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씨의 오지 입문기

자칭씨의 오지 입문기

$8.00
Description
달나라로 향하는 위태로운 생의 줄타기
그리 멀지 않은 ‘오지’에서 써 내려간 조미희의 첫 시집
빌딩이 들어찬 모노톤의 도시 한복판, 파리한 얼굴의 자칭 씨가 서성이고 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난생 처음 발 딛는 세상 끝도 아니건만, 자칭 씨에게 이곳은 분명한 ‘오지’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문명에서의 오지”(「오지로의 입문」)인 것이다. 조미희의 첫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현대판 오지’에서 생명줄을 부지하기 위해 “이자와 실직과 월세의 나무줄기를 잡고 곡예를” 하며 이상향의 ‘달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칭 씨의 생존기와 다름없다. 시인은 ‘오지’에서 분투하는 이 시대 ‘자칭 씨’들의 일상을 그려 냄으로써 삶의 무게와 애환을 여실히 보여 준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담담하게 새긴 소시민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은 “잿빛”(「달을 갉아 먹는 집」)을 띤다.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조미희 시인은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번쯤은 되돌아보게 만드는 감각의 운용이 돋보인”(최현식)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시인은 생의 단면들을 포착한 60편의 시로써 하나의 조각보를 완성하였다. 이 조각보에는 다양한 표정의 가난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심히 바라보면 그저 개개의 그림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골똘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낯익은 형상이 떠오른다. 하루하루 버거운 삶의 시름을 삼키며 자기 몫의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군상 말이다. 언어라는 바늘에 상념이라는 실을 끼워 닳아지고 구멍 난 현실을 한 땀 한 땀 기운 시들은 그래서 도리어 따듯하고 안온하다. 온기를 간직한 이불처럼 읽는 이의 내면을 포근하게 감싸는 이 시집은 타인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사랑을 잃지 않은 까닭에 잔잔한 위로가 되어 스며든다.
저자

조미희

서울에서태어났다.2015년『시인수첩』신인상으로등단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그리운무중력-발렌티나테레시코바에게
십이월
광대의뒷면
쉬기좋은방은어느계절에있지
호박에관한명상
오지로의입문
병동
물고기의등엔가시가있다
노량진,노량진
그림자의집
폭暴의시간
올림머리증후군
바닐라스카이
카운트다운
잠자리

2부
버렸던귀찾아오기
이상한교실
담장,장미그리고담배
벽과등사이에서
신과전당포는너무높은곳에있다
지우개를사용하세요
독이라는이름의독채
그림일기
귀만자라는남자
어떤노래는누군가를데려오고
정박
달을갉아먹는집
빨간거짓말을사랑했네
맷집
그게그거였어
철심의유효기간

3부
눈물의태도
고전
해변
나무는나무를부르고
그만이라는말
민들레착륙기
나는밤고양이라오
정월의16일
감자에싹이나고잎이나서쌀쌀쌀
어제의약속
소녀였을때
당신이없다
조언들은다죽었다
봄,짧은낮잠
놀라운신전

4부
토끼발자국으로숲의불이켜질때
동화의딜레마
앞발을핥는담장
거기에구름과고양이가있다
보라의사육제
장롱
우물
꽃들이펄펄끓고
여름의안쪽
환상상회
집이라는역사
버블욕조
비를소비하는감정
중력의밑변

해설|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학교교수)
난쟁이의달나라

출판사 서평

매일,조금씩,달나라를향하여

시인은노력으로도애씀으로도도무지해결되지않는삶의문제들을향해삿대질을하지도,막무가내식의똥배짱을부리지도않는다.이견고한현실의부조리에대해긍정도부정도하지않는것이다.다만시인은읊조릴뿐이다.“겨울에서오래도록연체”되고있다고.“십이월은나무들만추운게아니”라고.“아무리뒤져도일밖에없는계절”에“최저임금상승만큼살짝올라가는/1월의기온을기다린다”(「십이월」)고.차가운겨울,가만가만새어나오는입김처럼서늘한독백에는은은한슬픔이묻어나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애달프거나구슬프지않다.시인으로하여금이팍팍하고먹먹한현실을덤덤히살아내게하는힘은무엇일까.그것은바로생의‘의지’그리고‘희망’이다.

바람이예민하게문을두드렸고나는
무국적자처럼떨었다
저녁대신설탕도넣지않은내일을마셨다
창틀로고요가시끄럽게쏟아진다
인생은이렇게중독성으로살아내는것
커피색에모두가어두워진다고생각했다
문이없는세상이통째나를삼켰고
거미가흔들리는집을지었다
환하게보이는사생활
흔들려도살수는있겠지?

양떼같이몰려오는눈송이를세며눈을감는다
오늘꿈은맑았으면좋겠고
봄볕에졸고있는햇병아리한마리사고싶다

달이성당스테인드글라스로반짝떨어졌다
―「달을갉아먹는집」부분

양떼처럼눈송이가날리는가운데가만히눈을감은시인은“오늘꿈은맑았으면”그리고“봄볕에졸고있는햇병아리한마리”살수있었으면,하는소망을품는다.이런소박한염원이담긴시인의‘기도’는“성당스테인드글라스로반짝떨어”지는‘달’로표상된다.달은곧시인의희망이담긴기도그자체인것이다.달(달세)이갉아먹히는엄혹한현실속에서“무국적자처럼떨”수밖에없는처지지만시인은결코의지를꺾지않는다.“흔들려도살수있”다는믿음으로매일,조금씩,달나라로나아가는것이다.시인의희망어린기도가차곡하게쌓인내밀한달나라로.

조미희의시세계가조세희의소설세계를계승한면중에서‘달나라’의상징은주목된다.조세희의소설에서난쟁이는달나라를자신의이상향으로삼고날아오르려고했지만가난과소외감으로인해이루지못했다.난쟁이가꿈꾸는달나라는지구에서멀리떨어진우주공간이아니라자신이발딛고살아가는지상세계이다.“모두에게할일을주고,일한대가로먹고입고,누구나다자식을공부시키며이웃을사랑하는세계”(『난장이가쏘아올린작은공』228쪽)인것이다.조미희가추구하는달나라역시이와다르지않다.그리하여시인은사회적존재로서달나라를포기하지않고날아오르려고하는것이다.
―해설,「난쟁이의달나라」부분


시간이지나도‘그만’할수없는일

인력으로막을수도중단할수도없는현상들이있다.순환하는계절,무시로변하는날씨,그리고누군가를향한사랑…….오지마라,그만해라말해도올것은오고일어날일은일어나고만다.이사실을누구보다잘아는시인은이미온“봄에게그만하자/그만하면됐다고말하면봄이멈”추냐고묻는다.내내담담하고나직하게독백을읊조리던시인은이제목소리에힘을실어세상을향해질문한다.“가장간절하게뜨거운”새싹돋는자리에피어나는수선화더러“그만노랗게피라고/말할수있”냐고.노란색이다피어나기까지하염없이짧기만한봄이라서시인의마음은더욱초조하다.노란색이머금은비통한슬픔과눈물의함의를우리는이미잘알고있다.이에부끄러움을무릅쓰고서둘러노란리본을다는시인의모습은사뭇비장해보이기까지한다.시인은안다.시간이지나도이일만큼은‘그만’할수없다는사실을.

그만하면됐다
그만하자는말
봄이왔는데온봄에게그만하자
그만하면됐다고말하면
봄이멈춥니까

새싹돋는자리는
가장간절하게뜨거운곳
노란수선화에게
그만노랗게피라고
말할수있습니까

노란색이다피기까지
봄이하염없이짧기만합니다

부끄러운얼굴로
노란리본을달았습니다
노란색이벼랑처럼가파릅니다
―「그만이라는말」부분

‘홀로’살아가기에는외롭고고단한세상에서더불어‘함께’살아가기를바라는시인의따스한시선은시곳곳에서묻어난다.조미희의시편이시종추위와가난과슬픔을이야기함에도마냥춥지도비참하지도암울하지도않은까닭은시인본인이같은문제를앓고있는타인들을오롯이보듬어안기때문이다.“함께흐느낀다는것은따뜻한이불같다”(「십이월」)고말하며“얼룩도꽃이되기를”(「지우개를사용하세요」)소망하는시인의품은넉넉하고아늑하다.그러하기에‘오지’에서의치열한분투도감내할수있고,아득한‘달나라’를향한위태로운줄타기도계속해나갈수있는것이다.‘홀로’가아니라‘함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