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강동수의 소설은 대개 전지와 객관의 교차를 통하여 작가와 인물 사이의 아이러니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서술을 구사한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는 그동안 편의점을 매개로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 소위 ‘편의점 소설’과 다른 실험적인 시점을 선택하고 있다. 감시를 목적으로 설치한 CCTV를 관찰의 시점으로 전도하는데 이는 단지 의인화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눈이 감독의 것이듯이 이 소설에서 ‘오버워처 2호’는 관찰이자 작가 전지가 섞이는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전지적 서술이나 장치에 의한 관찰이라는 객관의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가능한 현실을 보이는 대로 제시하려는 의도의 반영이다. 이는 실질적인 관리와 감시의 주체인 ‘사십대 후반의 점장’을 관찰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시선의 전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편의점을 구성하는 사물과 인간뿐만 아니라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행인과 군중, 심지어 고양이까지 서술의 대상이 된다. 하루 동안에 편의점을 매개로 등장하는 사람들만으로도 세상의 일들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다 지난 탄핵 국면 정국의 거리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새벽 두시 넘어 담배를 사러 온 회사원을 시작으로, 아침으로 삼각김밥을 먹는 오피스텔에서 경리 겸 사환으로 일하는 소녀, 오후에 떼를 지어 나타나는 태극기 노인들, 저녁에 몰려드는 LED 촛불을 든 청년들, 택배 기사, 학원에서 단과 강의를 듣는 고교생들, 사무용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 남녀들, 학원을 파한 한 떼의 고등학생들, 술 취한 진상들, 대리운전 기사 등 새벽부터 낮을 거쳐 저녁을 지나서 밤이 늦도록 편의점의 안팎에서, 젠더와 세대 그리고 계급이 다른 많은 사람의 부서지고 휘말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사연이 전개된다. 직원이든 고객이든 거의 유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행위와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데 “일상을 채웠던 온갖 군상들이 사라진 쓰레기통 같은 거리”라는 표현처럼 희망 없는 세계처럼 비친다. “편의점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라는 마지막 서술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작가가 지닌 비관주의를 웅변한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세태소설에 머물지 않고 어느 정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길목이 될 수 있다.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이 소설과 대척에 위치하면서 같은 맥락에 놓인 작품이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이다. 한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계적인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발화로 이야기하게 한다. 서술의 방법은 일인칭 비망록 형식이다. 이는 자신이 최고라는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하다. 내밀한 자기 고백의 서술을 통하여 주인공인 ‘공 마에’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처럼 국제적 명성을 가진 희귀한 음악 천재와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해 쩔쩔매는 그 숱한 예술 천민을 동급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기 이상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최상의 자리에 두는 위계 미학을 철저하게 견지하면서 경쟁을 가장 중요한 예술의 원칙으로 삼는 엘리티즘을 휘두른다.
「공 마에의 비망록」처럼 「노다지」와 「도룡뇽의 꿈」도 사회적 화제를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노다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대구 근처 경산”의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에 금괴를 묻어두었다는 풍문에 원천을 두고 있다. 탈북 여성 ‘김연화’에 의하여 풍문이 현실이 되면서 발굴에 착수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구성의 주요 동력으로 삼는다. 「노다지」가 탈북자를 다루었다면 「도룡뇽의 꿈」은 노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 이 또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부산 해운대 LCT 건물이 서술의 배경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소재를 좇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노다지」가 모든 사람이 자본을 갈망하는 사태가 희망 없음의 징후임을 말하듯이 「도룡뇽의 꿈」도 진정한 꿈이 사라진 자리에 환상이 놓여 있으며 이 또한 쉽게 환멸로 변화할 수 있음을 서술하고자 한다.
“야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야만적인 방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말은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에서 ‘공 마에’가 한 말이다. 이는 「심연과 괴물」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말을 환기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자기 과장의 나르시시즘이 가져올 파괴적 국면은 선악의 위계를 넘어선다. 아무리 정의로운 목표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인간관의 표현이다. 그래서 「심연과 괴물」은 두 인물의 병치를 통하여 이 주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그 하나는 ‘한윤주’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호’의 행위이다. 전자는 대학 3학년으로 “다섯 명의 팀원들과 함께 집권당 당사에 쳐들어가 로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불을 내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대표실을 점거할 작정이었으나 불이 예상외로 크게 번지는 바람에 늙은 경비원과 임시직 여자 로비 안내원이 타 죽었다”. 후자는 중학생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을 죽게 하였다. 모두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처참한 과오를 지닌다.
트라우마의 심연은 “상처 입은 짐승”을 이해하는 ‘한윤주’의 눈빛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연과 괴물」에서 ‘한윤주’와 프로파일러 ‘이은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음속의 지옥”을 읽는다. 「올레에서 만난 사람」에서도 서로 상처를 이해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인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소설가이다. ‘나’는 자신이 쓴 소설이 표절로 내몰리면서 삶의 지반을 잃고서 악몽에 시달린다. ‘예상 표절’처럼 분명히 표절하지 않았으나 이전에 흡사한 작품이 있어 표절의 혐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러한 ‘나’가 만난 여성은 남편의 자살로 고통을 받고 있다. 단지 그의 상실로 우울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다. 남편이 마음속에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여성이 자살하자 이어 자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여성에게 사랑과 믿음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다. 남편이 빠져 죽은 바다는 그녀에게 아무런 치유의 징표를 보여주지 못한다. “바다란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라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에 나오는 ‘대양적 감정’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나’에게 ‘마라도’에 가자고 제안한 것일까? 그 끝은 죽음일까, 새로운 희망일까?
「집」은 집 없는 가족이 집을 얻는 과정을 가능한 객관을 유지하면서 일인칭 관찰자적 시점으로 서술한다. 그 모두에서 국내외의 역사적 사정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그러한 거시적 현실이 아니라 미시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여 성장과 입사(initiation)의 내적 드라마를 전경화하기보다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면모를 드러낸다. 셋방에서 셋집으로 마침내 집을 얻기까지 일가족의 애환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세를 들 때와 주인이 되어 달라진 위치에서 변화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그릴 때에 웃음을 유발할 만큼 실감을 자아내며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이라는 중대한 사건마저 차분하게 전달한다. 이로써 주관적 에세이가 아니라 단아한 소설로 격상하는데 특히 세든 ‘성자 누나’의 이야기를 부차적인 플롯으로 부가하면서 집 없는 삶의 의미를 다시 증폭하며 그녀가 주고 간 선물인 ‘마스코트 인형’을 후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을 기억하는 데에 이르러 서정소설의 효과마저 불러온다.
일곱 단편을 통하여 강동수가 제시한 인간상과 세계상은 다양하다. 각기 그에 상응하는 서술 상황을 만들어 구성의 동력을 이끄는 능력이 빼어나다. ‘글쎄’와 같은 말을 통하여 멈추고 다시 생각하며 회의하면서 작가의 개입을 허용하는 문체도 독특하다. 때론 인물의 무게를 넘는 작가의 지식이 개입하는 불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적절한 자유 간접 화법의 사용으로 ‘작가적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묘미가 종요롭다. 우울과 명랑함이 교차하는 비관주의는 장차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심화하는 요인이다. 미래를 낙관하는 희망은 없다. 오직 현재를 비관하는 이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비관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온통 비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도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작가적 혜안이 뚜렷하게 빛난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세태소설에 머물지 않고 어느 정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길목이 될 수 있다.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이 소설과 대척에 위치하면서 같은 맥락에 놓인 작품이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이다. 한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계적인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발화로 이야기하게 한다. 서술의 방법은 일인칭 비망록 형식이다. 이는 자신이 최고라는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하다. 내밀한 자기 고백의 서술을 통하여 주인공인 ‘공 마에’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처럼 국제적 명성을 가진 희귀한 음악 천재와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해 쩔쩔매는 그 숱한 예술 천민을 동급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기 이상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최상의 자리에 두는 위계 미학을 철저하게 견지하면서 경쟁을 가장 중요한 예술의 원칙으로 삼는 엘리티즘을 휘두른다.
「공 마에의 비망록」처럼 「노다지」와 「도룡뇽의 꿈」도 사회적 화제를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노다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대구 근처 경산”의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에 금괴를 묻어두었다는 풍문에 원천을 두고 있다. 탈북 여성 ‘김연화’에 의하여 풍문이 현실이 되면서 발굴에 착수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구성의 주요 동력으로 삼는다. 「노다지」가 탈북자를 다루었다면 「도룡뇽의 꿈」은 노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 이 또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부산 해운대 LCT 건물이 서술의 배경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소재를 좇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노다지」가 모든 사람이 자본을 갈망하는 사태가 희망 없음의 징후임을 말하듯이 「도룡뇽의 꿈」도 진정한 꿈이 사라진 자리에 환상이 놓여 있으며 이 또한 쉽게 환멸로 변화할 수 있음을 서술하고자 한다.
“야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야만적인 방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말은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에서 ‘공 마에’가 한 말이다. 이는 「심연과 괴물」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말을 환기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자기 과장의 나르시시즘이 가져올 파괴적 국면은 선악의 위계를 넘어선다. 아무리 정의로운 목표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인간관의 표현이다. 그래서 「심연과 괴물」은 두 인물의 병치를 통하여 이 주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그 하나는 ‘한윤주’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호’의 행위이다. 전자는 대학 3학년으로 “다섯 명의 팀원들과 함께 집권당 당사에 쳐들어가 로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불을 내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대표실을 점거할 작정이었으나 불이 예상외로 크게 번지는 바람에 늙은 경비원과 임시직 여자 로비 안내원이 타 죽었다”. 후자는 중학생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을 죽게 하였다. 모두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처참한 과오를 지닌다.
트라우마의 심연은 “상처 입은 짐승”을 이해하는 ‘한윤주’의 눈빛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연과 괴물」에서 ‘한윤주’와 프로파일러 ‘이은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음속의 지옥”을 읽는다. 「올레에서 만난 사람」에서도 서로 상처를 이해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인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소설가이다. ‘나’는 자신이 쓴 소설이 표절로 내몰리면서 삶의 지반을 잃고서 악몽에 시달린다. ‘예상 표절’처럼 분명히 표절하지 않았으나 이전에 흡사한 작품이 있어 표절의 혐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러한 ‘나’가 만난 여성은 남편의 자살로 고통을 받고 있다. 단지 그의 상실로 우울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다. 남편이 마음속에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여성이 자살하자 이어 자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여성에게 사랑과 믿음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다. 남편이 빠져 죽은 바다는 그녀에게 아무런 치유의 징표를 보여주지 못한다. “바다란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라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에 나오는 ‘대양적 감정’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나’에게 ‘마라도’에 가자고 제안한 것일까? 그 끝은 죽음일까, 새로운 희망일까?
「집」은 집 없는 가족이 집을 얻는 과정을 가능한 객관을 유지하면서 일인칭 관찰자적 시점으로 서술한다. 그 모두에서 국내외의 역사적 사정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그러한 거시적 현실이 아니라 미시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여 성장과 입사(initiation)의 내적 드라마를 전경화하기보다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면모를 드러낸다. 셋방에서 셋집으로 마침내 집을 얻기까지 일가족의 애환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세를 들 때와 주인이 되어 달라진 위치에서 변화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그릴 때에 웃음을 유발할 만큼 실감을 자아내며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이라는 중대한 사건마저 차분하게 전달한다. 이로써 주관적 에세이가 아니라 단아한 소설로 격상하는데 특히 세든 ‘성자 누나’의 이야기를 부차적인 플롯으로 부가하면서 집 없는 삶의 의미를 다시 증폭하며 그녀가 주고 간 선물인 ‘마스코트 인형’을 후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을 기억하는 데에 이르러 서정소설의 효과마저 불러온다.
일곱 단편을 통하여 강동수가 제시한 인간상과 세계상은 다양하다. 각기 그에 상응하는 서술 상황을 만들어 구성의 동력을 이끄는 능력이 빼어나다. ‘글쎄’와 같은 말을 통하여 멈추고 다시 생각하며 회의하면서 작가의 개입을 허용하는 문체도 독특하다. 때론 인물의 무게를 넘는 작가의 지식이 개입하는 불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적절한 자유 간접 화법의 사용으로 ‘작가적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묘미가 종요롭다. 우울과 명랑함이 교차하는 비관주의는 장차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심화하는 요인이다. 미래를 낙관하는 희망은 없다. 오직 현재를 비관하는 이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비관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온통 비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도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작가적 혜안이 뚜렷하게 빛난다.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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