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이사라 시집)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이사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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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사라의 여덟번째 시집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에는 이 세상의 끝에 다다른 자의 감회가 도저하다. “우리들 함께 살았는데/그들이 떠나고/당신이 떠난다”(「유언」)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건재하고 어느새 이별은 삶의 형식이 되었다. “곧 우리 생의 화면은 깨지”(「종교적」)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한 생이 마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밖은 이미 어둡고/저 무지개 너머의 세상은 더 이상 없다고/느낄 때” 바로 그 순간 시인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나에게 미안해//겨우겨우 살아내서 미안해”(「안에서 만져지는 몽글몽글한 슬픔」)라고 느닷없는 자책을 쏟아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198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래 시업 40여 년을 넘어서는 동안 심연 속 상처를 시의 표면 위로 불러내는 데 인색했던 ‘미학적 슬픔’의 대가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동안 접어두고 억제해온 슬픔의 주름을 풀고 ‘몽글몽글한’ 회한의 감상 덩어리를 끄집어내 거침없이 만지고 또 ‘만진다’. “새 풀과 새 물이 필요해요/언제나 건조해요/정착했는데 아닌가 봐요”(「유목」)라고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요청하는가 하면, “너와 사는 동안/순간순간/울컥했다”(「울컥」)고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그게 다 사랑 때문이야/누가 무어라 해도/그래!”(「그게 다 사랑 때문이야」)라고 격렬하게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고 할까. 예술가들의 노년에 종종 발견되는 비타협, 풀리지 않는 모순, 구조적 불협화음 등을 안정감이나 삶의 연륜, 지혜 등과 대비시키는 사이드는 조화와 해결의 징표 대신 예술가가 이제까지의 기존의 사회 질서와의 원활한 관계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뜻밖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소위 ‘자발적 망명’으로 규정되는 노대가의 지배체제와의 비타협적인 면모가 성숙한 예술의 지양된 형식보다 예술의 실체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사라의 이번 시집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집에는 2000년대 이후 시인의 작업, 이를테면 『시간이 지나간 시간』(2002), 『가족박물관』(2008), 『훗날 훗사람』(2013),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2018) 등의 여운이 없지 않으며 그것들을 심화하고 갱신하려는 의지도 두드러진다. 특히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적 진화론의 시간관에서 벗어나 시간을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현재로 출몰하는 ‘진흙 덩어리’이자 파편 같은 ‘토막’, 그리고 그 토막들이 서로 엮인 ‘사다리’ 같은 것으로 감수하는 지점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그동안 엄숙하게 고수해온 미학적 절제에서 벗어나 나이 들어가는 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직설적으로 분출하는 대목은 새롭다고 할 만하다. 형이상학적 주체에서 몸의 실존으로 옮겨가는 정체성의 재구성 과정이 슬픔의 눈물을 통해 타자와 공감하는 장면도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시집이 나와 너의 공감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완전한 합치의 전체성에는 격렬하고 냉소적으로 저항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이 ‘헐렁한 틈새’의 시학은 말년에 이른 이사라의 시의 또 다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이사라

저자:이사라
1981년『문학사상』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히브리인의마을앞에서』『미학적슬픔』『숲속에서묻는다』『시간이지나간시간』『가족박물관』『훗날훗사람』『저녁이쉽게오는사람에게』가있다.대한민국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을수상했다.서울과학기술대학교문예창작학과명예교수로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나는늘부분이었다.그래도
기록자
유목
울컥
이세상끝까지
텅빈주머니처럼헐렁하게
고고학자인당신께
실존
긴장
피붙이
자화상
눈물은신이주는것
영면직전에
운명
몸이그렇게슬픈건데
꿈을꿨어요
콧물이흐르는시간
황혼
누운꽃도아름다워
작품
그손이그립다

2부|안에서만져지는몽글몽글한슬픔
살고싶어서

나의가슴에게
사랑이라는울먹임
당신은품어야당신인데
흠뻑젖는다는것
구름너에게
낡은부부
그의얼굴
그게다사랑때문이야
안에서만져지는몽글몽글한슬픔
역사관앞에서생각하네
틈새
연분
종교적

3부|마음이깊을수록침묵의바닥위로쌓이는것들
어떤인생
지금보니
하산할때
한편의다큐로끝날수없는
봄날그사람
추억이서로다른
기일
더여린것들
우는일도일인데
등뒤의길
청춘에게
2020년의침묵
간절하다
사람들
유언

4부|이제우리는멈춰야한다는데
멍울하나
낯선사람
저녁에찍히는사진
유족의밤
누구나이별
꽃잎이떨어지는데
어쩌다깊은생각
많이아픈당신에게
폐가의기도
옛무덤
발의세계
그래요이제는
이제는이꽃
그끝에는
몸이된내가

5부|서로마음이마음에닿을때까지
내공
내주소는요
미물
용산역
100번버스정류장에서
이바닷가
카페OMG!
문이있던집
알래스카가는사람들
끊임이없이
귀가
꿈결
꽃아닌것들이
절대적으로사랑한다
멍한덩이

해설몸의세상,세상의몸,그헐렁한슬픔을향하여|신수정

출판사 서평

추천사

이‘헐렁한사랑’의파토스는정신의형이상학과무관하다.‘틈새’의수락,헐렁한존재로서의몸의실존은의식의균질적인통제의그물바깥으로주체를내몰고자한다.이성의그물에걸리지않게,감시와처벌의시선에서부터자유롭게.(……)‘그냥스쳐가주세요,주검으로남고싶어요.’근래그어떤시에서도찾아보기힘든강력한정언명령이여기있다.이사라의시는시의이름으로다시한번말한다.‘그냥스쳐가주세요,주검으로남고싶어요.’자발적추방이여기에있다.
신수정(문학평론가·명지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