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조성국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조성국 시집)

$8.04
Description
뜨겁지는 못했어도 욕보이지 않고 견뎌 냈다는,
살아남아서 더 아팠다는, 미안함은 누구의 몫일까?
―시인 조성국의 세 번째 시집
미안함이 사무치면 시가 되는 것일까? 미안해서, 그 사무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서, 그나마 “맘 가는 게 이것뿐”(‘시인의 말’)이어서 시를 써야만 했던 이가 있다, 반세기 넘는 세월을 건너며 오르막 내리막 생의 굴곡을 허다히도 타고 넘었을 것이 분명한데, 나만 멀쩡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 조성국 시인이다. 때때로 넘어지고 굴러 무릎도 까지고 손바닥에도 생채기가 났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발을 털며 짐짓 괜찮다고 말한다. 어쩌면 ‘괜찮은 척’인지도 모를 포즈로 짐짓 기세도 부려 가며 겉과 옆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는 기억 속에 아련한 구석 어딘가, 잊히고 묻힌 어느 언저리를 발견해 그에 얽힌 사연을 읊조리는 시인의 내면은 사뭇 미안한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광주, 그곳 염주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성국 시인은 도무지 잊히지 않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으로 인하여 못내 편치 않은 생을 살아왔다. 그가 지닌 시대적 부채감의 구체적 근거는 그의 삶의 궤적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히 1989년 조선대학교 재학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다 숨진 채 발견된 이철규 열사와 함께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을 창간했던 시인의 이력이나 그가 등단하면서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시의 제목이 「수배일기」였음을 돌이켜 볼 때 시인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와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시대와의 불화라기보다는 역사의 한복판을 질러 온 청춘의 열정과 빛나는 좌절, 그리고 사반세기가 훌쩍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미안함과 편치 않음이 그가 걷고 있는 시의 자리이다.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로 등단한 그는 이제까지 두 채의 시의 집을 지었다. 등단 17년 만에 펴낸 『슬그머니』와 5년 후 펴낸 『둥근 진동』이다. “풍경과 인사(人事) 속에서 어떤 절정의 순간을 포획하는”(고재종, 『슬그머니』 추천글 중에서) 그답게 이번 시집에서도 조성국 시인은 그를 둘러싼 풍경과 사람들에 비낀 사연들을 농축된 토속 언어들로 채집해 내었다. 시의 집짓기를 일컬어 “발견하는 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시인은 과연 눈과 마음에 맺힌 상들을 발견해 내어 시인의 고유한 어조와 음색으로 노래한다. “나만 멀쩡해서 미안”한, 그래서 하염없이 구석을 발견하고 응시할 수밖에 없는 그의 내면에 대하여.
저자

조성국

전라남도광주염주마을에서태어났다.1990년『창작과비평』으로등단했다.시집『슬그머니』『둥근진동』,동시집『구멍집』,평전『청년이철규』등을출간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반동의꽃봉오리향기가이내화안하다
구석에서생긴일
저녁목소리

떨림의무늬명옥헌1
못물에이우는꽃잎파문으로…명옥헌2
사라진집터,삐뚤빼뚤배롱나무꽃만돋는명옥헌3
탐매
저녁이올때
봄밤
또,봄밤
쇠스랑게의손차양멀리
갓밝이

2부|살그머니찾아오기나하듯이
복날이면생각나는기억
발칙한생각
층간
매혹적이랄만치출중한미모의여자와
옥녀봉
뒈지게대갈통몇대쥐알려박을수밖에
실연
동정여인숙
방울토마토
빳빳한내시집한권이
개미의집
나비늑인
실직
뒷골목선술집에가는이유

3부|새까맣게문드러져빛나는
도다리
자벌레
무넣고고등어찌개를맛있게끓이는방법
도둑괭이
영월(盈月)
파일(八日)
입양
돌부처코를갉아먹고생겼다는나는
당산나무상제(喪祭)

맏상제
조문의봄밤
염주마을옛집에들다
명자나무서슬

4부|너에게파묻히다
너에게갇히다
상견례
꼽꼽쟁이
손바닥낙인

불두
입김
월광욕
어떤벌(罰)
침몸살
비몸살
한식구
말경명옥헌4
하숙
상중(喪中)

5부|치욕도단련된다
봇물
고욤나무집
초승달연정
첫눈
치욕도단련된다
끼니
매병
지혜학교
늦은목련
광주공원
수선화피는망월28-2번지
봄동
왼발잡이
자정
일죄재범
망각

해설|서효인(시인)
미안함의공동체에이르기

출판사 서평

숙명처럼짊어져야할빚진마음

“살아남아서더아픈한시절”을어찌다헤아릴수있을까.다만우리네의생이누군가의목숨을담보로연장되는것인지도모른다는생각을할때고개가주억거려진다.그렇게우리는하루,한달,한해씩을잇대어가며다른이를‘대신해’“살아남은”존재이기에,도리어살아있음이더무겁고아픈것이다.그러나그빚진마음은역설적으로하루또하루를뚜벅뚜벅걸어나갈수있는힘의근원이되기도한다.“겉과옆에무엇이있고누가있어나를이만큼견디게했는지”를끊임없이상기하며오늘을살아가고내일을희망할수있는것이다.그렇게시인은“뜨겁지는못했어도한때열렬히사랑했던것들을욕보이지않고견”(『시인수첩』2019겨울호,『詩사회』중에서)디어낸다.
3.
나만멀쩡해서미안한,
살아남아서더아픈한시절
네가살아남았다한들
마음편치않긴너도마찬가지였을것이다
몸도사리듯
가장구석진자리에앉아서도
새맑게웃는버릇여전하구나
앳된흑백의청춘과
붉은산그늘드리워진영정맡에향피우듯
담배한개비물려놓고
예서눈빛치떠뜨며몇발자국떼면
확붙었다꺼져가는성냥개비의뼈그스름같이
고스란히밴
비명,그러나증거댈수없는무등의
청옥동4수원지기슭을
후다닥,쫓겨뛰는숨가쁜발자국소리
여전히들리듯보이는데
보이듯들리는데
어쩌자고나는너를먼저보내고매번바람의
조문만받는것이냐
너를먼저보낸서러움의,분노의무게는자꾸만
자꾸만아련해져가벼워지는것이냐
―「수선화피는망월28-2번지」부분

그럼에도불구하고“먼저보낸서러움의,분노의무게는”자꾸만“아련해져가벼워지”기만한다.“후다닥,쫓겨뛰는숨가쁜발자국소리”가“여전히들리듯보이”고“보이듯들”려도,“서러움”과“분노”의무게는세월에풍화되어아스라해져있다.기억만큼감정도닳고해어져가는것일까?어제일인듯선연하고명징한소리에엉겨드는시인의감정은그래서더욱복잡하고착잡했을테다.그것이결코“멀쩡”하지않음에도“멀쩡해서미안”하다고읊조려야만하는시인의숙명인셈이다.

밀려난것들을끌어안는마음으로

구석은구석이라는이유로없어지고,구석이없어짐으로하여또다른구석은생긴다.거기에는조성국시인이능숙한솜씨로부려놓은남도말도있을것이고,“솔깃하며정갈하니새겨듣는”(「갓밝이」)떨림도있을진대,점점밀려난다.더구석으로,저기구석지로…….『나만멀쩡해서미안해』는우선그구석에대한시집이다.시인의성정대로,구석에먼저위치하여구석으로밀려난것들을껴안는시집인것이다.
―발문,「미안함의공동체에이르기까지」부분

시인은서서히세월에밀려나는,그래서잊혀가고묻혀가는구석의풍경들을살뜰히들여다보고따스하게끌어안는다.“안침진뒤울안”에“낭창낭창휘어”지는“은방울꽃대”(「구석에서생긴일」)에,“고매(古梅)향걸터앉은툇마루/호듯호듯끓는볕살”(「저녁목소리」)에,“연못가의/돼지막헛간을개조한집”(「사라진집터,삐뚤빼뚤배롱나무꽃만돋는」)에시선을드리운다.그뿐인가.“폐가에서주워온아랫목구들장을빈마당디딤돌로/갖다놓”기까지한다.그누구도눈길주지않는구석을이토록기웃대는시인의속내는무엇일까.

폐가에서주워온아랫목구들장을빈마당디딤돌로
갖다놓았더니,
곁이생겼다

바람에실려온앉은뱅이민들레나땅꼬마채송화가꽃
댈올리고만판피기도할라치면

돌옆에,라고
자늑자늑말할수있게되었다

불기운까맣게식은옆구리에곁이생겨사방팔방다
환한걸보면
문득사는게별게아니란생각이들었다
―「곁」전문

일부러멈추어서서시간을들여가만히들여다보지않으면기척조차감지할수없는존재들.그저별수없이사위어가는불길처럼허망한존재들에게시인은숨을불어넣는다.마음둘곳없어서성대다가도그런존재들을발견하면한달음에달려가힘껏끌어안는다.그리하여명을다한“아랫목구들장”조차도새생명을입고,그주위의것들을환히밝힌다.“불기운까맣게식은옆구리에곁이생겨사방팔방다/환”해졌기때문이다.스스로를“이미한물간내가”(「염주마을옛집에들다」)라고일컫는그가구석을품는까닭은잊혀가고묻혀가는그풍경들속에여전히살아움직이는불씨가있음을알아서다.그렇게조건없이끌어안는시인의너른품에서구석으로밀려난존재들의따스한연대가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