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제이미 맥켄드릭 시집)

그 시절 (제이미 맥켄드릭 시집)

$15.00
Description
오늘 가던 길 멈추고 왜가리 한 마리가
-후들후들 떨며 한겨울 넘기라고 물도 빼지 않고 버려둔-
동네 수영장 가 구명대 위에 웅크리고 서서
정나미 다 떨어졌다는 눈초리로
텅 빈 물을 둘러보는 걸 지켜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건
피라미 한 마리도 없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물이라는 거냐?
물처럼 보이지만 물이 아닌
물. 저리 뭐가 없으니 공기라고 해도 되겠다.

나는 그 느낌을 안다. 나는 왜가리의 그 앎을
느낀다. 세상은 협잡이다.
내 앞머리가 떨린다. 내 어깨가 웅크려진다. 내 부리는
쇠못처럼, 손도끼 날처럼, 날카롭다.
그러나 헤엄치는 것도, 번뜩이는 것도, 날 노려보는 것도 없다.
내가 살펴보는 연못의 수면 아래엔.
-「아무것도 없다」 전문

제이미 맥켄드릭은 현재 영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 시절』은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으로 인한 강제 은둔 기간 중에 쓰였다. 이 시집에 덧붙여진 서언을 보면 코비드19 팬데믹과 그에 대한 방역 조치인 사회적 거리두기와 격리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그 시절”뿐 아니라 서양 문명의 “그 시절”까지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우리 모두가 당면한 오늘의 시대적 막막함을 견딜 수 있는 힘뿐 아니라, 불투명한 어둠에 잠겨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내일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으려 한 것이 아닐까? 이 시집에 담긴 것은 바로 그런 기억의 여정이다.
이 시집은 한 쌍의 그림과 시로 이루어진 “그림+글” 시 총 열다섯 편과 작가의 ‘서언’과 ‘노트’로 이루어진 작은 책이다. 제이미 맥켄드릭은 영국적인 감수성과 지성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다고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또한 화가로서도 대단한 성가를 누리고 있다. 달리 말해 맥켄드릭은 시와 그림이라는 두 개의 언어체계에 능통할 뿐 아니라, 그 둘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온 시인/화가이다. 이 시집은 맥켄드릭이 시와 그림 중 어느 한쪽만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빈칸처럼 남겨놓았다가 다른 쪽의 언어를 동원하여 채우고 완성한 시, ‘그림+글’ 시 한 묶음을 보여준다. 맥켄드릭의 시인/화가로서 면모는 시와 산문 구별 없이 그가 쓴 모든 글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는 어떤 특정한 사물 영상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맥켄드릭은 “대리석 파리,” “벼루,” “악어와 오벨리스크,” “화산”과 같은 사물을 집어 들어 그것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를 응축적으로 체현하는 글 영상(verbal image)으로 조형한다. 달리 말하면, 시인은 그 자체로서 문화적 의미와 역사적 연상을 소유한 사물의 이름을 시 속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영상으로 만든다. 사물의 이름이 갖는 회화적 표현력을 전유하여 자기 시의 표현력을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맥켄드릭의 글은 매우 회화적이다.
한편 맥켄드릭의 그림에서 사물은 사실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정형화되고 추상화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문화 어휘 저장고에서 꺼내 온 그림 영상(pictorial image)들을 마치 속기 부호처럼 또는 아이콘(icon)처럼 이용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의 그림 영상들은 이따금 엷은 황톳빛과 붉은빛 수채물감이 묻어나기도 하는 수묵화로서 동판화같이 예리하고 정밀한 느낌을 주는데, 장식적인 선, 점, 얼룩과 함께 어우러져 짙은 서정성을 띠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마음의 풍경화를 읽기 위해서는 거기에 동원된 영상의 문화적 의미, 영상의 배치 방법, 색상의 채도와 명암, 선과 점의 굵기와 크기, 얼룩과 지운 자국 등 화가의 의미 생산 전략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신경 써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맥켄드릭의 그림은 매우 문예적이다.

맥켄드릭의 『그 시절』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유럽인들의 역사적 경험에만 그치지 않고 인류 공동체의 집단적 경험과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 시인은 여기에 크고 작은 재난과 불행의 이미지들을 모아놓았다. 책 표지에 그려 넣은 벌건 용암이 흘러내리는 화산, 늙은 왜가리의 텅 빈 세상, 막막한 황무 공간, 약탈자와 약탈당한 자, 사자-나무를 죽인 사나운 바람과 실존적 피로, 화산 폭발과 지진, 여진에 갈라진 둥근 천장, 세상을 휩쓸고 있는 팬데믹 병원균, 전쟁으로 불타버린 도시, 미로, 벌레의 내습, 음울한 감옥, 무인도의 크루소, 친구의 무덤-기억의 여정에서 만난 이들 재난과 불행의 이미지를 한데 모아 흩어진 삶을 다시 잇고 도시를 다시 세우는 작업, 이것이 맥켄드릭이 예술가로서 자임한 책무이다. 재난의 시대에 맥켄드릭이 쓴 이 시집은 그의 자조 섞인 예술 옹호론이고, 그의 자아비판이자 문명 옹호론이며, 그의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작은 『신곡』이다.
저자

제이미맥켄드릭

(JamieMcKendrick)
1955년영국리버풀출생.일곱권의시집과두권의시선집을냈다.시집『대리석파리(TheMarbleFly)』는포워드최우수시집상을,시집『저밖에(OutThere)』는호손든상을받았다.2019년에는첨리상을받았다.『페이버20세기이태리시선(TheFaberBookof20th-centuryItalianPoetry)』을편집했으며이탈리아작가조르조바사니(GiorgioBassani)의연작소설『페라라이야기(IlromanzodiFerrara)』전편을번역했다.그밖에이탈리아시인발레리오마그렐리(ValerioMagrelli)의시집『포옹(TheEmbrace)』을번역하여옥스퍼드위든펠드상과존플로리오상을받았으며,이탈리아시인안토넬라아네다(AntonellaAnedda)의시집『군도(Archipelago)』를번역하여또다시존플로리오상을받았다.2020년에는시,미술,번역에대한사유를담은비평에세이집『낯선관계(TheForeignConnection)』를펴냈다.

목차

서언

아무것도없다
아무것도하지않으며
귀뚜라미-약탈꾼
사자-나무
사자궁전
머지강의무적(霧笛)
검은강
여진(餘震)
고가다리
미로
무당벌레의내습
출석부
그가내가되리
트윈픽스
L’AMORCHEMOVEILSOLEEL’ALTRESTELLE(해와또다른별들을움직이는그사랑으로)

시인노트

역자주해
역자해설|재난시대에쓴작은『신곡』-제이미맥켄드릭의기억과반향,애도와사랑의시편
번역에대하여
시인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