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 (심아진 소설집)

신의 한 수 (심아진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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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신의 한 수」의 서두다. 예지와 순남 여사의 이야기를 이런저런 논평을 섞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나’의 정체는 소설을 한참 읽어나가도 오리무중이다. “내가 서투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에서 ‘나’를 서사 밖의 어떤 존재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나’의 화자 위치는 일종의 액자 바깥에 놓여 있으며, 실제로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예지를 초점화자로 해서 진행된다. 게다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계속 예지의 진술이나 판단이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는 ‘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매개로 예지를 이른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만들면서 소설에 이중의 미궁을 설치하고 서사의 긴장을 높인다. ‘나’의 정체도 결국은 모습을 드러내는데, 제목에 표현된 대로 ‘신’이다. 그러나 「언니」의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다지 전능한 존재는 아닌 듯하다. ‘나’는 예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서만 얼마큼 힘을 발휘할 뿐, 인간의 서사에 개입할 의사나 능력은 없어 보인다. “인간들이 내게 본받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내가 그들을 본받을 작정이다. (……) 사실 인간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니 나름 냉정한 현실 인식도 갖고 있다(사실은 소설 역시 ‘서투른’ 인간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고, 인간을 닮으려고 할 뿐이다. 소설의 최고 목표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다만 ‘한 수’를 선보이며 소설을 끝맺는데, 그 ‘한 수’가 자못 야릇하고 기이하다. 옥탑방의 노인은 순남 여사에게 받은 푸짐한 족발을 안주로 기분 좋게 취한 뒤, 개에게도 살이 제법 붙은 뼈를 맛볼 기회를 준다. 그러고는 옥탑방 문을 닫고 잠자리에 드는데, 문틈에 작은 족발 하나가 걸린 걸 알지 못한다. 개는 밤새 열린 문으로 옥탑방을 드나들며 잠든 주인 옆에서 족발을 물어 내와 마음껏 포식한다. 그러니까 문틈에 걸린 작은 족발이 ‘나’가 준비해둔 ‘한 수’인 셈이다.
저자

심아진

1999년중편소설「차마시는시간을위하여」(『21세기문학』)로등단.소설집으로『숨을쉬다』『그만,뛰어내리다』『여우』『무관심연습』,장편소설로『어쩌면,진심입니다』가있다.
2020년‘심순’이란이름으로동화「가벼운인사」가동아일보신춘문예에당선됨.동화집으로『비밀의무게』(창비좋은어린이책대상)『세상에서가장특별한1』이있다.

목차

언니
신의한수
우는남자
오렌지하트
다복한의원
레슬링
귀향

해설|진하지않은,얇디얇은맛_정홍수(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만연해있지만진하지않은,얇디얇은맛을내는저녁한끼였다.”(「다복한의원」)한의원원장한용수와간호조무사규리가두달만에‘밥한끼’의예전루틴을회복한날,두사람이함께한저녁의풍경을소설은이렇게묘사하고있다.소설의마지막문장이라는점을고려하지않더라도,이미묘한묘사가식탁위에놓인음식의맛만을향해있지않다는것은알아채기어렵지않다.그것은지금마주앉은두사람을둘러싸고있는공기와분위기를품으면서이들의관계가지나가고있는시간을드러내려고한다.한동네에서자라며세살위한용수를‘성당오빠’로알게된이래로규리쪽에서특별한감정을가진적도없고,기러기아빠신세인한용수역시고지식할정도로한의사직분에충실하고자신의일상에흐트러짐이없는사람이다.소설은서른셋의규리가독립하라는어머니의요구에타협하는방법으로한용수의한의원에취직하게되면서겪게되는이야기들을담고있는데,규리로서는한동네에붙박이로살며알아온이웃들을직장인한의원에서매일만나는일은생각이상으로곤혹스럽다.그불편함의꼭대기에한용수와의관계가있을수도있었겠지만,어쩌다일주일에두어번함께하게된저녁식사자리는의외로편한시간이된다.‘얇디얇은맛’은그몇달간의저녁시간에뭔지모를감정적불편함이끼어든뒤규리가한동안한용수를피하다가먼저밥한끼를청하면서다시이루어진저녁의풍경에찾아온맛이다.소설가심아진은초점화자규리의감정의항해에인물스스로도잘의식하지못하는칸막이를놓는방식으로서사의표면을얇게마름질한다.딱그만큼규리의입장에서는스스로에게부여된자기탐색의지위에부지런한데도진술의여백이마련되고의미의아이러니가생성된다.드러나는것과감추어지는것사이의밀도높은줄다리기는화자장치의독특한활용과함께심아진소설을읽는큰즐거움인데,「다복한의원」에서초점화자규리의마음과감정의항로를표면적진술너머에서따라가는재미는상당하다.
‘진하지않은,얇디얇은맛’의특별한울림은한편의작품에국한되기보다심아진소설전체에대해서도알려주는바가있는것같다.심아진소설은전체적으로이야기의발굴이나조형에서극단이나과잉을통한극적강렬화의유혹으로부터거리를둔다.상상력의창의나서사의다채로운개척,인간심리와감정의추적에서정교한능력을보여주는한편으로,세태나인간사의정직한관찰의자리를균형감있게지켜낸다.한편의소설이두텁고깊이있는세계이해를보여주는일은세상을그것이드러나있는표면에서바라볼수밖에없는안간힘과상충되지않는다.어쩌면우리가가지고있는것은피상(皮相)과표면이다일수있다.소설은‘마치-인것처럼’전지적시점을참칭하고인간의마음속으로도들어가지만소설밖으로나오는순간,우리는그런일이도무지쉽지않다는것을곧장확인한다.소설의능력은인간한계의대가거나보상일수있다.이점을의식하는소설가라면,피상과표면을사랑하지않을수없으리라.‘진하지않은,얇디얇은맛’은심아진소설이그렇게세상의표면을사랑하는방식일수있겠다는생각이든다.심아진소설은인간의풍경이대개는저‘진하지않은,얇디얇은맛’의저녁식탁에서멈춘다는사실을안다.그리고그맛은진하고깊지못해서금세휘발되겠지만그얇디얇은맛으로세상의하루가겨우저녁의평온을얻고내일을기약한다는것을안다.심아진의소설에는얇음을껴안는성숙의시선과절제의언어가있다.
심아진의이번소설집에서특히눈에띄는것은화자(서술자)장치의특별한설정이다.전체일곱편수록작가운데세편의작품에서화자장치를낯설게만드는기법을쓰고있는데,그효과는소설의주제적측면과도긴밀히연동되면서자못흥미로운소설적성취에이르고있는듯하다.「언니」의일인칭화자‘나’는,‘정무운’이라는남성에대한관심때문에갑자기분식집을차린‘언니’를돕게된인물로두사람은쌍둥이자매다.두자매이야기로진행되던소설은후반부에‘막내’가등장하면서세자매이야기로확장되는데,막내는아버지가다른“씨다른동생”이다.소설의중심인‘나’,‘언니’,‘막내’의세자매는‘정무운’과함께살아있는소설의인물로받아들이기에그다지무리가없다.그런데조금자세히들여다보면이상한세부들이눈에잡힌다.소설은‘개업’‘정무운’‘나’‘언니’‘막내’‘전략’‘전술’의소제목을단이야기마디로나뉘어있는데,‘나’의마디서두에는“오늘아침정무운에게는좋은일이잇따라생긴다.기저귀를갈때마다정무운을할퀴곤하는어머니가얌전하게다리를내맡긴다”는서술이나오고계속해서정무운의하루동선에서생겨나는좋은일들을알려준다.정무운과계속함께움직이는것도아닌데일인칭화자‘나’는정무운에게생겨나는일들을어떻게속속들이알수있는것일까.
‘나’와언니는정무운과접촉하기위해그가근무하는사무실근처에분식집을개업한뒤김밥을말고라면을파는‘현실’의인간이면서동시에인간사를어느정도관장하는‘신’의자리도겸하고있는것같다.정무운이앉을마을버스좌석에당첨복권을둔다거나오만원권지폐가가득든가방을눈에띄게정무운이지나는벤치위에놓는일은사람의영역에서가능한일이아니다.언니의경우도마찬가지다.‘나’의작전이먹히지않자언니는정무운을괴롭히는수들을쓰는게다를뿐이다.“반면에언니는한강을가로지르는대교하나쯤부러뜨리고싶은듯한표정이다(언니는이미하나를부러뜨린일이있다).”이대목에서무너진성수대교를떠올리지않을사람이있겠는가.우리는그리스신화의‘운명의여신’이클로토,라키시스,아트로포스의세자매로이루어져있다는사실을알고있다.운명의여신들은인간의생명을관장하는바,클로토가생명의실을잣고라키시스가실을감으며아트로포스가실을끊는다고한다.그러고보니정무운이근무하는업체의이름이‘델포이’로,아폴론의신전이있던고대도시에서따왔다.작가는이야기가두개의레이어를따라진행되고있다는것을곳곳에서암시하고있다.
화자장치에대한작가의특별한관심은「신의한수」와「우는남자」에도인상적으로표현되어있다.「신의한수」와「우는남자」역시「언니」와마찬가지로‘나’를내세운일인칭소설인데,구체적양상은다르지만두작품모두‘나’의존재를서사의표면에서숨기면서소설을진행한다.

내가보기에예지는서투르다.순남여사역시,거사전날들키고마는도둑만큼은아니어도예지와크게다르지않다.물론그들이서투르다고해서,내가서투르지않다는말은아니다.(53면)

「신의한수」의서두다.예지와순남여사의이야기를이런저런논평을섞어우리에게들려주는‘나’의정체는소설을한참읽어나가도오리무중이다.“내가서투르지않다는말은아니다”에서‘나’를서사밖의어떤존재로상상하기는쉽지않다.그런데도‘나’의화자위치는일종의액자바깥에놓여있으며,실제로소설속에서벌어지는사건은예지를초점화자로해서진행된다.게다가소설을읽어나가면서우리는계속예지의진술이나판단이그다지신뢰할만하지못하다는느낌을받게된다.작가는‘나’라는일인칭화자를매개로예지를이른바‘신뢰할수없는화자’로만들면서소설에이중의미궁을설치하고서사의긴장을높인다.‘나’의정체도결국은모습을드러내는데,제목에표현된대로‘신’이다.그러나「언니」의자매들이그랬던것처럼‘나’는그다지전능한존재는아닌듯하다.‘나’는예지의마음을들여다보는일에서만얼마큼힘을발휘할뿐,인간의서사에개입할의사나능력은없어보인다.“인간들이내게본받을게없다는걸잘알고있으므로내가그들을본받을작정이다.(……)사실인간은내가어떻게생겼는지를가장잘보여주는거울이다.언제나그래왔다.”그러니나름냉정한현실인식도갖고있다(사실은소설역시‘서투른’인간을통해서만말할수있고,인간을닮으려고할뿐이다.소설의최고목표는인간의모습을‘드러내는’것이리라).다만‘한수’를선보이며소설을끝맺는데,그‘한수’가자못야릇하고기이하다.옥탑방의노인은순남여사에게받은푸짐한족발을안주로기분좋게취한뒤,개에게도살이제법붙은뼈를맛볼기회를준다.그러고는옥탑방문을닫고잠자리에드는데,문틈에작은족발하나가걸린걸알지못한다.개는밤새열린문으로옥탑방을드나들며잠든주인옆에서족발을물어내와마음껏포식한다.그러니까문틈에걸린작은족발이‘나’가준비해둔‘한수’인셈이다.그런데이어지는대목을보라.

다음날평년대비십도나기온이뚝떨어져상수도관이터지는등각종사고가잇달았다는뉴스가나올무렵,문이활짝열린노인의옥탑방도공평한아침을맞는다.(……)예지와의자를놓고올라가는수고를마다하지않는순남여사의눈에건너편에열린문은그다지이상해보이지않는다.노인이가끔문을모두열고환기나청소를하기도하니까.(85면)

밤새문이열려있었다면,갑작스런한파에노인은무탈한것일까?당연히솟구치는의문인데,소설은시침을떼고말이없다.새아침을맞은예지와순남여사의평온하고밝은모습을후일담처럼덧붙이며소설은끝나고있다.‘신의한수’는결국인간의행복을시기하고인간사의평정을흩뜨리는짓궂고고약한틈입일뿐인가.이것은혹심아진소설의비극적세계인식의누설은아닐까.답을알수없는대로소설은마지막지점에서이상한기운을불러들이고있다.마지막문장은다시한번,어두운쪽으로이소설을기울이고있는듯하다.“뭐가그리아쉽고원통한지쉽게떠나지못하는손돌바람만이오래열려있는옥상문을쿵,한번소리나게친다.”
이쯤에서다시한번물어볼만한것같다.심아진은왜화자장치를낯설게만들면서소설에초월적인시선을계속도입하려하는것일까.소설의시점혹은화자가하나의관습이라는점을환기하는것은소설의역능에대한겸허한자기검토일수있겠다.동시에심아진소설은초월적인시선의존재를통해삶의불가지성이나불확정성을안타깝게환기하고있는것도같다.「언니」에서그존재들이전능하기보다는인간적인욕망의혼돈안에있고,「신의한수」의마지막장면이알수없는어두움을포함하며멈추는것은그래서일테다.
「우는남자」를보자.‘나’는소설속‘호야’의연인으로서죽은자의시선임이드러나는데,사랑하는사람을잃은호야의슬픔과사랑을얻는데실패한‘오대리’의아픔을함께껴안으려는불가능한자리를표상한다.이작품에서도서사의경계에죽은자의시선을놓은뒤진술의아이러니를최대한활용하는작가의능란한손길은소설읽는재미를한껏선사한다.죽은자인‘나’를내세운소설의화술은거의솔기를드러내지않고이야기의안팎을넘나들지만움직임이멈추어야하는자리또한정확히알고있다.그리고그것은심아진이생각하는소설의기술혹은미학의한계이자,삶의어쩌지못할순간에대한겸허한승인처럼보인다.호야와오대리가뒤엉켜있는소설의마지막이특별히아름답고감동을주는것도그때문이리라.「우는남자」는초월적시선을향한심아진소설의탐구가성숙한인간이해의도정임을분명히한다.
심아진소설에서적확한비유의언어들은인물의생각과시선에머문뒤작가의언어로회귀한궤적을풍성하게포함한다.치밀한소설적짜임새와함께작품마다넓은변화의진폭을보여주는문체와화법은말의바른의미에서심아진소설을‘스타일리스트’의그것이되게한다.
심아진소설은밀도높은우회와지연의서사,작은언어들의수사학안에서‘클리나멘(원자들의우연한충돌이빚어내는빗겨감혹은벗어남)’의운동이일으키는세계의생성과변화를기다리고응시한다.그렇게해서‘만연해있지만진하지않은,얇디얇은’세상의맛과풍경을드러내려한다.그것은세상의표면,인간의어쩔수없는얇음에대한심아진소설의사랑이기도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