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경의 빛 (박형숙 연작소설)

모경의 빛 (박형숙 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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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연작소설 『모경의 빛』에서 우리가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지난 연대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터를 잡은 한 가족의 초상이다. 도장업(‘뺑끼쟁이’)으로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진 과묵한 아버지, 빈한한 살림일망정 자식들의 교육에 열성이었던 품 넓은 어머니, 그리고 1남 4녀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이야기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거치며 급속하게 변화해온 한국 사회의 한 전형을 담고 있다. 빈곤 탈출,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향한 열망이 사회 전체에 들끓었던 시기의 핍진한 이야기는 세목 세목에서 뭉클하고 착잡한 시간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모경의 빛』이 지나간 시간의 작은 실타래들을 기억의 힘으로 정밀하게 복원하며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변화하는 사회적 배경 안에 있으되, 끝내 해소되지 않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인 듯하다. 연작소설의 중심 화자는 집안의 막내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에서 일인칭의 ‘나’, 이인칭의 ‘너’로 등장하거나, 때로는 ‘인해’, ‘세경’과 같은 이름을 부여받고 삼인칭으로 나오기도 한다. 작가의 분신, 페르소나로 짐작되는 이 인물에게 닥친 실존적 위기의식이 ‘가족’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아홉 편의 ‘가족 이야기’를 낳고 있다.
저자

박형숙

저자:박형숙
서울왕십리출생.서울대학교국어교육과와중앙대학교대학원문예창작과를졸업했다.중앙대,협성대등에서강의했다.1993년『실천문학』가을호로등단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으로『부치지않은편지』『아홉번째고독』『선량하고무해한휴일저녁의그들』(9인테마소설집)이있다.

목차

너의기원
모경
외롭고높고쓸쓸한
명동성당
오십원만
열일곱살의강
란이언니와은행잎한장
미자씨의기나긴하루
시그니엘빌리지

해설빛과상처의기원|정홍수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너의기원」은오십대중반의여성화자‘너’가암투병을계기로자신의‘기원’에대해질문을던지게되는이야기다.항암치료과정에서빠졌던머리가듬성듬성나오기시작했을무렵,‘너’는거울속자신의모습에서서른다섯해전에세상을떠난엄마의얼굴을발견한다.그렇게“무의식을가로지르며튀어나”온엄마의얼굴.그얼굴은“산동네에서자란너의어린시절과데모와반항으로점철된이십대의어둡고격렬했던기억”들을불러온다.과격한진술도나온다.“사춘기를암흑속에서보내고난뒤너는네안에서가족들을한명씩살해했다.제일먼저엄마를,다음에는아버지를,오빠를,언니들을.”발등으로흘러드는선홍색주사액이언젠가보았던연극속의붉은그림,마크로스코의「레드」를떠올리게하면서이어지는연상들.‘살의’라는과장된표현을걷어내고보면,암발병,수술,항암치료의힘든과정을거치며‘너’의‘의식’이아니라‘몸’이주관하는전면적인반성의시간이찾아온것이다.

연작소설전체에서가장핵심적인사건은어머니와아버지의죽음이라할수있는데,여러작품에서반복적으로그려지는그죽음의시간에소설의중심화자‘나’(‘너’)는왠지비껴나있다.구체적인정황과는별개로여기에는마음의공백이있다.애도는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소설은계속해서그순간으로돌아가려고한다.그돌이킴이뒤늦은애도의시간이될수있을까.아픈질문과함께어머니와아버지,형제들에대해‘나’가잘못알고있던것,망각했던사실들이돌아온다.기원의풍경은계속수정되면서현재의‘나’를흔들고움직인다.이움직임이‘나’에대한새로운발견,‘나’에대한더너른인식으로이어질수있을까.기원에대한질문,뒤늦은애도를향한안간힘은‘나’의실존적위기와원환(圓環)처럼맞물려있다.

연작소설속작품들은서로를향해열려있다.「너의기원」에서오랜망각을뚫고돌아온어머니의이야기는「모경」과「외롭고높고쓸쓸한」에서각기다른시점(視點)과기억의조망속에놓인다.「너의기원」의‘너’는「모경」에서오남매의막내딸‘인해’라는삼인칭의자리로물러서며,「외롭고높고쓸쓸한」에서는큰언니가쓰는편지글의수신자가된다.두작품에서어머니의모습은조금씩어긋나게기억되고서술된다.“네가아는엄마와다르다고?엄마가집안살림에도통관심이없고밖으로만나돌고히스테리만부렸다고?아니,아니야.그건엄마의참모습이아니야.그건아마도갱년기때문에어쩔수없이생겨난질병같은것이었을거야.”(「외롭고높고쓸쓸한」)아픈엄마대신에집안살림을챙겨야했던큰딸의고백속에는사춘기시절을외롭고어두웠던시절로기억하고있는‘너’에대한안타까움도있다.마주서있는두작품을통해작가는가난과가족으로부터탈출하려했던‘너’의좁고조급한의식을확장하려한다.그런데이러한시점의보완,기억의편차란결국작가의페르소나인‘나’/‘너’(혹은인해,수영)의의식의분화이기도하다는점에서소설곳곳에서드러나는공통의기억요소에대한관심으로우리를이끌기도한다.
그런가운데어머니의죽음이오랫동안기억저편에놓여있었던정황이드러난다.엄마‘모경’은스스로세상을버렸다.천주교식장례를치르기위해사망진단서에는‘심장마비’로기록된죽음.‘갱년기우울증’같은일반적진단이사용되고는있으나문제는그당시엄마가겪고있던마음의고통을가족누구도제대로알고있지못했다는사실에있다.「모경」과「외롭고높고쓸쓸한」두작품은엄마의고통,엄마의마지막순간에대한뒤늦은이해에바쳐지고있다.이산가족찾기열풍이불었을때모경이일본을거쳐사할린으로간오빠의소식을듣기위해여의도에서며칠을지새우고돌아왔지만,인해는엄마의간절함을전혀알지못했다.엄마는가족들에게가혹하기까지한살림꾼의면모한편으로이웃의어려움에발벗고나서고,봉사활동이나‘평화를위한’성당기도회등의명목으로집바깥으로의출분또한잦았는데이같은엄마의모습은이해의대상이아니었다.특히아버지와의갈등은회복하기힘들정도로깊어지고있었지만이또한마찬가지였다.어쩌면여성으로서엄마가지나야했던그막막하고암울한터널에는여성의삶의가능성이극도로제한되어있던시대의몫도컸을것이다.인해는엄마가자식들이버린노트에서툰글씨로쓴문장을기억저편에서떠올린다.“자유./내게필요한건자유.”

“평생감정을드러내보일줄몰랐던아버지”는‘너’에게“삶의어떤공백”으로남아있다.‘너’는오랫동안부녀간을잇는선은없다고생각해왔다.「오십원만」은그선을되찾으며또하나의좌절된애도를돌이키려한다.아버지를부르는‘뺑끼쟁이’라는말은가정환경조사서에적힐때만‘도장업’으로바뀌었고,너의어린가슴에통증을남겼다.일이없는겨울철어린‘너’에게아버지는하루종일방에앉아있는말없는‘등’으로기억된다.봄이오면페인트방울로얼룩진아버지의온갖노동도구들이창고에서나오고,아버지는일터로떠나게될것이다.아버지는‘노동기계’였고,사춘기의‘너’에게‘사물’이되어갔다.“아버지는너의장애물이었다.인생의걸림돌이었고,넘어야할벽이었다.”대학생이되고결혼하면서아버지와는더멀어졌다.뇌경색으로칠년간집안에갇혀지내다세상을뜨던날,‘너’는아버지의두눈에떠오른공포를기억한다.“하지만그공포는너의마음에까지덮치지는않았다.너는냉연히또물끄러미보고만있었다.”‘너’는‘너’의집으로돌아왔고,얼마뒤부고를들었다.세월도녹이지못한이‘냉연’의실체는무엇이었을까.아버지의이야기를‘나’(‘나’는소설가이며,거의작가의등신대로등장한다)의시점에서다시돌이키고있는「열일곱살의강」에는이런대목들이나온다.“아버지에대한나의분노.그것은정확히무엇이었을까?”“아버지에대해서말할수있는게하나도없다는것.그것이매번나를힘들게했다.”말그대로‘공백’이다.열일곱의나이에세상에홀로내던져진가엾은소년.그는일곱식구의가장으로전후(戰後)의한국사회에서뿌리내릴다른방도를알지못했을수도있다.「열일곱살의강」에는「오십원만」을거쳐‘너’/‘나’가내리는잠정적인답이하나있다.“누구도원망하지않기위해서./아버지가아무말하지않았던것은,그때문이었는지도모른다.그것은대결이아니라받아들임.(……)아버지는그렇게자신의운명을받아들인것인지도모른다.”세상을등진채죽도록일만하다가떠난‘노동기계’,그묵언의생애가딸로부터긍정되는순간이다.

화자와시점을달리하는연작소설의작품들은대부분빛과상처의기원을향한안타까운돌이킴을품고있지만,그것들은가족구성원각자가살아온이야기이기도하다.특히네자매의이야기는(「외롭고높고쓸쓸한」「란이언니와은행잎한장」「미자씨의기나긴하루」「시그니엘빌리지」)자매들사이에존재하는미묘한삶의편차,속깊은우애의순간을세심하게응시하는가운데어머니세대를포함해서녹록지않았던여성적삶에대한생생한보고를이룬다.그것은남성중심가부장제세상의일반적인억압과차별을보여주면서,하층집안의살림에서‘딸들’에게유독집중되었던경제적압력,여타생활의부담이어떠했는지도핍진하게드러낸다.그러나그아픔을포착하는소설의시선은그리강퍅하지않은것같다.어릴때부터수재소리를들으며명문여고에진학하고,은행원이되어집안을건사했던‘둘째언니’의굴곡진삶을막내인‘나’의시점에서서술하는「란이언니와은행잎한장」은회상의힘으로과거의시간을구원하려는연작소설의전체적흐름을아름답게압축한다.명문여고진학이겉보기와달리또다른좌절의계기가될줄누가알았겠는가.‘란이언니’의유다른‘차가움’은일찍세상의벽을알아버린이의방어기제였을수있다.여러차례불운이겹친‘란이언니’는다른형제들과도거의왕래가없는상황인데,소설속‘나’의원주행여로에서자동차라디오의노래,팔백년넘은은행나무의풍경으로돌아온다.황금빛단풍의절정을지난거대한나무주변에는떨어진은행잎이노란융단처럼깔려있다.‘나’의책꽂이에꽂힌‘란이언니’의문고판보들레르시집에는‘1974년12월19일란이의영원한친구가’라는글귀와함께오래된은행잎한장이끼어있다.금방이라도바스러질것처럼마른채.시간은부수고마모시키기도하지만보존하고고양시키기도한다.회상의빛속에서‘나’가일요일이면라디오앞에엎드려언니와함께들었던노래가돌아온다.은행잎은결국바스러지겠지만이미지는미약한대로잔존할것이다.이것은이번연작소설이지나간시간을기억하고보존하고들어올리는방식이다.

평생일만한아버지는“구부린등과입밖으로내민혀와사시처럼안쪽으로쏠리던두눈”의이미지로남았고,끝내열일곱살소년의환영(幻影)으로고양된다.“지는해의스러지는빛을받으며”산동네옥상꽃밭에서노래부르던엄마에게소설은‘모경(母敬)’이란이름으로영원한빛의이미지를건넨다.어쩌면그것으로된것인지도모른다.이번소설이할일은.골목길을헤매는‘나’의꿈길같은환영속에서‘란이언니’는돌아보며말한다.“인생은구부러진길쪽에있어.”『모경의빛』이박형숙소설이새롭게찾은기원이기도하다면,작가는오래도록저말을기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