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봄 바다는 겉으론 잠잠해 보여도 속에서 들끓고 있으니 언제든 안심할 수 없다.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면 겨울 바다보다 무섭게 출렁여서 섬사람들은 봄날엔 함부로 배를 띄우지 않는다고 했다.”(「봄 바다」, 9쪽)
박규숙의 소설은 고요한 ‘봄 바다’를 닮았다. 좀 더 정확히는 ‘봄 바다’의 고요 속에 들끓는 겨울 바다를 품으려 한다. 문장은 짧게 끊어지며 이야기의 비등점을 누른다. 차갑고 건조한 말들은 사납게 들끓는 이야기의 열도를 문장의 여백에 여툰다. 물론 이야기는 끝내 숨지 못한다. ‘봄 바다’의 고요함조차 박규숙의 소설이 하려는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심연의 들끓음은 곧장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박규숙의 소설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대신 자꾸 해찰하며 다른 곳을 보고 가리킨다. 거기에는 봄날의 보리밭이 있고, 보리 이랑 흙더미 속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새끼 쥐들이 있다. 너푸가사리를 뜯어 오는 섬 소년이 있고, 너푸가사리를 처마 밑 그늘에 말리고 너푸가사리국을 끓이는 시간이 있다. 그러다 그 시간들 사이로 퇴적된 또 다른 시간의 지층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박규숙 소설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더디게 서사의 리듬을 형성해간다. 사나운 겨울 바다의 이야기는 끝내 다 말해지지 못하지만,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감싸인 그 이야기는 잠잠해진 채로 조금은 더 크고 관대하고 무심한 이야기 속으로 합류한다. 우리는 박규숙의 이야기가 계속 자신의 짐을 나눌 환유의 대상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해찰의 리듬과 시간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사물과 풍경들을 뒤늦게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미학 안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 방식을 찾으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작가의 충실성인지도 모른다.
박규숙 소설에는 ‘삼각관계’라고 부름직한 반복되는 이야기의 패턴이 있다. 등단작인 「은유와 고조」가 뚜렷이 그러하고, 비슷한 관계의 양상이 「봄 바다」 「피팅」 「카페 헤밍웨이」 「불온한 유월」 등에서도 보인다. 「피팅」의 경우 화자인 디자인실 신입 ‘나’가 후배로 들어온 소희에게 느끼는 미묘한 경쟁과 질투의 감정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데, 이를 일종의 인정투쟁의 과정으로 본다면 느슨한 대로 삼각관계의 구도를 적용할 수 있다. 「불온한 유월」은 아들의 여자 친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성 화자 ‘나’가 겪고 있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이 또한 연애와는 다른 지점에서 관계의 삼각형을 그려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이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변주라면, 「은유와 고조」, 「봄 바다」, 「카페 헤밍웨이」는 본격적인 삼각관계 서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박규숙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긴장과 갈등이 서사의 극적 강렬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관계의 대립은 서사를 움직이고 들어 올리는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시작과 함께 빠르게 서사 안에 안착된 뒤 일종의 ‘그 후’의 시간으로 조용히 접혀 들어간다. 서사는 극적 전개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가라앉고 침잠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페 헤밍웨이」에서 여성 화자 ‘나’와 우근의 결혼생활은 우근의 갑작스러운 결별 통보로 이미 파탄이 난 상태이다.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무대를 전전하던 우근을 대학 연극과에 입학시키고 나서야 어렵게 가족들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우근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카페에서 일하며 생활을 책임져왔다. 결혼한 지 일 년이 될 무렵 우근의 생일날 아침 식탁에서 ‘나’는 우근으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카페 헤밍웨이」의 서사는 느닷없는 방식으로 도착한 ‘나’의 결혼생활의 파국에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가 소설에서 계속 접하게 되는 것은 우근이 떠난 뒤 오빠의 카페를 인수해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나’의 일상이다. 우리는 뒤늦게 「카페 헤밍웨이」의 이야기가 관계의 갈등과 파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가 견디는 시간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집의 표제작 「어쩔 수 없었어」 역시 실패한 관계를 다루되, 후회와 미련, 거절과 배반의 극적 이야기를 전경화하지 않는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여성 화자 ‘나’와 지오는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대학가 옥탑방에서 함께 지냈다. ‘나’가 혼자 살고 있던 옥탑방으로 지오가 옮겨오는 식으로. 지금 두 사람은 같이 살지 않는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지오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어쩔 수 없었어.”(109쪽) 이게 다다. 소설의 현재에서 두 사람은 예전에 함께 살던 옥탑방 앞에서 만나 동네를 걷고 단골 식당에 들르고 극단 연습실 앞을 지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러면서 서로 어긋나는 기억들을 확인한다.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고, 끝난 관계에 변화가 생길 어떤 조짐도 없다. 그런데도 소설은 옛 동네를 걷는 두 사람의 한나절 짧은 산책의 풍경 안으로 시간 속에 접혀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무언가를 흔든다. 그 흔들림은 두 사람의 걷기를 따라가는 서사의 내밀한 리듬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삶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 세밀한 장소의 기억이 박규숙 소설의 조용한 서사를 떠받친다.
은유와 고조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은 중학교 동창으로, 도시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같이 지내온 육친 같은 친구다. 소설 「은유와 고조」 이야기다. 은유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일을 하고, 고조는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은유의 꿈도 패션디자이너였지만, 옷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고조가 늘 한발 앞섰고 은유는 자신의 꿈을 버렸다. 질투와 경쟁심을 한쪽에 두고 살아온 친구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두 사람 사이에 재오라는 남자가 나타난 뒤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다.
「봄 바다」는 뒤늦게 출발선에 선 박규숙 소설의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봄 바다」의 배경이 되는 남도의 섬 연지도의 이야기에는 인간관계의 특별한 측면을 중심으로 조금은 좁게 형성된 느낌을 주는 박규숙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사회역사적인 시간의 층위가 세심하게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 여성 화자 ‘나’는 K시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학교가 긴 휴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연지도에서 한철을 보낸 이야기를 회상한다. 그해 ‘봄날’의 시간을 이야기의 저류에서 흐르게 하는 소설의 섬세한 손길이 인상적이다. 친구인 A, A의 남편인 ‘그’(‘나’와 A의 교대 선배)와 맺고 있는 모호하고 불편한 관계가 ‘봄 바다’ 아래의 들끓음으로 진정될 수 있었다면(‘그’는 지금 ‘나’를 만나러 모하도에 들어와 있지만 이야기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 그것은 ‘봄날’의 시간이 소설 전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절제의 리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소리는 어떤 소리를 잠재운다. 그리고 어떤 소리가 잦아들면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그해 ‘봄날’의 시간과 소년 정우의 시간, 고모부네와 잔등 아주머니의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그 시간의 삼각형 안에서 ‘나’와 ‘그’의 이야기는 ‘봄 바다’를 닮아가고 있다. 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물길을 박규숙 소설이 더 자주, 더 많이 보여주길 기대하게 된다.
박규숙의 소설은 고요한 ‘봄 바다’를 닮았다. 좀 더 정확히는 ‘봄 바다’의 고요 속에 들끓는 겨울 바다를 품으려 한다. 문장은 짧게 끊어지며 이야기의 비등점을 누른다. 차갑고 건조한 말들은 사납게 들끓는 이야기의 열도를 문장의 여백에 여툰다. 물론 이야기는 끝내 숨지 못한다. ‘봄 바다’의 고요함조차 박규숙의 소설이 하려는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심연의 들끓음은 곧장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박규숙의 소설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대신 자꾸 해찰하며 다른 곳을 보고 가리킨다. 거기에는 봄날의 보리밭이 있고, 보리 이랑 흙더미 속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새끼 쥐들이 있다. 너푸가사리를 뜯어 오는 섬 소년이 있고, 너푸가사리를 처마 밑 그늘에 말리고 너푸가사리국을 끓이는 시간이 있다. 그러다 그 시간들 사이로 퇴적된 또 다른 시간의 지층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박규숙 소설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더디게 서사의 리듬을 형성해간다. 사나운 겨울 바다의 이야기는 끝내 다 말해지지 못하지만,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감싸인 그 이야기는 잠잠해진 채로 조금은 더 크고 관대하고 무심한 이야기 속으로 합류한다. 우리는 박규숙의 이야기가 계속 자신의 짐을 나눌 환유의 대상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해찰의 리듬과 시간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사물과 풍경들을 뒤늦게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미학 안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 방식을 찾으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작가의 충실성인지도 모른다.
박규숙 소설에는 ‘삼각관계’라고 부름직한 반복되는 이야기의 패턴이 있다. 등단작인 「은유와 고조」가 뚜렷이 그러하고, 비슷한 관계의 양상이 「봄 바다」 「피팅」 「카페 헤밍웨이」 「불온한 유월」 등에서도 보인다. 「피팅」의 경우 화자인 디자인실 신입 ‘나’가 후배로 들어온 소희에게 느끼는 미묘한 경쟁과 질투의 감정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데, 이를 일종의 인정투쟁의 과정으로 본다면 느슨한 대로 삼각관계의 구도를 적용할 수 있다. 「불온한 유월」은 아들의 여자 친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성 화자 ‘나’가 겪고 있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이 또한 연애와는 다른 지점에서 관계의 삼각형을 그려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이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변주라면, 「은유와 고조」, 「봄 바다」, 「카페 헤밍웨이」는 본격적인 삼각관계 서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박규숙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긴장과 갈등이 서사의 극적 강렬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관계의 대립은 서사를 움직이고 들어 올리는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시작과 함께 빠르게 서사 안에 안착된 뒤 일종의 ‘그 후’의 시간으로 조용히 접혀 들어간다. 서사는 극적 전개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가라앉고 침잠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페 헤밍웨이」에서 여성 화자 ‘나’와 우근의 결혼생활은 우근의 갑작스러운 결별 통보로 이미 파탄이 난 상태이다.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무대를 전전하던 우근을 대학 연극과에 입학시키고 나서야 어렵게 가족들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우근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카페에서 일하며 생활을 책임져왔다. 결혼한 지 일 년이 될 무렵 우근의 생일날 아침 식탁에서 ‘나’는 우근으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카페 헤밍웨이」의 서사는 느닷없는 방식으로 도착한 ‘나’의 결혼생활의 파국에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가 소설에서 계속 접하게 되는 것은 우근이 떠난 뒤 오빠의 카페를 인수해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나’의 일상이다. 우리는 뒤늦게 「카페 헤밍웨이」의 이야기가 관계의 갈등과 파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가 견디는 시간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집의 표제작 「어쩔 수 없었어」 역시 실패한 관계를 다루되, 후회와 미련, 거절과 배반의 극적 이야기를 전경화하지 않는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여성 화자 ‘나’와 지오는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다녔던 대학가 옥탑방에서 함께 지냈다. ‘나’가 혼자 살고 있던 옥탑방으로 지오가 옮겨오는 식으로. 지금 두 사람은 같이 살지 않는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지오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어쩔 수 없었어.”(109쪽) 이게 다다. 소설의 현재에서 두 사람은 예전에 함께 살던 옥탑방 앞에서 만나 동네를 걷고 단골 식당에 들르고 극단 연습실 앞을 지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러면서 서로 어긋나는 기억들을 확인한다.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고, 끝난 관계에 변화가 생길 어떤 조짐도 없다. 그런데도 소설은 옛 동네를 걷는 두 사람의 한나절 짧은 산책의 풍경 안으로 시간 속에 접혀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무언가를 흔든다. 그 흔들림은 두 사람의 걷기를 따라가는 서사의 내밀한 리듬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삶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 세밀한 장소의 기억이 박규숙 소설의 조용한 서사를 떠받친다.
은유와 고조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은 중학교 동창으로, 도시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같이 지내온 육친 같은 친구다. 소설 「은유와 고조」 이야기다. 은유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일을 하고, 고조는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은유의 꿈도 패션디자이너였지만, 옷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고조가 늘 한발 앞섰고 은유는 자신의 꿈을 버렸다. 질투와 경쟁심을 한쪽에 두고 살아온 친구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두 사람 사이에 재오라는 남자가 나타난 뒤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다.
「봄 바다」는 뒤늦게 출발선에 선 박규숙 소설의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봄 바다」의 배경이 되는 남도의 섬 연지도의 이야기에는 인간관계의 특별한 측면을 중심으로 조금은 좁게 형성된 느낌을 주는 박규숙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사회역사적인 시간의 층위가 세심하게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 여성 화자 ‘나’는 K시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학교가 긴 휴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연지도에서 한철을 보낸 이야기를 회상한다. 그해 ‘봄날’의 시간을 이야기의 저류에서 흐르게 하는 소설의 섬세한 손길이 인상적이다. 친구인 A, A의 남편인 ‘그’(‘나’와 A의 교대 선배)와 맺고 있는 모호하고 불편한 관계가 ‘봄 바다’ 아래의 들끓음으로 진정될 수 있었다면(‘그’는 지금 ‘나’를 만나러 모하도에 들어와 있지만 이야기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 그것은 ‘봄날’의 시간이 소설 전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절제의 리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소리는 어떤 소리를 잠재운다. 그리고 어떤 소리가 잦아들면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그해 ‘봄날’의 시간과 소년 정우의 시간, 고모부네와 잔등 아주머니의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그 시간의 삼각형 안에서 ‘나’와 ‘그’의 이야기는 ‘봄 바다’를 닮아가고 있다. 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물길을 박규숙 소설이 더 자주, 더 많이 보여주길 기대하게 된다.
어쩔 수 없었어 (박규숙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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