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정선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정선 시집)

$8.00
Description
뱀파이어 혹은 프롤레타리아
안부 없이 떠도는 정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정선의 시법(詩法)은 게릴라를 닮아 있다. 우리 시단의 어떤 사조나 흐름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만의 독법으로 세상을 읽으며 이를 개성적 언어로 형상화한다. 때론 원초적 몰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들어가는 나그네나 온몸을 불사르는 광인의 모습으로 분하기도 한다. 위태로운 문장 속에서 이미지의 폭발을 시도할 때는, 단 하나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적진 한복판으로 주저 없이 나가는 테러범 같기도 하다. 그의 시는 분명 다국적 연합군이나 잘 훈련된 정규군의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난해하거나 관념적이라 할지라도 행간의 긴장을 통해 응축해 놓은 그의 시적 폭발력은 우리 시단에서 쉽게 목격할 수 없는 풍경을 그려낸다. 누가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독고다이로 맞장 뜨는 시인의 운명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그를 한번 제대로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기도 한다.
웅크리고 있던 기억과 감각과 충동 들을 그러모아 정선 특유의 시적 발화를 선보였던 첫 번째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가 시인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번져 가게 하는 이중적 미학을 보여 주었다면, 이번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에서는 앞선 시집에서 치유했던 상처와 기억 들을 질료 삼아 거침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시집에서 과감하게 선보였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흐름을 형성하여 스스로가 나아갈 길을 내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해설을 맡은 김병호 시인은 “고정된 기존의 감수성과 상상력, 사유 체제로는 다가설 수 없는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정선 시의 ‘전제 조건’이라고 평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사랑에 대한 사유와 감수성이 여타의 시인들과 달리 크고 다채롭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정선 시인의 이번 시집은 매우 뜨겁다. 시인을 다그치거나 할퀴었을 뭇 기억과 상처 들이 시라는 화로에 던져져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보이게 됨으로써 조금쯤 홀가분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말 주머니를 쏟아 말끔히 비워 냈기에, 스스로를 옭아매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리라. 그러하기에 시인은 비로소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듬을 수 있”(‘시인의 말’)게 된 것이다. 그럴 수 있기까지 시인은 어떤 시간을 건너온 것일까. 그 시간의 주름 속에는 어떤 사연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속에 그 시간과 사연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저자

정선

2006년『작가세계』로등단했다.시집『랭보는오줌발이짧았다』,에세이집『내몸속에는서랍이달그락거린다』를출간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말라가,말라가
보라는아프다
고갱을묻는밤
결핍을죽이는방식
도대체에서아말피까지
작업의정석
달걀한알
밥에대한질문
고흐,리듬앤블루스
도도죽이기

2부
봄을맞이하는자세
불가촉불가촉
볼기의탄력이떨어질즈음사랑도끝났다
오라팽아질
감정노동자B형
피란으로,피란갈까부다
모나크나비들
음악이없는나라
via인생은
뱀파이어를위한노래
한때프롤레타리아

3부
어슬렁어슬렁어슬렁
혁명은아랫도리로부터시작되지
우물,그감정사막
리버랜드
절규한척을띄워보낸다
이탈리아이딸리아
궁금증후군
그릭요거트를바라보는자세
휘게풍으로놀아나기
불협(不協)팔월
깡을살짝얹은비굴카나페

4부
고도는매일온다
격렬鄙劣도
우울백서
그럼에도불구하고랭보와
뭉갰다그러자시시해졌다
슬픈네버랜드
늪과달빛과여자와
씨앗
혈통의재구성
무창포(無唱浦)레퀴엠
양꼬치가익어가는밤에는

해설|김병호(시인?협성대학교교수)
위험한매혹과위태로운문장의사이

출판사 서평

상처로서황홀경을창조하는자

광기와우울은예술가로서의정체성을증명하는표식이다.시인은“피한방울만으로도황홀경을창조”할수있는,위대한뱀파이어들을‘예술가’라고일컫는다.그들은피한방울만으로“한폭의그림이되고시가찬양을하”게하는존재들이다.“치사량의우울”을필요로하는예술가로서의숙명을수긍해야만상처투성이의자신을기꺼이받아안을수있는까닭에정선의시에서는예술가로서의자의식이묻어난다.

그리하여지금은건기,별빛휘장을두르고갈증의등뼈로기둥을세우는곳호흡조차쩍쩍갈라진사각동굴바닥에는광기가깡통으로뒹굴고있다당신들이새끼잃은승냥이속울음을어둠속에풀어놓으면한폭의그림이되고시가찬양을하고당신들은피한방울만으로도황홀경을창조하는예술가,위대한뱀파이어들
―「뱀파이어를위한노래」부분

“우울은지구를몇바퀴돌아도스러지지않”(「우울백서」)는다는것을알기에“오래도록우울로이글거”리겠다고말하면서도시인은“발톱을세우고몸을더듬”으며“우울의정글을키”우는뱀파이어들의광기와우울로는그어떤감흥도얻을수없는오늘이왔다고말한다.이제시인은“검붉은피”가아닌푸르게재생된녹색피를갈구한다.“지금은피를바꾸어야할녹색의시대”라고선언하면서말이다.“망아지를길들이듯/나를순치하려들지”(「피란으로,피란갈까부다」)말라고외치는시인에게녹색피는곧“반골의증표”인“야생”을상징한다.피를바꾼다는것은곧기존의혈통을부정하는일.이제껏제몸속을흐르던피를송두리째뽑아내고새로운피를주입하는그일은전존재를갈아엎는거대한작업이다.그중대한전환의시점,시인이취할‘다음’포즈를지켜볼일이다.


‘벨벳혁명’을도모하는치열한유랑자

시인은아직발붙일곳을정하지못했다.아니,정하지‘못한’것이아니라정하지‘않은’것인지도모르겠다.부지불식간에시인자신이일구어나갈시세계를탐색중인까닭이다.‘길없는길’에서갈망하는사랑그리고자유는‘과감한시적유랑(流浪)’,즉모험을감행하게하는동력이된다.정처없는떠돎이기에위태롭지만열정적인그여정의기록은읽는이로하여금‘전율’과‘공감’을불러일으킨다.전율과공감사이,그팽팽한긴장속에서“자신의시와자신의혁명에치열한탐구와헌신”(김병호)을마다하지않는시인의열정이베어난다.시인은“피를흘리지않고평화적으로이룩한혁명의대명사인‘벨벳혁명’”을꿈꾼다.

어떤결정은폭설처럼덮쳤다
밤의궁륭을떠돌다역설을질문한다도대체,라고묻기도전에미세먼지속에서꽃들은피어났고어차피꽃들은금세흐를것이었다위태로운문장들이수작을걸었다어차피를버리면때묻지않은아말피가가까워진다고그래아무것도캐묻지않는다면머잖아내넓적다리에서는사과가열릴지도몰라
뻥뚫린옆구리에주먹을넣어본다옆구리는아직덜아물었고주먹은더이상주장을하지않는다
사랑스런아말피가잠든그곳에는사심없는친절이레몬향으로퍼졌다지선글라스속음모도태양으로환하다지목적없는돌멩이들은대가도없이밤새온몸으로노래를부르고말이야
참담함도모두아름답게장례하는
아,말,피.
사과를버리자내곁엔제자리에서나고자라고죽는
나무나풀밖에남지않아너도그렇니?벨벳혁명을꿈꾸는게으른자아말피로가자구
네가베어버린온기
내가짊어질아픔
호의가공기를떠돌다흔적없이사라지는것을여러번목격한사람은알지미소뒤의폭력이얼마나끔찍한지를파도가들려주는전설에맞춰네잇몸이기타를칠때까지요긴한것은한줌혁명뿐

내가눈살을찌푸리는건
그나마너에게여지가있다는신호지
―「도대체에서아말피까지」전문

“위태로운문장들이수작을걸”(「도대체에서아말피까지」)때면자신을“키운은둔의사막에절규한척을띄워보”(「오라팽아질」)내곤하는시인의시적유랑은시속에서낯선여행지의지명으로표상된다.그중스페인의‘말라가’,이탈리아의‘아말피’는생경한이국의풍경과함께낯선감정을불러일으킴으로써온감각을깨운다.마치목적없는여행(유랑)처럼언어스스로자유롭게흐르도록풀어놓는시적야생성은자유를동경하고염원하는시인의짙은갈망에서비롯된것이리라.그끊이지않는갈증이시인으로하여금길없는길을떠도는과감하고도치열한시적유랑을멈출수없게한다.바로그힘이시인자신과그시를읽는이로하여금전율하게하는것이다.

전율의순간에우리는본능적으로스스로를단속하며내부적으로는수렴의공간을만들어내게된다.이는감상의주체인독자가정선시인의작품에서전율을공감한다는것이며,자기자신의에고가무너지는순간을경험하게된다는뜻이다.전율에의한무너짐은어떤열기나각성보다는오히려차가운자기성찰과인지의충격에의한것일확률이높다.특히정선시인의경우에는말이다.깊은사유와사색이돋보이는그의시편들을읽고경험을공유하게될때,독자는시인이스스로를초월하고자하는간절함의전율을느끼게된다.이것은단순한인지적충격과는전혀다른차원의것이다.
―해설,「위험한매혹과위태로운문장사이」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