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에도 상처가 핀다 (양장본 Hardcover)

젓가락에도 상처가 핀다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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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원근 시인은 이 아픔과 고통의 기표를 감추거나, 빗대거나, 은유하거나, 환유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것들을 애써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들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장식도 없이 눈물을 눈물이라 말하고, 슬픔을 슬픔이라 부르며, 허공을 허공이라 말한다. 그는 마치 베이컨의 고깃덩어리나 위트킨의 기형적 신체같이 슬픔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뱉어낸다. 그가 이런 정동들을 별다른 수식도 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그것들이 말 그대로 현실 자체의 물성物性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막의 수도사처럼 장식을 지운 채 슬픔이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견딘다. 그는 그가 견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그에게 시 쓰기란 일종의 고행이고 수행이다.
또한 정원근의 시들은 절망의 끝에서 시간을 건드리는 미적 형식들이다.
절망이 진짜 절망일 때, 슬픔이 진짜 슬픔일 때, 그것들은 수식을 거부한다. 수식을 거부한 날것의 아픔을 그 자체 미적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도 예술의 한 존재 방식이다. 이런 형식은 주로 세상의 바닥을 경험한 예술가에게서 나온다. 정원근은 절망과 아픔과 슬픔을 내면화하지 않는다. 거꾸로 그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아픔조차도 밖으로 꺼내놓는다. 그는 어둠의 심연이 아니라 백주에 절망의 구석구석을 보기를 원한다. 여기에 정원근의 건강함이 있다. 그는 아픈 상처를 햇빛에 꺼내놓고 맞짱 뜨고 있다.
—오민석(문학평론가)
저자

정원근

저자:정원근
충남금산출생
2000년『시와반시』등단

목차


제1부그대기억속의붉은사막은허구였네
10공중을나는물방울의중심이소용돌이친다
11너처럼울음이된다
14그대기억속의붉은사막은허구였네
15뿌리가아프다
16슬픈고양이
18살구나무를심는다
20지하도입구에서잠깐
22달빛의오래된이야기
23문을버리다
24슬픈풍경으로부터
26이별의방식들
28강물위에걸린연(鳶)을보다
30눈(雪)의소묘
31여보세요
32벽에대한불온(不穩)한이야기

제2부젓가락에도상처가핀다
36어떤잠
38사랑을잃고
39사막의일상에대한기억
40산에서저수지를만나다
42도시는낮달을버리고있다
44사마귀의뱃살은곡선을긋고있다
46젓가락에도상처가핀다
47소리는틈을만든다
48슬픔으로가득한고요한사랑의기억들
50횟집을지나다
52어느날,물소리를들었다
54못난청춘의밤
56빛은차단되지않는다
58나무가서있는곳에서서

제3부거울속에는익사한사람들이있네
62무게를다는아침
64불빛의시간들
66그마음이
68거울속에는익사한사람들이있네
70몸살의기억
72어항속거북이
74해지기전
75낙타가사막을건너예수를만나러간다
76엘리베이터안에서
78비는길을지우네
80봄바람에꽃잎흩날리고
81도라지꽃을파는여자
82처음그자리를위한기도
84겨울나무를위하여
86흐드러진너처럼
88고양이가있는숲

제4부망각의형식
92개미를보는풍경으로
94망각(忘却)의형식
96여름,소나기
98섬을보았네
100꽃그늘을지우는
102별들이쏟아지는저쪽
103죽음이느릿느릿지나간다
104봄,목련꽃에대하여
105쇠를두드리다
106손톱깎기
108사막의별들은어디로갔을까
110봉숭아꽃잎
111먼지

해설
112비극적일상의고행│오민석

출판사 서평

저자의말

나의생각이넘쳐나는일상은흐르는물처럼바뀌지않는데,
일상은늘누군가를기다리다지치는것이다.
바람이불고,또아파하고
그러다더이상아파할힘이남아있지않을때나는잠을청한다.

돌아갈수없는사막의모래같은해묵은관념들을비우기위해바랜빛들은풍경으로남겨두며나의기록같은꽃잎들을바람에날려본다.
2025년12월

책속에서

<그대기억속의붉은사막은허구였네>

그대기억속의사막은허구였네.그대만나기위해나는햇살처럼가볍게쇠북을두드리며사막을찾았는데.헐거운몸을비비며그대는치욕에쫓기고있었지.나를기억하지못하는그대는돌아오지않고.잃어버린그대몸에는불타버린꽃잎만떨어져쌓이고있네.사방으로날리는욕망의깃털들은그대의사막에힘겹게방울만흔들고있네.나는홀로그대가미워지고모래바람은길잃은자들의상처가되어가고있네.
소멸되는도시속공포에젖은푸른기억은어디갔는가.이제그대가앉아있는콘크리트바닥의붉은피는속깊은강으로흘러더이상절망에울지않겠지.이도시어디에도그대의사막은없네.
잊어도좋으리.붉은사막은허구였다고.

<문을버리다>

문안에
나는갇히어있고
어둠은쉽사리달아나려하지않는다.

나를버린컴컴한숲을둘러싸고있는안개처럼
문안은은밀히나를기다리는꿈인가
멈추지못하는어둠이흐르는이곳의
반짝이는검은빛이창백하다.

팽팽히당겨진문을밀치고
문틈을파고드는미세한욕망들격렬히요동치는데
고요한어둠속에만들어놓은길은
끊임없이나를괴롭히리라.

어쩌면내겐길이없을지도모르는일
나는절대스스로문을열고나가지못하리.

<슬픔으로가득할고요한사랑의기억들>

죽은자를몰고가는지상의마지막노을속
푸른바람이갯벌에묻힌다.

하루종일가졌던수많은초라한생각들이
언제나경계도없는방향속으로날아오르고
내가기억하는나의사랑은
늘무서운죽음위에서있다.

지금은갯벌에서흘러나오는바람소리를듣는시간
흔들리며어두운골짜기를따라나선
쩍쩍갈라지는차가운바람과
아흔아홉개의죽음을이야기하는시간.
이제저마른갯벌엔누군가읽어줄울음도없다.
네가가졌던사랑의이데올로기는
이제저검은갯벌에묻어야하지.

슬픔으로가득할고요한사랑의기억들
이삶은허무한사랑만이견뎌낼수있지.

나이제못다한사랑을위해
더는울지않으리.

<젓가락에도상처가핀다>

낯선얼굴의식구들이앉아식사를한다.
허기를나르는밥상위에
나는없고날렵한혀에미끄러지는
말들이젓가락을움직인다.
원을자르는직선위에서
젓가락의폭소를따라가는나는투명인간이다.
살갗이드러난나비처럼허기를나르는사선을따라
물결처럼별이떠도는동안도식구들은입을맞추고
속살을숨겨놓은우울한꽃들이
젓가락속에씨를뿌리고있다.
밥상위에잘린혀들이쌓여가고
날카로운소리들이입속에뒹구는동안
입을벌린접시위에나는,
증발하는빛들을골라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