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뒤편 (정찬일 시집)

연애의 뒤편 (정찬일 시집)

$8.36
Description
‘에덴’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산책자
4·3을 품은 시인 정찬일의 세 번째 시집
바람 이는 어느 밤, 들리지 않는 神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 그림자를 쫓는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존재를 잊은 神이 산책하는 시간, 그는 ‘나’라는 참된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경계를 흩으며 위배와 균열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호하고 어룽져 있지만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운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보이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에 몰두하는 실존”(『시인수첩』 2020 봄호, 『詩사회』 중에서)이라고 말한다. 인과에 매여 있었던 일상의 그물을 걷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 혹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쫓아 ‘에덴’의 경계를 서성이는 산책자, 정찬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연애의 뒤편』이 〈시인수첩 시인선〉 서른세 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에 ‘시’가,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선 뒤 운문과 산문을 아우르며 작가의 길을 충실히 걸어온 그는 소설 「꽃잎」으로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았으며, 시 「취우(翠雨)」로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정찬일 시인이 탐색해 온 그림자는 기실 ‘시대의 그림자’인바, 유년 시절 이후 줄곧 제주에 깃들어 살아온 그는 제주의 아린 상처를 간직한 4·3 항쟁의 흔적들을 더듬어 그림자에 어린 진실을 밝혀 내는 일에 시인으로서의 인생을 걸었다.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삼밧구석’의 슬픔과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치유의 과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당선 시 「취우(翠雨)」는 계절마다 시간마다, 수십번씩 삼밧구석을 찾아가 그 터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골똘히 들여다보며 침잠한 끝에 건져 올린 작품이다. 시리고 아린 4월의 봄, “시적 성취와 함께 치유의 덕목을 고루 갖”춘 그의 시편들을 더듬으며 바람과 울음, 그 소리에 비낀 4·3의 슬픔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보자.
저자

정찬일

1964년전북익산에서태어났다.1998년『현대문학』에시로,2005년『문화일보』신춘문예에소설로등단했다.2002년제2회〈평사리문학대상〉소설부문,2018년제6회〈제주4·3평화문학상〉시부문을수상했다.시집『죽음은가볍다』,『가시의사회학(社會學)』을펴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물의얼굴,사람의얼굴
큰넓궤겨울볕뉘
겨울궤
하이,카를마르크스씨!
벌써입동
물의얼굴,사람의얼굴
도엣궤
폭낭
숨비나리
취우(翠雨)
무등이왓
거슬러올라닿는침묵들
겨울문장
연대(連帶)
봄,무등이왓

2부|태풍을대하다
江汀,가다-몸을뚫고지나가는것들
연애의뒤편
8월의목련아래에는
섯알오름의새비
전향의서(序)
신발
오름에새겨넣은문장
지박령(地縛靈)-시린사랑
비켜가지않고바로가는강정(江汀)
태풍을대하다
환한,나무의밑동
흐린저녁이도착하기까지
4월3일,저물무렵
사계(四季)

3부|풋사과의내력
그림자가묽어지는시간
나무-나-페르난두페소아에게띄우는슬픈신호
혼야(昏夜)
봄날
풋사과의내력
말에치인날은흐리다
나무의귀
반야(半夜)
창가
유리(遊離)의배후
길잘찾아가는법
봄춘(春)붉을단(丹)
뒤척였으므로찾아오는
꽃독법에대한조언
나무
Sweetcat이라고?
낮달,불립문자(不立文字)

4부|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고어(古語)를읽는밤-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빈방
눈물의근원-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엉겅퀴-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틈이내뱉은단편들-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투명에대한명상-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어떤신호
골목을빠져나온바람
통화-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날것들,속내가불편치않다

내이야기를하는이유
木蓮곁바람처럼
八月-각주(脚註)로가득한날들
서술의밤
겨울낙관(落款)

해설|홍기돈(문학평론가ㆍ가톨릭대학교교수)
전회(轉回)의시학-무(無)를근거로삼는자기구원의도정

출판사 서평

정찬일의에덴,그뒤편에는

정찬일시인에게‘에덴’은“맹목적으로따라야하는세계”다.또렷한짐승을가두어기르는‘우리’처럼속박이전제된곳인셈이다.따라서그에게에덴은벗어나야만하는세계다.그러한까닭에시인정찬일은에덴의경계에서하염없이서성이고있는것이다.“거추장스러운에덴의옷을벗고선악과를따먹는위배와균열”을감행하기위해서다.그렇다면에덴의뒤편은어떤세계이며,무엇이자리하고있는것일까.

팽나무빈가지끝에매달린0그램의그림자들,
창백한그문장을읽는다.

피묻은배내옷
씻긴한톨의흰밥알
첫서리의예감
아직은종달새노래와멀리떨어져있는

저적요의눈물덩어리

오래전으로부터눈먼밤의폭우를뚫고
도착한바람과겨울햇볕의연대를
제몸에깊게새겨넣은무등이왓팽나무경전,
생일케이크에꽂힌촛불끄듯
함부로읽지않는다.
함부로베껴쓰지않는다.

내이름에곧다다를,
멀리서또다시오는햇볕이깊다.
-「연대(連帶)」부분

맹목적으로따라야하는세계너머,곧에덴의뒤편에는‘연대’하는세계가있다.“오래전으로부터눈먼밤의폭우를뚫고도착한바람과겨울햇볕의연대”가이루어지는세계.“함부로읽”을수도“함부로베껴”쓸수도없는장엄한세계가그가서성이는에덴의경계너머에있다.그세계에닿기위해시인은“습관처럼지나치던오래된팽나무를에덴밖의시선으로바라보”며자연이속살거리는소리에귀기울인다.그러고있노라면어느덧늙은나무한그루“제몸에깊게새겨넣은무등이왓팽나무경전”되어그에게닿는다.에덴뒤편에서그는그렇게한없이망연(茫然)해진다.

4·3의상처를품은‘나무’가되어

『연애의뒤편』의시편들가운데상당수는‘제주’를담고있다.그냥지명으로서의제주가아닌‘4월의제주’아니‘4·3의제주’다.이는큰넓궤,무등이왓,삼밧구석등과같은장소를통해생생히재생된다.“누가카인의증표를그손에쥐여주었나/총부리겨누고방아쇠당기고사람들등에잉걸불던졌던사람들/이름한자적혀있지않은몰자비(沒字碑)/겨울하늘에새겨진아이들이름한자적혀있지않은/몰자비위로귀향하듯닻을내리는/동짓달열이틀저달빛//허한내등에닻내린겹겹의달빛또기운다//떠올라라,내일다시등위로떠올라라”(「무등이왓」).서늘한달빛번지는겨울하늘에선연히떠오르는이름없는사람들.시인은내일다시등위로떠오를달빛외면치않고끈질기게노래한다.

오랫동안4ㆍ3은한국사회에서언급조차불온시되었고,그러한현실에맞서느라4ㆍ3소재시편들은참상의고발ㆍ증언에치중해왔던경향이있다.금기가풀리면서4ㆍ3을다루는시작법이여러갈래로모색되고있는바,정찬일은전면화시킨자연가운데4ㆍ3을배치하는방식으로제길을내고있음이이로써증명된다.
-해설,「전회(轉回)의시학」부분

이처럼정찬일시인은‘자연’속에4·3의아픔을녹여낸다.자연이야말로생의진실에가장가까이닿아있음을알기때문일까.그래서인지시인은집요하리만큼‘나무’에몰두하고,자신또한‘나무’가되기위해깊이뿌리를내린다.“제그림자를오래들여다볼때뿌리깊은밤은열린다”(「연애의뒤편」)고진술한것도그러한맥락일것이다.“한자리에머무를수밖에없”기에더욱깊숙이뿌리를드리울수밖에없는나무의숙명으로인하여내면의어둠은차곡히쌓여갈테지만,“그어둠을자양분으로나무는상처앓는이들의그림자까지감싸안을수있”(해설,「전회(轉回)의시학」)음을시인은굳건히도믿는것이다.