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누구든 나를 치면 피범벅이 되도록 곱절로 되갚아준다”(「밤의 소리」)던 문서정의 첫 소설집(『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강, 2020)의 공격적 수비자들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매혹적인 개성을 선보인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그와 같은 공격적 수비자들이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누가 불의 게임을 하는가」나 표제작인 「핀셋과 물고기」에서는 공격적 수비에는 재능이 없는 인물군이 일종의 대립소로서 함께 등장하고 있다. 이들을 수비적 공격자라고 불러볼 수 있을까. 공격적 수비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당한 만큼 상대에게 되갚는 적극적 공격성을 함의하는 것이라면, 수비적 공격은 폭력에 대한 맹렬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를 감히 상대를 향해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굴절시키는 지극히 수동적인 공격성을 내포한다. 양 방식 모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일 것이나, 치명적인 공격성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표제작인 「핀셋과 물고기」는 이러한 두 충동의 어긋남과 겹침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유주와 소정은 남성에 의한 폭력 피해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많은 유사성을 공유한다. 이들은 비슷한 나이에 하필이면 같은 빌라에 살며, 우연히도 모두 귀를 다쳐 같은 병원을 다닌다. 차이가 있다면 유주는 데이트폭력을 일삼던 전 남친의 환청에 시달린다는 것이고, 소정은 학교 선배로부터 극심한 폭행을 당한 이후 심리적 외상이 치유되지 않아 자신이 정말 회복된 게 맞는지 확인하고픈 강박에 시달린다는 정도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심리와 직결되는 객관적 상관물 역시 달라지는데 유주는 핀셋에, 소정은 물고기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된다. 공격적 수비자의 상징으로서의 핀셋과 수비적 공격자의 상징으로서의 물고기는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함께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조금씩 다른 변주를 겪게 된다. 우선 유주는 병원에서 핀셋을 훔치는 것을 그만둔다.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는 소정의 협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기란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훔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유주는 소정으로부터 선물받은 물고기들의 귀를 핀셋으로 찌르며 자신에게 남아 있는 폭력의 족쇄를 끊어내려 하는데 심지어 “언제까지 물고기처럼 소리도 안 낼 거냐”며 소정을 다그치기까지 한다. 유주의 바람처럼 소정이 정말 물고기를 모두 분양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유주가 그런 소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공격적 수비자와 수비적 공격자의 서사가 서로의 상처를 헤아리며 보듬는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어떻게든 성공하고 있는 것과 달리, 「레이나의 새」, 「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 「새들의 목욕」과 같은 작품들에서 연대를 향한 노력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여러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레이나의 새」의 경우 레이나와 ‘나’는 공통된 상처를 갖고 있지 않다. 유명 학원 강사였지만 거짓말이라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지킬 수조차 없었던 레이나와는 달리 ‘나’는 비록 오래 걸리기는 했어도 임용고시도 패스한 적이 있으며 그렇게까지 궁색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죽은 연인 서휘에 대한 처참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자기 사는 데 급급해 여자 친구의 생활고가 얼마나 심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심지어 궁금해하지조차 않았던 자신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를 모든 관계로부터 얼마간 떨어뜨려놓았을 따름이다. 레이나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뒤늦게나마 레이나를 서휘의 자리에 비춰보며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찾아 나서지만, 레이나의 자리에 온전히 설 수 없는 ‘나’는 단지 레이나가 꿈꾸고 의지했던 검은 새의 처연한 흔적과 그 외로운 날갯짓만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자식들의 무심한 이기심을 선명히 대비시키고 있는 「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의 경우, 연대의 불가능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고정되어 있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조용히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식물적 모성성은, 자식들의 엄지손가락에서 자라난 뿌리 깊은 티눈의 형태로나마 뒤늦게 스스로의 존재를 선명히 드러낸다.
「새들의 목욕」은 대우 좋은 아르바이트인 줄로만 알고 지원했던 새 목욕시키는 일이 불시에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통째로 넘겨받는 일로 돌변해버린 순간의 혼란스러운 막막함을 매개한다. 타인을 위한 마음의 여유라곤 아무리 쥐어짜도 만들어낼 수가 없는 삭막한 일상의 연속에서, ‘나’는 “지루해, 희마 업스, 주고 시퍼”라는, 아마도 주인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앵무새들의 기이하게 뭉개지고 뒤틀린 말의 잔해로부터 섬뜩한 위험 신호를 감지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남자는 돌연 사라지는데, 매번 송금하기 귀찮다며 한꺼번에 지불한 십 개월분의 보수는 결국 새들을 부탁하기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그러니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라며 홀로 하소연해보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넘겨받은 생명을, 응답할 수 없는 남자의 슬픔과 그 상처의 무게와 함께 묵묵히 떠안는다.
나는 타자에 대해 알지 못하며, 그 고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도 그 실패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위태롭게 깨닫는 자리에서 상처는 비로소 타자의 굳은 경계를 떠나 나에게로 승계되고 상속된다. 이 경우 타자와 나 사이에는 데칼코마니와 같은 대칭성보다는 철저한 비대칭성이 놓이게 된다. 연대와 화합과 같은 긍정적 서사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타자가 남겨놓은 상처의 중심에 영구히 거주하며 당신이라는 불가능을 함께 앓고 견디겠다는 의지의 열림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이 역시 궁극적으론 타자를 향한 환대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서정의 소설은 「태연한 밤」에서처럼 타자의 절대성이 불러일으키는 피로감에 주체가 무력히 잠식되고야 마는 암울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항시 문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좀 도와줄래요?”와 같이 수없이 부서지고 뭉개진 목소리의 파편으로라도 살아남아 딱딱하게 굳은 의식의 살갗을 뚫고 기어코 몇 번이고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죄책감으로 밀봉된 마음의 허방을 응시하며 그 집요한 시선을 결코 쉽게 거두지 않는다.
유기적 체질이 마주해야 할 궁극적인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짐이라는 운명에 저항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의미의 충만한 회복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들의 두번째 롬복」과 「흙새」는 이 단순한 진실을 향한 서글픈 헌사이다. 「우리들의 두번째 롬복」은 파탄에 이른 부부 관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이별의 이미지를 덧대기 위해 ‘나’가 꾸며낸 그럴듯한 추억 여행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간다. 여행의 마지막 날, 불륜을 저지른 남편 현오에게 달콤한 복수의 칼날을 던지듯 부부 생활의 끝을 통보할 예정이었던 나의 계획은 사소한 불운과 우연들로 인해 모두 엉클어져버린다. 거짓투성이의 결혼 생활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애정과 헌신만큼은 진실이었기를 바랐던 나의 마지막 환상은, 물에 빠진 현오가 저 혼자 살겠다고 ‘나’의 손을 먼저 놓아버림과 동시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유기적 체질의 허망함을 충만한 의미로 채우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흙새」의 ‘나(민정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의의 사고로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은 정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지녔던 사람들 주위를 원혼이 되어 끊임없이 맴돈다. 자신의 생전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지인들 앞에서 정현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란 외롭지 않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온갖 거짓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스스로에게만큼은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사는 중반부에 이르러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무결한 줄로만 알았던 남편도 대학 후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정현이 죽으면 외롭지 않게 자신도 함께 묻히고 싶다며 달콤한 말을 늘어놓던 C 역시 너무도 쉽게 자신을 잊어버리고 만다. 정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모두 이미지로 규정짓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 위태로운 허상을 죽어서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흙새는 충만함과 허망함 사이를 매개하는 아름다운 가상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가상이 불가능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드러내주는 고통스러운 실재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평등해진다.
문서정의 소설에서 유기됨은 단지 체질의 문제일 뿐이므로, 누구보다도 오래 견뎌온 몸속 뜨거운 기운과 관련된 문제일 따름이므로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불행도 예외적 사고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얼마쯤 유기적 체질을 갖고 태어나며 다만 그 체질을 연소시키는 방식과 호흡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유기적 체질이라는 얼마간의 공통분모 속에서 대체될 수도, 환원될 수도 없는 고유한 외침과 시선들이 조금 더 짙어진 어둠의 깊이를 공평히 나눠 갖는다. 슬픔은 그럴 때 아주 조금 더 견뎌낼 만한 무엇이 된다. 견디기 쉬워진다는 말이 아니다. 슬픔이 고유한 이름을 얻는 드물고 아름다운 시간들 속에서, 상실은, 버려짐은, 갈망은 몇 번이고 앓고 복기해볼 만한 우리의 타고난 체질이 된다. 문서정의 소설은 우리가 가끔 너무도 쉽게 잊고 마는 유기적 체질에 대한 공정한 기록이자, 우리가 반드시 물려받아야 할 슬픔의 정당한 목록들이다.
표제작인 「핀셋과 물고기」는 이러한 두 충동의 어긋남과 겹침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유주와 소정은 남성에 의한 폭력 피해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많은 유사성을 공유한다. 이들은 비슷한 나이에 하필이면 같은 빌라에 살며, 우연히도 모두 귀를 다쳐 같은 병원을 다닌다. 차이가 있다면 유주는 데이트폭력을 일삼던 전 남친의 환청에 시달린다는 것이고, 소정은 학교 선배로부터 극심한 폭행을 당한 이후 심리적 외상이 치유되지 않아 자신이 정말 회복된 게 맞는지 확인하고픈 강박에 시달린다는 정도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심리와 직결되는 객관적 상관물 역시 달라지는데 유주는 핀셋에, 소정은 물고기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된다. 공격적 수비자의 상징으로서의 핀셋과 수비적 공격자의 상징으로서의 물고기는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함께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조금씩 다른 변주를 겪게 된다. 우선 유주는 병원에서 핀셋을 훔치는 것을 그만둔다.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는 소정의 협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기란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훔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유주는 소정으로부터 선물받은 물고기들의 귀를 핀셋으로 찌르며 자신에게 남아 있는 폭력의 족쇄를 끊어내려 하는데 심지어 “언제까지 물고기처럼 소리도 안 낼 거냐”며 소정을 다그치기까지 한다. 유주의 바람처럼 소정이 정말 물고기를 모두 분양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유주가 그런 소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공격적 수비자와 수비적 공격자의 서사가 서로의 상처를 헤아리며 보듬는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어떻게든 성공하고 있는 것과 달리, 「레이나의 새」, 「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 「새들의 목욕」과 같은 작품들에서 연대를 향한 노력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여러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레이나의 새」의 경우 레이나와 ‘나’는 공통된 상처를 갖고 있지 않다. 유명 학원 강사였지만 거짓말이라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지킬 수조차 없었던 레이나와는 달리 ‘나’는 비록 오래 걸리기는 했어도 임용고시도 패스한 적이 있으며 그렇게까지 궁색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죽은 연인 서휘에 대한 처참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자기 사는 데 급급해 여자 친구의 생활고가 얼마나 심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심지어 궁금해하지조차 않았던 자신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를 모든 관계로부터 얼마간 떨어뜨려놓았을 따름이다. 레이나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뒤늦게나마 레이나를 서휘의 자리에 비춰보며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찾아 나서지만, 레이나의 자리에 온전히 설 수 없는 ‘나’는 단지 레이나가 꿈꾸고 의지했던 검은 새의 처연한 흔적과 그 외로운 날갯짓만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자식들의 무심한 이기심을 선명히 대비시키고 있는 「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의 경우, 연대의 불가능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고정되어 있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조용히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식물적 모성성은, 자식들의 엄지손가락에서 자라난 뿌리 깊은 티눈의 형태로나마 뒤늦게 스스로의 존재를 선명히 드러낸다.
「새들의 목욕」은 대우 좋은 아르바이트인 줄로만 알고 지원했던 새 목욕시키는 일이 불시에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통째로 넘겨받는 일로 돌변해버린 순간의 혼란스러운 막막함을 매개한다. 타인을 위한 마음의 여유라곤 아무리 쥐어짜도 만들어낼 수가 없는 삭막한 일상의 연속에서, ‘나’는 “지루해, 희마 업스, 주고 시퍼”라는, 아마도 주인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앵무새들의 기이하게 뭉개지고 뒤틀린 말의 잔해로부터 섬뜩한 위험 신호를 감지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남자는 돌연 사라지는데, 매번 송금하기 귀찮다며 한꺼번에 지불한 십 개월분의 보수는 결국 새들을 부탁하기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그러니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라며 홀로 하소연해보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넘겨받은 생명을, 응답할 수 없는 남자의 슬픔과 그 상처의 무게와 함께 묵묵히 떠안는다.
나는 타자에 대해 알지 못하며, 그 고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도 그 실패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위태롭게 깨닫는 자리에서 상처는 비로소 타자의 굳은 경계를 떠나 나에게로 승계되고 상속된다. 이 경우 타자와 나 사이에는 데칼코마니와 같은 대칭성보다는 철저한 비대칭성이 놓이게 된다. 연대와 화합과 같은 긍정적 서사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타자가 남겨놓은 상처의 중심에 영구히 거주하며 당신이라는 불가능을 함께 앓고 견디겠다는 의지의 열림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이 역시 궁극적으론 타자를 향한 환대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서정의 소설은 「태연한 밤」에서처럼 타자의 절대성이 불러일으키는 피로감에 주체가 무력히 잠식되고야 마는 암울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항시 문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좀 도와줄래요?”와 같이 수없이 부서지고 뭉개진 목소리의 파편으로라도 살아남아 딱딱하게 굳은 의식의 살갗을 뚫고 기어코 몇 번이고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 죄책감으로 밀봉된 마음의 허방을 응시하며 그 집요한 시선을 결코 쉽게 거두지 않는다.
유기적 체질이 마주해야 할 궁극적인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짐이라는 운명에 저항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의미의 충만한 회복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들의 두번째 롬복」과 「흙새」는 이 단순한 진실을 향한 서글픈 헌사이다. 「우리들의 두번째 롬복」은 파탄에 이른 부부 관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이별의 이미지를 덧대기 위해 ‘나’가 꾸며낸 그럴듯한 추억 여행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간다. 여행의 마지막 날, 불륜을 저지른 남편 현오에게 달콤한 복수의 칼날을 던지듯 부부 생활의 끝을 통보할 예정이었던 나의 계획은 사소한 불운과 우연들로 인해 모두 엉클어져버린다. 거짓투성이의 결혼 생활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애정과 헌신만큼은 진실이었기를 바랐던 나의 마지막 환상은, 물에 빠진 현오가 저 혼자 살겠다고 ‘나’의 손을 먼저 놓아버림과 동시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유기적 체질의 허망함을 충만한 의미로 채우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흙새」의 ‘나(민정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의의 사고로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은 정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지녔던 사람들 주위를 원혼이 되어 끊임없이 맴돈다. 자신의 생전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지인들 앞에서 정현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란 외롭지 않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온갖 거짓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스스로에게만큼은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사는 중반부에 이르러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무결한 줄로만 알았던 남편도 대학 후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정현이 죽으면 외롭지 않게 자신도 함께 묻히고 싶다며 달콤한 말을 늘어놓던 C 역시 너무도 쉽게 자신을 잊어버리고 만다. 정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모두 이미지로 규정짓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 위태로운 허상을 죽어서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흙새는 충만함과 허망함 사이를 매개하는 아름다운 가상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가상이 불가능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드러내주는 고통스러운 실재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평등해진다.
문서정의 소설에서 유기됨은 단지 체질의 문제일 뿐이므로, 누구보다도 오래 견뎌온 몸속 뜨거운 기운과 관련된 문제일 따름이므로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불행도 예외적 사고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얼마쯤 유기적 체질을 갖고 태어나며 다만 그 체질을 연소시키는 방식과 호흡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유기적 체질이라는 얼마간의 공통분모 속에서 대체될 수도, 환원될 수도 없는 고유한 외침과 시선들이 조금 더 짙어진 어둠의 깊이를 공평히 나눠 갖는다. 슬픔은 그럴 때 아주 조금 더 견뎌낼 만한 무엇이 된다. 견디기 쉬워진다는 말이 아니다. 슬픔이 고유한 이름을 얻는 드물고 아름다운 시간들 속에서, 상실은, 버려짐은, 갈망은 몇 번이고 앓고 복기해볼 만한 우리의 타고난 체질이 된다. 문서정의 소설은 우리가 가끔 너무도 쉽게 잊고 마는 유기적 체질에 대한 공정한 기록이자, 우리가 반드시 물려받아야 할 슬픔의 정당한 목록들이다.
핀셋과 물고기 (문서정 소설집)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