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의 꿈 (임회숙 소설집)

산복도로의 꿈 (임회숙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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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리움의 크기만큼 외로운 사람들, 그렇게 어떤 결핍 속에서 나날의 고난을 살아내는 그 사람들에게 임회숙은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전해주려고 한다. 그런 억지스러움은 정교하고 세련된 여느 소설들의 완미한 아름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투박하고 고집스럽고 끈질기기까지 한 그 일관됨에서, 오히려 불미함의 어떤 순수한 힘이 느껴진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희망을 가져보자고 건네는 다독거림일까, 『산복도로의 꿈』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은 정말 하나의 예외 없이 이렇게 끝을 맺는다. “붉은 벽돌 길 위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하얀 구름 한 덩이가 해를 가리며 흘러갔다. 하지만 물건리 앞바다는 햇살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곧이어 나타난 햇살이 언덕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난쟁이의 꿈」) “물고기 모형 위로 달이 떴다. 구름을 뚫고 나타난 보름달은 금빛으로 빛났다.”(「물고기」) “나머지 집기들을 모두 가게 밖으로 내놓고 돌아서는데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쓸모 있다는 것」) “물음표를 닮은 낚싯바늘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릿대가 경쾌하게 흔들렸다.”(「흔들리다」) “바다에서 시작된 바람이 내 뒤를 따라왔다. 바람은 점점 더 푹신해지고 있었다.”(「닥스훈트 소시지 빵」) “호명되는 남편 이름을 듣고 앞으로 달려 나오는 여자들 뒤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오늘은」) “강판에 오이 갈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싱그러운 오이 냄새에 기분이 맑아졌다.”(「그들만의 리그」) 이처럼 고집스럽게 일관된 희망의 암시들, 과연 이것이 간절한 소망의 발원(發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간난(艱難)한 삶은 모호한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육체적 현실이다. 내몰리고 밀려난 사람들의 곤궁한 처지는 의식주의 생활사를 통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 소설집은 이른바 ‘감천문화마을 연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알뜰하게 묶었는데, 그간에 발표했던 몇몇 작품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이 첫 소설집에는 그렇게 선별한 작가 나름의 뚜렷한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인상적인 반지하 주거지가 그런 것처럼, 경제적으로 취약한 자들의 공간은 대체로 눅눅한 지하이거나 냉열(冷熱)에 거의 무방비한 옥탑과 같이 누추하다. 비석마을 혹은 감천동의 문화마을이 아니더라도, 이 작가가 그리는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산복도로 언저리의 산 중턱이나 산마루에 산다. 그런 곳들은 개발자본의 눈길에서마저 소외되어, 산업화다 뭐다 세상이 크게 변하는 동안에도 큰 변화 없이 정체되거나 지체되어 있다. 그처럼 누군가에겐 남루해 보일지도 모르는 그곳이 또 어떤 이들에게는 존엄한 생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장소라는 것을, 이 작가는 강조하듯이 거듭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덟 편의 소설 중에 다섯 편이 감천의 문화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닥스훈트 소시지 빵」은 여타의 소설들에 대하여 일종의 원형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우선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두루 등장하는 여자(안나)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점이 그렇다. 그 주인공 여자의 존재만이 아니라, 발의 기형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소외되었던 경험이라든가, 뱃일을 나갔다가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부재, 베트남 사람인 생선 장수 엄마의 몸에 짙게 밴 지독한 비린내,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침범이자 침해일 뿐인 마을의 복원과 재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약간의 변주를 통해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감천항에 있는 냉동회사의 사서로 일하는 안나는, 기형의 발이 당하는 수난을 통해서 그 고단한 삶을 표현한다. 안나의 발을 가엾게 쓰다듬던 아버지는 죽었고, 축축한 운동화 속에서 불어 터진 그 발에 마음을 써주던 남자는 주민센터의 외벽에 벚꽃을 그리는 작업을 마치고 마을을 떠났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고무장화처럼 쓸쓸하게 남은 안나는, 벚나무 언덕에서 바라보는 항구의 불빛과 길쭉한 핫도그에서 자기의 그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이 소설집의 곳곳에서 핫도그 먹는 여자 안나를 만날 수 있다. 「쓸모 있다는 것」의 엄마는 이기적이고 무능한 아빠를 대신해 핫도그 장사를 하며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왔는데, 발에 붕대를 한 그 여자가 가게의 단골로 등장한다. 「물고기」에서는 뇌성마비 1급의 경련성 장애를 갖고 있는 서른 살의 호준이 주인공이다. 호준이 자기의 장애 때문에 집을 나간 아버지와 생활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상실감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마음을 물고기의 환상으로 위로하려고 할 때마다, 감천항의 냉동회사에서 일하는 여자가 그 환상과 모종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다. 소설의 여기저기에 편재(遍在)하는 이 여자들은 안나가 아닐 수도 있고 또 반드시 안나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안나인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이 여자는 감천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서로 느슨하게 이어주면서, 생활의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의 그 편재 자체로써 일상에 만연한 고단함과 쓸쓸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것은 취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서로 이어주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전체가 하나의 성장 서사라고 할 만하다. 자기의 장기를 팔아서 말기 신부전증인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는 진서(「쓸모 있다는 것」), 불편한 발을 견디며 감천항에서 일하는 안나(「닥스훈트 소시지 빵」), 대학을 다니는 대신 감천동 문화마을의 어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석(「흔들리다」),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자활을 위해 복지관의 카페에서 일하는 호준(「물고기」) 등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돌봄의 결여 속에서 자란 이 아이들이 훗날에 「그들만의 리그」의 미자가 되고, 「오늘은」의 수복이나 「긍휼히 여기소서」의 김씨와 같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김씨의 이런 자조가 예사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부모 사랑은 고사하고 어린 나이에 밥벌이로 나선 자신의 어린 날이 생각났다. 고픈 배를 안고 돌아가면 집은 비어 있었다. 엄마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했다. 동생과 함께 엄마를 기다리던 냉방의 쓸쓸함이 떠오르자 속이 시렸다.” 요컨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한 응원, 함께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정서적 충족감과 심리적 안정감. 가난, 장애, 남다른 외모 등의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아이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위로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그 외로움을 알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방치된 아이들의 비극을 다룬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그 사정과 그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참담한 현실을 가장 적확하게 꼬집는 표현이다.
이 소설집은 세상의 모든 고단한 이들을 위한 위로의 서사이기 이전에, 기나긴 성장통의 과정을 겪어낸 작가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기 격려의 서사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떠한 질곡을 겪고 모진 수난을 당한 뒤에도 기어이 희망의 한 자락을 선사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소설들의 주요 배경을 이루는 감천동 문화마을은, 고단한 삶을 함의하는 그 높다란 고개의 언덕과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항구의 불빛이 함의하는 희망을 표현하는 최적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바라보는가, 그 바라봄의 자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자기가 바라보는 그 위치의 감각을 일깨우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열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겪어낸 것들을 솔직하게 펼쳐낸다는 것, 자기 과잉이 아니라 자기에게 충실한 그 자리에서 타인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비로소 우애로운 연대의 당사자로 다가온다.
저자

임회숙

2008년부산일보신춘문예에단편소설「난쟁이의꿈」이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지은책으로『새롭게읽는토지』『길위에서부산을보다』『감천문화마을산책』이있다.

목차

흔들리다
오늘은
닥스훈트소시지빵
쓸모있다는것
그들만의리그
물고기
긍휼히여기소서
난쟁이의꿈

해설전성욱|희망을향한희귀한열정
작가의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