책은 윌리엄 개리슨(William L. Garrison)과 루이스 타판(Lewis Tappan) 같은 박애주의적 흑인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주창한 인종 평등은 전혀 성취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링컨 대통령도 흑인 노예제도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흑인문제 보다 연방의 분열과 재통일(再統一) 그리고 백인 미국 공화주의에 더 유의였던 것 같다. 현재 미국의 일부 공화당들도 인종차별의 근거인 백인 우월주의 미신을 믿고 있는 것 같다.
프롤로그 중에서 2024년 6월
김 종 길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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