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 정원에서 (한수영 소설집)

바질 정원에서 (한수영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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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바질 정원에서』는 소설가 한수영이 십칠 년 만에 펴내는 두번째 소설집이다. 긴 시간에 걸쳐 발표한 단편들이 묶인 셈인데, 일관된 특징이 감지된다. 수학적 정밀함을 떠올리게 하는 꽉 짜인 구성과 팽팽한 언어의 긴장, 밀도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주제가 응축되고 퍼져나가는 핵심 이미지가 뚜렷이 떠오른다. 한마디로 단편소설에 요구되는 고전적 규범과 미학에 한결같이 충실하다. 가난과 결핍, 소외와 배제의 어두운 세계가 인물들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 채 이들의 삶을 지탱하고 열어갈 빛은 현실에 대한 단단한 관찰 속에 희미하게 숨어 있다.
저자

한수영

2002년단편소설「나비」로중앙신인문학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2004년장편소설『공허의1/4』로오늘의작가상을받았다.소설집으로『그녀의나무핑궈리』,장편소설로『플루토의지붕』『조의두번째지도』『낮잠』,청소년소설로『오로라2-241』이있다.

목차

바질정원에서
만조유생
파이
아마늦은여름이었을거야
새의말
사랑의지점
지금어디쯤이에요?
달개비꽃


해설잘못울린종소리,새의말을듣는시간|정홍수(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코로나시대에쓰인최근작「바질정원에서」와비교적오래전에발표된「파이」(2009)는나란히함께읽고싶은마음을부추긴다.두작품은동일한구조를갖고있는데,짧은현재의시간을서사의표면에두고긴회상의시간을서사내적으로흐르게한다.주부로서무력감에시달리던「파이」의여성화자미현은텔레비전의퀴즈프로에출연하면서존재증명을시도하게되고,‘퀴즈왕’이걸린마지막문제앞에서정답인‘파이’와연관된과거대학시절의기억을돌이킨다.대학에서만나평생의친구가된오십대초반의기정,이현,혜영세여성은늦가을오후결혼하지않고혼자사는기정의집(성곽아래산동네의무허가땅에지은집)정원에모여하룻밤을같이보내면서굴곡진지난시간을돌아본다.「바질정원에서」의이야기인데,낙엽지는늦가을밤의시간은이들이지나고있는인생의어떤시기에조응하는것같다.두작품을함께읽으면「바질정원에서」가「파이」의후일담처럼느껴지기도한다.흥미로운것은두작품사이에‘소리’가공통적으로놓여있다는점인데,“한가지음만낼줄아는악기처럼바람이불때마다나뭇잎들은같은소리를냈다”는문장은「파이」를건너「바질정원에서」에도울리고있다.어둠의숲에서길을잃은미현과J에게‘한가지음의나뭇잎소리’가배경으로주어져야만했던이유가있을까.나뭇잎을흔드는바람소리는한갓무심한자연의움직임일테고언제든인물들의배경으로묘사될수있다.그러나생의중심을향한막막한갈증으로타들어가고있던미현의절박한의식에서보면자신과J를하나의운명으로사랑하고,그사랑의힘으로다시자신만의파이를향해길을떠날수있게도와줄세상의신호가필요했다고할수도있다.그러니까‘같은소리’는그렇게듣고싶은소리이며,얼마간의식의요청이었을것이다.숲의소리가또다시길을잃은주부미현의회고하는자리에서들려오고있다는점에서우리는여기에맹목의젊음을향한작가의안타까움을겹쳐볼수도있다.
「바질정원에서」에서기정의마당모임중느닷없이,“시도때도없이”울려오는종소리는말그대로자유롭고제멋대로다.기정의집뒤편성곽쪽작은선원,스님의치매걸린노모가무시로치는종이기때문이다.그런데이“잘못울린종소리”가소설의진행에독특한리듬을부여한다.세사람의대화가서사의거의전부인소설에서종소리는말을끊고,생각을끊고,곁가지로대화를흐르게만든다.종내늦은밤,정원의나뭇가지와바질,수국꽃가지등으로피운화롯불앞에서잠이들었을때새벽에세사람을깨운것도‘잘못울린종소리’였다.세사람앞에는싸늘히식은재만화로바닥에쌓여있었다.종소리에의해툭툭끊어지는리듬은이소설에서우리가읽어야하는것이세사람의대화가아니라,시월의가을밤을함께보내는이들세사람의‘시간’이라는사실을환기한다.이‘시간’은동시에대학신입생때만나오십대중반에이른이들이각자독립적으로힘겹게,그리고함께서로를‘물들이며’보내온인생의시간을가리키는것이기도하다.「바질정원에서」는이시간을소설의‘형식’으로만들면서짧은한편의소설이인생을비추고인간을이해하는훌륭한거울이될수있다는것을입증한다.
사과농사를짓는「새의말」의주인공한수는사년전국제결혼중개업체를통해캄보디아여성과결혼했고,태국에서온이주노동자를농장일꾼으로쓰고있다.수확기를앞둔한수의고민은무시로벌어지는새들의공격으로부터여물어가는사과알들을지키는일이다.한수는사과밭에그물망을쳐서새를잡은뒤,잡은새를높은가지에매달아두는방식으로새들의사과밭접근을막으려한다.한수영의소설은이와관련된배경서사를밀도있게구축하는가운데아내희선(한국명)과태국이주노동자씽사이에형성되는미묘한관계의양상을소설의핵심주제로돋을새김한다.여기서다문화사회나변화하는농촌의현실은특별한소재적선택의차원이아니라새롭게생겨나고있는타자성의착잡하고낯선지대를향한질문의사회적토대로포착되는데,그만큼보편적이고강렬한인간의이야기를낳고있다.
아파트부엌창아래에서우연히듣게된‘사랑의고백’전화.「사랑의지점」의중년여성제이는반복되는이상한우연이알수없는무기력에빠져있던자신의삶을뒤흔들고있다는것을알게된다.그러니까서울의공식적인날씨를결정하는경희궁옆서쪽언덕의관측소처럼사랑을고백하는특정한지점이존재한다면어떻게해야하나.‘사랑의지점’이먼저존재하고,거기서만‘진짜사랑’이생겨날수있으리라는전도된생각은표면적으로안정적인결혼생활의이면에생긴알수없는균열로부터자라난것일테다.그리고이런정황만이라면한수영의「사랑의지점」은얼마간익숙한서사의영역에속한다고볼수도있다.그러나부엌창아래로가서‘사랑의지점’을찾는제이의행동한가운데에는‘맨발’이라는한수영소설고유의모티브가있다.‘맨발’은한수영소설이세계를인식하고이해하려할때중요한원점의풍경을이루는것같다.첫소설집『그녀의나무핑궈리』에도‘맨발’의모티브는곳곳에서나타난다.연변에서시집와무능한남편의폭행을겪으면서도미싱일을하며어떻게든살아가는만자씨의신산(辛酸)과향수(鄕愁)는‘맨발’의‘갈라진발뒤꿈치’를통해거듭표현된다(「그녀의나무핑궈리」).
어쩌면‘맨발’이나‘발뒤꿈치’는작가의무의식과관련된원점의풍경일수도있다.‘맨발’로표상되는원초적인날것의자리는한수영소설이세계와마주서있을때,‘파이’나‘황종률’처럼삶의중심과의거리를재는기준점처럼반복회귀하는것일수도있다.한수영소설의‘맨발’은‘난독과오독’의가능성안에서끝내충분히해명되지않는삶의실재로남는다.「새의말」의세사람이털뽑힌산비둘기를쫓는그이상한대면의시간이후어떤관계속으로이동할지우리는알지못한다.「바질정원에서」의‘잘못울린종소리’는혜영의오래된악몽의짐을덜어내긴했을까.‘맨발’은언제나그대로남은채다만삶안에서서로를물들이고있다.한수영의소설과함께우리는오래도록‘새의말’만을알아들어야할지도모른다.그래도좋을것이다.그어둠속시간의연대안에는‘당신’을향한자리도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