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

$15.00
Description
강동수의 소설은 대개 전지와 객관의 교차를 통하여 작가와 인물 사이의 아이러니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서술을 구사한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는 그동안 편의점을 매개로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 소위 ‘편의점 소설’과 다른 실험적인 시점을 선택하고 있다. 감시를 목적으로 설치한 CCTV를 관찰의 시점으로 전도하는데 이는 단지 의인화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눈이 감독의 것이듯이 이 소설에서 ‘오버워처 2호’는 관찰이자 작가 전지가 섞이는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전지적 서술이나 장치에 의한 관찰이라는 객관의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가능한 현실을 보이는 대로 제시하려는 의도의 반영이다. 이는 실질적인 관리와 감시의 주체인 ‘사십대 후반의 점장’을 관찰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시선의 전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편의점을 구성하는 사물과 인간뿐만 아니라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행인과 군중, 심지어 고양이까지 서술의 대상이 된다. 하루 동안에 편의점을 매개로 등장하는 사람들만으로도 세상의 일들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다 지난 탄핵 국면 정국의 거리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새벽 두시 넘어 담배를 사러 온 회사원을 시작으로, 아침으로 삼각김밥을 먹는 오피스텔에서 경리 겸 사환으로 일하는 소녀, 오후에 떼를 지어 나타나는 태극기 노인들, 저녁에 몰려드는 LED 촛불을 든 청년들, 택배 기사, 학원에서 단과 강의를 듣는 고교생들, 사무용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 남녀들, 학원을 파한 한 떼의 고등학생들, 술 취한 진상들, 대리운전 기사 등 새벽부터 낮을 거쳐 저녁을 지나서 밤이 늦도록 편의점의 안팎에서, 젠더와 세대 그리고 계급이 다른 많은 사람의 부서지고 휘말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사연이 전개된다. 직원이든 고객이든 거의 유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행위와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데 “일상을 채웠던 온갖 군상들이 사라진 쓰레기통 같은 거리”라는 표현처럼 희망 없는 세계처럼 비친다. “편의점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라는 마지막 서술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작가가 지닌 비관주의를 웅변한다.
「편의점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세태소설에 머물지 않고 어느 정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길목이 될 수 있다.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이 소설과 대척에 위치하면서 같은 맥락에 놓인 작품이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이다. 한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계적인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발화로 이야기하게 한다. 서술의 방법은 일인칭 비망록 형식이다. 이는 자신이 최고라는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하다. 내밀한 자기 고백의 서술을 통하여 주인공인 ‘공 마에’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처럼 국제적 명성을 가진 희귀한 음악 천재와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해 쩔쩔매는 그 숱한 예술 천민을 동급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기 이상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최상의 자리에 두는 위계 미학을 철저하게 견지하면서 경쟁을 가장 중요한 예술의 원칙으로 삼는 엘리티즘을 휘두른다.
「공 마에의 비망록」처럼 「노다지」와 「도룡뇽의 꿈」도 사회적 화제를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노다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대구 근처 경산”의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에 금괴를 묻어두었다는 풍문에 원천을 두고 있다. 탈북 여성 ‘김연화’에 의하여 풍문이 현실이 되면서 발굴에 착수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구성의 주요 동력으로 삼는다. 「노다지」가 탈북자를 다루었다면 「도룡뇽의 꿈」은 노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 이 또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부산 해운대 LCT 건물이 서술의 배경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소재를 좇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노다지」가 모든 사람이 자본을 갈망하는 사태가 희망 없음의 징후임을 말하듯이 「도룡뇽의 꿈」도 진정한 꿈이 사라진 자리에 환상이 놓여 있으며 이 또한 쉽게 환멸로 변화할 수 있음을 서술하고자 한다.
“야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야만적인 방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말은 「공 마에의 한국 비망록」에서 ‘공 마에’가 한 말이다. 이는 「심연과 괴물」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말을 환기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자기 과장의 나르시시즘이 가져올 파괴적 국면은 선악의 위계를 넘어선다. 아무리 정의로운 목표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인간관의 표현이다. 그래서 「심연과 괴물」은 두 인물의 병치를 통하여 이 주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그 하나는 ‘한윤주’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호’의 행위이다. 전자는 대학 3학년으로 “다섯 명의 팀원들과 함께 집권당 당사에 쳐들어가 로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불을 내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대표실을 점거할 작정이었으나 불이 예상외로 크게 번지는 바람에 늙은 경비원과 임시직 여자 로비 안내원이 타 죽었다”. 후자는 중학생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을 죽게 하였다. 모두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처참한 과오를 지닌다.
트라우마의 심연은 “상처 입은 짐승”을 이해하는 ‘한윤주’의 눈빛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연과 괴물」에서 ‘한윤주’와 프로파일러 ‘이은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음속의 지옥”을 읽는다. 「올레에서 만난 사람」에서도 서로 상처를 이해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일인칭 주인공인 ‘나’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소설가이다. ‘나’는 자신이 쓴 소설이 표절로 내몰리면서 삶의 지반을 잃고서 악몽에 시달린다. ‘예상 표절’처럼 분명히 표절하지 않았으나 이전에 흡사한 작품이 있어 표절의 혐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러한 ‘나’가 만난 여성은 남편의 자살로 고통을 받고 있다. 단지 그의 상실로 우울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다. 남편이 마음속에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여성이 자살하자 이어 자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여성에게 사랑과 믿음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다. 남편이 빠져 죽은 바다는 그녀에게 아무런 치유의 징표를 보여주지 못한다. “바다란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라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에 나오는 ‘대양적 감정’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나’에게 ‘마라도’에 가자고 제안한 것일까? 그 끝은 죽음일까, 새로운 희망일까?
「집」은 집 없는 가족이 집을 얻는 과정을 가능한 객관을 유지하면서 일인칭 관찰자적 시점으로 서술한다. 그 모두에서 국내외의 역사적 사정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그러한 거시적 현실이 아니라 미시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여 성장과 입사(initiation)의 내적 드라마를 전경화하기보다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면모를 드러낸다. 셋방에서 셋집으로 마침내 집을 얻기까지 일가족의 애환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세를 들 때와 주인이 되어 달라진 위치에서 변화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그릴 때에 웃음을 유발할 만큼 실감을 자아내며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이라는 중대한 사건마저 차분하게 전달한다. 이로써 주관적 에세이가 아니라 단아한 소설로 격상하는데 특히 세든 ‘성자 누나’의 이야기를 부차적인 플롯으로 부가하면서 집 없는 삶의 의미를 다시 증폭하며 그녀가 주고 간 선물인 ‘마스코트 인형’을 후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을 기억하는 데에 이르러 서정소설의 효과마저 불러온다.
일곱 단편을 통하여 강동수가 제시한 인간상과 세계상은 다양하다. 각기 그에 상응하는 서술 상황을 만들어 구성의 동력을 이끄는 능력이 빼어나다. ‘글쎄’와 같은 말을 통하여 멈추고 다시 생각하며 회의하면서 작가의 개입을 허용하는 문체도 독특하다. 때론 인물의 무게를 넘는 작가의 지식이 개입하는 불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적절한 자유 간접 화법의 사용으로 ‘작가적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묘미가 종요롭다. 우울과 명랑함이 교차하는 비관주의는 장차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심화하는 요인이다. 미래를 낙관하는 희망은 없다. 오직 현재를 비관하는 이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비관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온통 비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도 희망도 사랑도 없는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작가적 혜안이 뚜렷하게 빛난다.
저자

강동수

저자:강동수
1961년경남마산에서태어났다.1994년세계일보신춘문예에단편소설「몽유시인을위한변명」이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고소설집『몽유시인을위한변명』『금발의제니』『언더더씨』『공마에의한국비망록』,장편소설『제국익문사』(전2권)『검은땅에빛나는』,산문집『가납사니의따따부따』등을펴냈다.봉생문화상문학상,교산허균문학상,오영수문학상,요산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편의점은살아있다
공마에의한국비망록
심연과괴물

올레에서만난사람
노다지
도롱뇽의꿈

해설비관주의라는희망|구모룡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강동수의소설은대개전지와객관의교차를통하여작가와인물사이의아이러니를효과적으로불러일으키는서술을구사한다.「편의점은살아있다」는그동안편의점을매개로사회학적접근을시도한소위‘편의점소설’과다른실험적인시점을선택하고있다.감시를목적으로설치한CCTV를관찰의시점으로전도하는데이는단지의인화에그치지않는다.영화에서카메라의눈이감독의것이듯이이소설에서‘오버워처2호’는관찰이자작가전지가섞이는시점이다.다시말해서실제전지적서술이나장치에의한관찰이라는객관의효과를불러오고있다.가능한현실을보이는대로제시하려는의도의반영이다.이는실질적인관리와감시의주체인‘사십대후반의점장’을관찰의대상으로포함하는시선의전도에서극명하게나타난다.그러니까편의점을구성하는사물과인간뿐만아니라편의점을드나드는사람들과그주변의행인과군중,심지어고양이까지서술의대상이된다.하루동안에편의점을매개로등장하는사람들만으로도세상의일들을알기에부족함이없다.여기에다지난탄핵국면정국의거리사정을배경으로한다.새벽두시넘어담배를사러온회사원을시작으로,아침으로삼각김밥을먹는오피스텔에서경리겸사환으로일하는소녀,오후에떼를지어나타나는태극기노인들,저녁에몰려드는LED촛불을든청년들,택배기사,학원에서단과강의를듣는고교생들,사무용건물에서쏟아져나온젊은남녀들,학원을파한한떼의고등학생들,술취한진상들,대리운전기사등새벽부터낮을거쳐저녁을지나서밤이늦도록편의점의안팎에서,젠더와세대그리고계급이다른많은사람의부서지고휘말리며고통으로일그러진표정과사연이전개된다.직원이든고객이든거의유동적인삶을살아가는사람들이다.이들의이야기는행위와대화를통해전달되는데“일상을채웠던온갖군상들이사라진쓰레기통같은거리”라는표현처럼희망없는세계처럼비친다.“편의점의불빛은꺼지지않는다.편의점은살아있다”라는마지막서술은결코낙관적이지않다.오히려작가가지닌비관주의를웅변한다.
「편의점은살아있다」는단순한세태소설에머물지않고어느정도자본주의리얼리즘에이르는길목이될수있다.희망도사랑도없는세계의징후가여기저기서드러난다.이소설과대척에위치하면서같은맥락에놓인작품이「공마에의한국비망록」이다.한때우리사회를떠들썩하게했던세계적인지휘자를주인공으로소환하여자신의발화로이야기하게한다.서술의방법은일인칭비망록형식이다.이는자신이최고라는나르시시즘을드러내기에매우적합하다.내밀한자기고백의서술을통하여주인공인‘공마에’의내면풍경을적나라하게드러낸다.“나처럼국제적명성을가진희귀한음악천재와악보도제대로읽지못해쩔쩔매는그숱한예술천민을동급에놓는다는것자체가내게는모욕”이라고생각하는그는자기이상의나르시시즘에빠져있다.그는자신의음악을최상의자리에두는위계미학을철저하게견지하면서경쟁을가장중요한예술의원칙으로삼는엘리티즘을휘두른다.
「공마에의비망록」처럼「노다지」와「도룡뇽의꿈」도사회적화제를바탕으로구성하였다.우선「노다지」는한국전쟁당시북한군이퇴각하면서“대구근처경산”의“나지막한야산자락에자리잡은크지도작지도않은절”에금괴를묻어두었다는풍문에원천을두고있다.탈북여성‘김연화’에의하여풍문이현실이되면서발굴에착수하고실패하는과정을구성의주요동력으로삼는다.「노다지」가탈북자를다루었다면「도룡뇽의꿈」은노년과청소년을대상으로한다.이또한사회적으로화제가되었던부산해운대LCT건물이서술의배경이다.이는작가가특별한소재를좇고있다는말이아니라「노다지」가모든사람이자본을갈망하는사태가희망없음의징후임을말하듯이「도룡뇽의꿈」도진정한꿈이사라진자리에환상이놓여있으며이또한쉽게환멸로변화할수있음을서술하고자한다.
“야만의함정에서빠져나오려면야만적인방식을동원할수밖에없지않은가”라는말은「공마에의한국비망록」에서‘공마에’가한말이다.이는「심연과괴물」에서“괴물과싸우는사람은그싸움속에서스스로괴물이되지않도록조심해야한다.우리가괴물의심연을들여다보면그심연또한우리를들여다본다”라는니체의말을환기하는주제로이어진다.자기과장의나르시시즘이가져올파괴적국면은선악의위계를넘어선다.아무리정의로운목표라고하더라도그행위가정당하지못하면악이될수있다는인간관의표현이다.그래서「심연과괴물」은두인물의병치를통하여이주제를풀어가고자한다.그하나는‘한윤주’의행위이고다른하나는‘이상호’의행위이다.전자는대학3학년으로“다섯명의팀원들과함께집권당당사에쳐들어가로비에휘발유를붓고불을질렀다.불을내고우왕좌왕하는틈을타대표실을점거할작정이었으나불이예상외로크게번지는바람에늙은경비원과임시직여자로비안내원이타죽었다”.후자는중학생으로폭력을자행하는아버지를죽이려고집에불을질러아버지는물론,할머니,어머니,여동생을죽게하였다.모두괴물과싸우다괴물이되는처참한과오를지닌다.
트라우마의심연은“상처입은짐승”을이해하는‘한윤주’의눈빛에서잘드러나는데「심연과괴물」에서‘한윤주’와프로파일러‘이은희’는서로다른방식으로“마음속의지옥”을읽는다.「올레에서만난사람」에서도서로상처를이해하는남녀가등장한다.소설속에서일인칭주인공인‘나’는대학에서강의하는소설가이다.‘나’는자신이쓴소설이표절로내몰리면서삶의지반을잃고서악몽에시달린다.‘예상표절’처럼분명히표절하지않았으나이전에흡사한작품이있어표절의혐의에서벗어날길이없다.이러한‘나’가만난여성은남편의자살로고통을받고있다.단지그의상실로우울에사로잡힌상태가아니다.남편이마음속에다른여성을사랑하고있었고그여성이자살하자이어자살하였다는사실이다.그러니이여성에게사랑과믿음은한꺼번에사라지고만다.남편이빠져죽은바다는그녀에게아무런치유의징표를보여주지못한다.“바다란살아있는형이상학,바라볼때마다자신을잊게해주고가라앉혀주는광막함,다가와상처를핥아주고체념을부추기는닿을수있는무한”이라는「새들은페루에서죽다」에나오는‘대양적감정’과무관하다.그렇다면그녀는왜‘나’에게‘마라도’에가자고제안한것일까?그끝은죽음일까,새로운희망일까?
「집」은집없는가족이집을얻는과정을가능한객관을유지하면서일인칭관찰자적시점으로서술한다.그모두에서국내외의역사적사정을장식적요소로배치하면서작가는그러한거시적현실이아니라미시적인가족사를서술하려는의도를분명히하여성장과입사(initiation)의내적드라마를전경화하기보다구체적인생활세계의면모를드러낸다.셋방에서셋집으로마침내집을얻기까지일가족의애환을담담하게서술한다.세를들때와주인이되어달라진위치에서변화하는어머니의표정을그릴때에웃음을유발할만큼실감을자아내며일가족연탄가스중독이라는중대한사건마저차분하게전달한다.이로써주관적에세이가아니라단아한소설로격상하는데특히세든‘성자누나’의이야기를부차적인플롯으로부가하면서집없는삶의의미를다시증폭하며그녀가주고간선물인‘마스코트인형’을후일다시발견하는과정을기억하는데에이르러서정소설의효과마저불러온다.
일곱단편을통하여강동수가제시한인간상과세계상은다양하다.각기그에상응하는서술상황을만들어구성의동력을이끄는능력이빼어나다.‘글쎄’와같은말을통하여멈추고다시생각하며회의하면서작가의개입을허용하는문체도독특하다.때론인물의무게를넘는작가의지식이개입하는불만을보여주기도하지만적절한자유간접화법의사용으로‘작가적아이러니’를유발하는묘미가종요롭다.우울과명랑함이교차하는비관주의는장차자본주의리얼리즘을심화하는요인이다.미래를낙관하는희망은없다.오직현재를비관하는이에게희망이찾아오는법이다.그렇다고작가가비관주의자라는말은아니다.그의소설이온통비관주의의물결에휩쓸려떠내려가고있지않기때문이다.신뢰도희망도사랑도없는세계가펼쳐질지도모른다는작가적혜안이뚜렷하게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