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끄고 노래하면 안 될까요 (노희준 소설집)

불을 끄고 노래하면 안 될까요 (노희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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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가 노희준의 소설을 알게 된 지도 이십여 년이 흘렀다.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 발랄한 이야기 끝에 번지는 여운, 시침을 뚝 떼고 ‘왜 이리 심각해?’라고 묻는 얄미운 문장들 말이다.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얼굴을 한 그의 소설들을 봐왔지만, 그것이 소설집의 형태를 띤 건 상당히 오랜만이다. 이는 단순히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지 않았단 의미만은 아니다. 소설집이란 작가가 작가로서 보낸 시간의 묶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시간을 숨겨왔던 셈이다. 해설을 쓸 기회를 얻어 여덟 편의 작품을 읽어보니, 그가 지금껏 무엇을 숨겨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개별 작품으로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강력한 질서의 힘. 노희준의 소설 세계는 바로 그 질서의 힘에서 출발한다.
저자

노희준

2006년『문예중앙』소설상.2016년대한민국SF어워드장편소설대상.2017년황순원소나기마을작가상.많이쓰고,많이지우고있습니다.앞으로는조금덜지워볼까합니다.

목차

개미들의집7
빛의제2법칙41
뒤로뛰기훈련73
팔찌105
왓더검정!143
불을끄고노래하면안될까요?175
떡볶이초끈이론211
연필245

해설빛의길,그끝에있는것|최선영274
작가의말288

출판사 서평

우리가노희준의소설을알게된지도이십여년이흘렀다.장르를자유롭게넘나드는상상력,발랄한이야기끝에번지는여운,시침을뚝떼고‘왜이리심각해?’라고묻는얄미운문장들말이다.이처럼다양한곳에서다양한얼굴을한그의소설들을봐왔지만,그것이소설집의형태를띤건상당히오랜만이다.이는단순히단편들을한권의책으로모으지않았단의미만은아니다.소설집이란작가가작가로서보낸시간의묶음이기도하다.그러니까그는꽤오랫동안자신의시간을숨겨왔던셈이다.해설을쓸기회를얻어여덟편의작품을읽어보니,그가지금껏무엇을숨겨왔는지어렴풋하게나마알것같다.개별작품으로는잘눈에들어오지않았던,삶과세계를구성하는강력한질서의힘.노희준의소설세계는바로그질서의힘에서출발한다.
「개미들의집」의주인공인‘나(준우)’의집안은“국가의에너지절약시책”을목숨처럼떠받들고핵전쟁을대비한방공호까지만들어놓은고지식한아버지가진두지휘하는질서아래에서빽빽하게돌아간다.이집안의폭력적인질서는대학생이자소설가지망생인‘나’의소설문장에도어마어마한악영향을끼친다.‘나’는“말랑말랑한문학적상상력”을위해집안질서를타파하기로마음먹고한가지묘수를낸다.그건바로“말보로갑안에들어있는디스플러스”처럼“불균형”한태도를지닌중국인유학생첸지앙을홈스테이명목으로집에침투시키는것이다.‘나’는첸지앙이집안을한바탕뒤엎어줄거라기대한다.하지만묘하게도,첸지앙은베이징방식의절약습관과상하이방식의생활습관을또다른질서로전수한다.질서에균열을내려는시도가곧새로운질서의시작이되는이역설.이역설을몸소보여주는첸지앙의해맑은미소를우리는그저웃어넘기긴어렵다.집안이건사회건나아가세계건,질서란타파되는게아니며더강하고독한것으로덮일뿐이라는걸,그의움푹팬보조개가비웃듯말해주고있다.
이질서의연쇄가말그대로첸지앙(젠장)스러운것이라면,「왓더검정!」은어떨까.가난한뮤지션인‘나’는공연장으로가기위해집을나왔다가오늘이“싸움의날”임을알게된다.‘싸움의날’의규정은간단하다.노랑과초록으로편을갈라오직싸우고또싸우는것뿐이다.싸우지않는이들은비행체에응징을당한다.그렇다면비행체는‘질서의수호자’쯤이되겠다.이이유모를규정을성실하게따르며주먹질을아끼지않는“모범시민”들사이에서검은옷을입은‘나’는“개애새끼”다.그러나‘나’는‘싸움의날’에찬동하는싸움에도,저항하는싸움에도가담하지않은채그저“무사히집에처박”히기를선택하고,노랑도초록도아닌검정인채로남은하루를버티려한다.미약한몸부림이나마‘싸움의날’이라는‘판’을벗어나기위하여.
「불을끄고노래하면안될까요?」에는시각장애인남자와강간의상처를앓는여자가등장한다.첫장면에서두사람은말과말사이로내는소리와가사없는노래로소통하는듯하다.그도그럴것이,남자는“소리를통해세상을보고있”기때문이다.공기중에스미는,사방으로퍼지는음성과그모양.그것이어떻게질서화되고정제된기호인‘말’과같을수있을까.사람들의말과그소리의모양이다른것을봐온남자는,말과소리의모양이일치하는여자에게사랑을느낀다.여자는남자의상상을채워주고싶어자신을꾸미곤했으며,남자역시“외로움마저잃게”될까평범한시각장애인흉내를낸다.이들은여자의앨범녹음을위해녹음실에들어와서야그가장을잠시나마내려놓는다.한동안녹음에고전하던여자가갑자기불을끄고노래를부르고싶다고말한다.그리고노래를시작했을때,여자는‘투명’하게“노래속으로사라”진다.좀처럼가능하지않던‘여자인채로있는것’을비로소이룬셈이다.그생생한음성은남자의흑백세계를“선명하게번지는색깔”로뒤덮는다.그렇게남자는말과소리의모양이일치하는흑백의세계에서,노래라는색이피어오르는예술의세계를처음만나게된다.「불을끄고노래하면안될까요?」에서예술이탄생하는순간을짚어냈다면,「연필」은그예술에다다르는과정을한화가의삶을통해섬세하게짚어낸다.이소설은한무명화가가원인불명의괴사로오른팔을절단하며시작된다.남자는잘린팔뼈에닿은이의삶을엿볼수있는특별한능력을얻게된다.남자는그렇게타인의삶을훔쳐보며“예술가로살아있는것같”은기분을느낀다.땅끝에서만나살림까지차리게된해녀를만나기전까지는말이다.그녀는잊을상처가많다는점에서“오래살아온여자”다.여자가연필을만지자남자는처음으로아팠고,싫었다.그공감의고통이예견하듯여자는연필을앙가슴에끼우고바닷속에서생을마감한다.생은물론이고죽음까지,자신자체를남자에게보여주듯말이다.남자는깊은산속암자로들어가연필의모든기억을비워내기시작한다.인정욕구,타인의삶에대한집착,공감의고통까지.예술가라면한번쯤은들르게되는경유지들을말이다.연필은점차투명해지다가남자와무관한존재가되어버린다.남자가세상을떠난후처마풍경이된연필의소리를들은사람들은그것을비로소“아름답다고느꼈다.”
「뒤로뛰기훈련」은현대판무협이라는독특한형식을갖추고있다.기진과‘나’는아파트의경제적계급을‘주먹질’이란물리적힘의질서로치환하여답습하는아이들의세계에순응한다.사건은먹이사슬의최상위포식자인‘A동싸움짱’재헌이백일장에서기진의그림을빼앗겠다고공표하며시작된다.그리고바로여기서부터현대판무협의세계가열린다.기진은‘속성도장고수’학원에서장풍을피하는‘역비행품새’를연마하여재헌을물리쳐버린다.약자를괴롭히는재헌이‘사파’라면무공을정진한기진은두말할것없는‘정파’다.그런데이이야기는곧‘웃픈’결말을맞이한다.기진이A동아이들과어울리며어깨에“힘이잔뜩들어”간제2의사파가된것이다.장르적구조를전면적으로취하는「팔찌」역시유사한아이러니를지니고있다.바에서일하는‘나’는‘싫은남자’와자게되면그전의시간으로돌아가는‘타임루프’를겪는다.타임루프의목적은‘이미겪은과거’의정보를통해과거의문제를해결하고루프를탈출하는데에있다.‘나’에게과거의문제란‘싫은남자’인‘너’의성폭력이며,아홉번의타임루프끝에복수에성공하고루프를탈출한다.그러나이복수극의이면에는반복된지옥을겪으며알게된어떤질서가있다.그것은바로‘나’에게“나쁜짓을해야”‘너’가그죄에서“빠져나올수있다”는아이러니한논리인데,그저변엔‘나’는“실수를하면안되는년”이지만‘너’는“실수를할필요가없는분”이란위계질서가깔려있다.
이소설들이쌓여책이될때까지적지않은시간이흘렀다.하지만이세상의질서를집요하게파헤치는데엔결코긴시간이아니었을것이다.그질서때문이아니라,그것을경유한후에야발견할수있는한세계를발견하기위해서말이다.우리가진심이라고부르는그세계는말과글보다는소리를닮았다.파장이며공명이고,이해가아닌감각으로스미는소리.노희준은언어를통해끊임없이그소리의세계에손을뻗어왔다.그결과우리가이렇게그세계를‘볼수있게’됐으니,그의시도는효과를거둔셈이다.앞으로도그의글이기호가아닌소리로서다가와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