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디푸른

푸르디푸른

$14.00
Description
김연경의 장편 『푸르디푸른』은 작가의 전공이기도 한 러시아문학의 자장을 작품의 형식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것은 작품 앞뒤에 액자 형식으로 놓여 있는(나중에 청우의 소설이라고 설명되는) 러시아 문학가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덤에서 일어나 마치 좀비처럼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노작가. ‘부활’과 ‘뇌전증’이라는 키워드로 암시되는 이 작가의 정체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도스토옙스키로 밝혀진다. ‘망자들의 향연’이라 이름 붙여진 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비단 도스토옙스키뿐만이 아니다. 벨린스키, 고골, 푸시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이제 곧 도착할 듯한 안톤 체호프까지, 여기에는 러시아문학의 빛나는 이름들이 모두 모여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소설 속 주인공 이청우가 쓰고 있던 ‘환상소설’의 일부였을 이 부분은 실은 소설 전체에 원경처럼 드리워진 작가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러시아문학은 이 소설에서 중력의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중력은 단순히 배경이나 분위기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이청우가 노파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나 강초연이 지하철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는 ‘육체’라는 키워드가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대작가들에서부터 주인공 이청우와 강초연, 안나와 니콜라이, 심지어 노파에 이르기까지 소설 속 인물들은 육체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것은 단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당연한 인간 존재의 전제 조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를 감각하며, 육체의 욕망과 충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무덤에서 일어난 도스토옙스키는 갑자기 요의를 느껴 “백 년이 한참 넘도록 방광에 고여 있던 샛노란 물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그다음에는 곧바로 허기를 느낀다. 노파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던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청우는 “며칠 묵은 변이 설사를 통해 한꺼번에 몸 밖을 빠져나갔을 때처럼 시원”하고, 처음 청우의 집에 간 초연은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소변과 대변을 쏟아낸다. 도드라지는 배설욕에 비하면 청우와 안나, 초연과 니콜라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육체적 교감과 관능적인 접촉은 차라리 매우 일반적인 성욕처럼 보인다. 식욕은 또 어떤가. 산딸기, 샌드위치, 팔도도시락, 커피와 담배, 빵과 치즈, 닭고기와 마카로니, 맥주, 보르시…… 소설 속 인물들을 계속해서 먹고, 만지고, 배설한다. 이 행위들은 서로 다른 욕망과 끊임없이 교차하고 반복되며 인물의 내면을 이룬다.
또한 소설에서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쉰 번 이상 반복된다. 인물들은 되풀이해서 시간을 말하고, 찾고, 감각하고, 인지한다. 기다리거나 떠올리거나 지나친다. 이 시간이 단지 흘러가는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 공간이 결합되면 그것은 특정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시공간이 연속되면 곧 시공간 연속체, 다시 말해 삶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한참 뒤에 이미 흘러가버린 시공간 연속체를 돌아보며 우리는 끝내 그것에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는 것이다.
소설의 시공간은 2001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이고, 이미 2024년 대한민국의 지금-여기와는 매우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독자로서의 우리는 이 소설이 일종의 시간여행이자 기억의 재조립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접혀 있던 시간이 펼쳐지는 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이 따라오는 법. 작품 속 “물리적으로는 측정할 수 없을 듯한 어떤 시간의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는 청우의 고백은 곧 작가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

김연경

저자:김연경
1975년경남거창에서태어나부산에서자랐다.서울대학교노어노문학과를졸업했다.1995년‘대학문학상’소설부문에당선되었고,1996년『문학과사회』로등단했다.소설집『고양이의,고양이에의한,고양이를위한소설』『내아내의모든것』『파우스트박사의오류』,연작소설『명왕성은왜』,장편소설『고양이의이중생활』『다시,스침들』『우주보다낯설고먼』등을펴냈다.도스토옙스키의『죄와벌』『악령』『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파스테르나크의『닥터지바고』등을번역했다.현재서울대학교에서러시아문학을강의하고있다.

목차


프롤로그소멸과불멸에관하여
2001년,페테르부르크
넵스키거리,스침들
접촉과오류
푸른자작나무사이로
파랑새의노래
응시
청우,안나,노파
열정소나타1악장
폰탄카강변에는똥이많다
비창소나타2악장
청춘
고양이사냥
무덤위에서화촉을밝히다
파국,그리고
에필로그망자들의향연

발문반짝이는뜨개질|문지혁(소설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작가의말

그렇다,전생은전쟁이었다.옛전장의자욱한담배연기에질식할것만같다.‘취한배’를타고지옥을떠돌던‘한철’,청춘.우리말의‘푸르다’는색깔에앞서맑음과밝음을뜻하지않나싶다.서슬퍼런야망과파란욕망,몸과마음의시퍼런멍,핀란드만의푸릇푸릇한관목숲과검푸른밤바다,푸르스름한우윳빛의희붐한페테르부르크백야,하얀자작나무의연둣빛잎사귀들,내고향거창의쪽빛하늘과초록빛논두렁,어디를가든항상내방의으슥한구석에서번식하던회청색곰팡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